돈 드릴로의 ‘화이트 노이즈’가 거의 40년 만에 영화화가 되었습니다. 토마스 핀천과 함께 미국 포스트 모던 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대단한 작가가 바로 돈 드릴로입니다. 저는 드릴로의 소설 중 국내 번역된 책들을 대부분 읽었는데요. 존 애프 케네디의 죽음의 비밀을 다룬 정치 소설 ‘리브라’, 제목에서는 마오쩌둥을 연상시키지만 실제는 문선명 목사를 비판한 ‘마오; 그리고 아담 드라이버 주연, 결혼 이야기로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던 최고 대표작이죠. 노아 바움벡 연출로 이번에 영화화된 ’ 화이트 노이즈‘까지 모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드릴로는 정치적이며 비판적이며 그와 동시에 유머러스합니다. 포스트 모던 문학하면 남미에서는 보르헤스, 북미에서는 돈 드릴로라고 할 정도로 그의 위상은 대단하지만 국내에서는 영문과 대학원생 정도 되어야 읽을 수 있는 작품으로 소개돼 왔죠. 포스트 모던 소설은 중심 플롯이 없이 이것저것 다루면서 독자들을 어렵고 난처하게 만드는 골치 아픈 속성이 있는데요, 돈 드릴로 소설에도 그런 특징이 다분합니다. 영화도 그런 면에서 지극히 포스트모던합니다.
영화는 원작에 충실합니다. 원작에서는 흑인으로 설정되지 않았던 엘비스 학과 교수가 흑인인 돈 치들로 바뀌었다는 정도 외에는 거의 비슷합니다. 소설에서는 세 개의 큰 이야기가 있는데, 영화 역시 그렇습니다. 그 세 개가 작품의 근간이면서 그가 던져주는 현대 미국을 이해하는 키워드입니다.
1) 현대 미국인이 히틀러와 엘비스에 관심 있는 이유
주인공은 미국 중소도시의 가상의 대학에서 히틀러학을 가르치는 히틀러 학과 교수입니다. 물론 이런 학과는 없습니다. 아무리 히틀러의 악명이 영원한 세계 최고라고 해도 학부에서 특정인의 이름을 써서 학생들을 모집할 경우는 없습니다. 그리고 엘비스 역시 마찬가지죠. 미국의 대중문화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그런 학과를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드릴로는 이 두 사람을 전면에 내건 학문을 소설에서 모티브로 삼았습니다. 왜였을까요?
히틀러는 미국인들은 자국의 역사가 아닌 외국의 역사인물 중에서 유일하게 모두가 그 이름을 기억하는 인물입니다. 미국인들은 상대와 싸우면 결론은 이렇게 끝납니다. “이 히틀러보다 나쁜 녀석” 기승전히틀러로 히틀러는 미국인들에게 악의 대명사로 악마와 동의어입니다. 드릴로는 히틀러를 욕하면서 미국인들이 영원히 악당으로 기억하는 이유는 그의 악마적 매력이 바로 이 두 단어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바로 히틀러는 죽음의 아이콘인 ‘에인절 오브 데스’죠. 바움벡 감독은 아담 드라이버가 히틀러에 대해 강연할 때마다 죽음을 상징하는 검은 망토를 입고 마치 죽음의 천사(그림 리퍼)처럼 분장해 청중을 위에서 덮치는 장면을 연출해 히틀러가 곧 죽음을 상징한다는 사실을 증명했죠.
