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하르트 조르게 다음으로 인류 역사에서 혁혁한 공(좌파 입장이고 우파에게는 끔찍한 악몽이겠죠,)을 세운 인물은 누구일까요? 놀랍게도 조르게처럼 독일인으로 민족을 버리고 이념의 조국인 소련을 위해 일한 스파이 클라우스 폭스입니다. 아버지가 열렬한 공산주의자 목사로서 히틀러의 박해로 자살한 누나를 포함해 형 여동생까지 가족 모두가 공산주의에 심취했던 그야말로 빨갱이 집안입니다. 그는 33년 히틀러가 집권한 뒤 독일을 떠나, 영국을 거쳐 캐나다에 정착합니다. 그리고 물리학 전공자로서 맨해튼 프로젝트에 크게 관여한 한스 베테의 추천으로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죠.
그는 당시 돈으로 24억 달러(지금은 50배 정도 되지 않을까요?)를 들인 원자폭탄의 설계도, 정확히는 플루토늄으로 제작된 펫 맨의 설계도를 통째로 소련에 넘긴 인물입니다. 그래서 트루먼 대통령이 결코 자기가 살아 있는 동안 볼 일이 없을 거라는 소련의 핵보유국화를 불과 4년 만에 이뤄낸 결정적인 주인공으로 지금도 스파이 열전에서 회자되는 인물입니다. 대통령까지 나사서 철저하게 보안을 강조했던 상황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일단 폭스는 올리비아 뉴튼 존의 외할아버지며 유대인으로서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막스 보른 교수와 함께 일한 적이 있는 특급 양자물리학자였습니다. 브리스톨 대학 물리학과 출신으로 그는 역시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네빌 모트로부터 사사했습니다. 로스 알라모스에 갈 자격은 충분했던 거죠. 그런데 그는 전쟁이 일어나자 영국에서는 적성국 국민으로 분류돼 캐나다에 있는 독일인 수용소에 갇힙니다. 그럴 만도 하겠죠. 영국에서는 그를 공산주의자가 아닌 아리안 족으로 본 것이니까요. 물론 영국인도 같은 아리안족이기는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을 독일의 게르만족과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훈족의 피가 섞인 독일과 달리 순수한 게르만족의 특성을 자신들이 지니고 있다며 독일인도 무시했습니다. 실제 영국이 히틀러의 독일을 더 훈이라고 암호명으로 불렀다는 사실은 유명하죠. 그래서 그는 캐나다에 있으면서 영국에 대해서도 반감을 갖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반나치 증명 자료를 제출한 뒤 다시