엘비스 역시 죽음으로 미국문화의 아이콘이 된 인물입니다. 그의 죽음은 미국인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의 죽음은 메릴린 먼로 존 에프 케네디의 죽음과 비슷합니다. 히틀러 하면 죽음이 떠오르는 건 실제로도 그렇습니다. 실제 전쟁으로 가장 많은 미국인을 죽인 사람이 바로 히틀러입니다. 실제 미국인들에게 죽음(유럽 전선에서 미국은 아시아 전선보다 세 배가 많은 삼십만 명이 사망했습니다.)을 선사했지만 엘비스의 죽음은 그 반대의 죽음입니다. 그리운 안타까운 죽음이죠. 그러면서 한 시대의 종언입니다. 미국을 상징했던 록 앤 롤의 죽음이죠. 록은 힙합에게 자리를 내주고 미국 대중음악의 세대교체를 불러왔고 지금은 아시아로 건너와 BTS의 세상이 됐지만 미국은 여전히 록 앤 롤의 전성기를 연 엘비스의 그 시대를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원작 소설에서도 히틀러 학과 교수와 엘비스 학과 교수가 멋진 콜라보로 두 사람의 유사점을, 죽음과 마마보이라는 키워드로 풀어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드릴로는 엘비스와 히틀러의 양 극단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미국 현대인의 정서를 드러내려 했고 40여 년의 시대 차이에도 불구하고 미국인들은 두 사람의 죽음을 늘 현재형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2) 과학 기술이 언제든 제2의 코로나를 만들어낼 수 있다
제 생각에 이 명작이 그 화제와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영화화가 늦은 이유는 판권을 산 넷플릭스가 시기를 기다린 듯합니다. 바로 코로나 팬데믹이죠. 원작 소설에서 2부는 주인공이 사는 도시 인근에서 대형 열차 사고가 나고 독극물이 퍼졌다는 소식과 함께 도시 전체를 봉쇄하는 상황이 연출됩니다. 코로나로 도시 전체를 봉쇄한 중국이 떠오르는 장면이죠. 사람들은 건강을 염려하며 자신도 방사능에 오염되었을지 모른다며 가까워진 죽음에 부들부들 떠는 장면이 나오죠.
사람들은 극도의 혼란에 빠지고 인터넷이 없던 시절에도 가짜 뉴스와 소문은 급속도로 퍼지면서 삶의 조건을 최악으로 몰고 갑니다. 현대는 화학물의 시대로 영화에서처럼 그때까지는 등장하지 않았던 새로운 화합물이 계속해서 등장하며 사람들에게 온갖 부작용을 선사합니다. 이런 위험들은 럼즈펠드가 말한 우리가 모른다는 사실도 모르는 그런 무지이죠. 80년대보다 2020년대 그 위험은 배가되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영원히 알 수 없을지 모르지만 한 가지 명백한 사실은 그와 비슷한 일은 언제든 재현될 수 있다는 사실이죠. 돈 드릴로의 책이 보여준 통찰력은 인터넷도 등장하기 이전에 미지의 공포가 확산되는 그런 상황을 예측했다는 점입니다.
3) 미국 현대인들은 그 누구보다도 죽음을 두려워한다
주인공은 히틀러를 죽음의 신으로 숭배하는 미국 최고의 히틀러학 전문가지만 그의 부인(그레타 거윅 분)은 누구보다 죽음을 두려워하며 죽음을 피하기 위해 약물 실험에 자원하여 약물 중독자가 되려고 합니다. 질투에 눈먼 드라이버는 죽는 사람에서 죽이는 사람으로 위상전이를 시도하죠. 어느 시대라고 산 자가 죽음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끼고 살지 않았던 시절이 없었겠지만 평균 수명이 대폭 늘어난 현대에 접어들어 현대인들의 죽음에 대한 공포는 더욱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죽음을 빼놓고 그 어떤 이야기도 할 수 없는 영화입니다.
여기서 드릴로가 단 제목 화이트 노이즈의 숨은 뜻이 펼쳐집니다. 하얀색은 영화의 색깔입니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가상의 하얀 약 다일로에서 따온 거죠. 소리에는 색깔이 없는데 일단 죽음의 소리에 색깔이 있다면 그 색은 당연히 드라이버가 강의할 때마다 입고 나타나는 검은색이겠죠. 그런데 영화의 제목은 블랙 노이즈가 아니라 화이트 노이즈입니다. 인간의 정신을 구해준다는 신경 약처럼 하얀색으로 포장되어 영화의 시작과 엔딩 장면에서 등장하는 슈퍼 마켓에서 필리는 현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배우들의 호들갑과 과장된 모습 이 모든 게 소음이라는 뜻이죠. 죽음의 냄새를 짙게 풍기지만 겉으로는 아닌 척하며 하얀색으로 위장을 하고 있으니 현대인들은 그 속내를 결코 모른 채 살아간다는 풍자로서 저는 이해했습니다. 화이트 노이즈는 죽음과 시시각각 대면하고 있고 사방팔방이 죽음인 현대인들이 처한 상황을 은유한 거로 볼 수 있죠 한 마디로 바움벡 감독은 드릴로에게 백 프로 빙의되어 묻습니다. “현대야, 넌 누구냐?” 그 질문에 현대는 이렇게 답합니다. “난 죽음이다.”
여하튼 특별한 줄거리 없이 극적 재미를 도무지 찾기 어려운 영화인 것은 맞지만 저는 돈 드릴로의 작품이 드디어 영상화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흥미롭게 본 작품입니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추천하기에는 평이 너무 안 좋아 망설여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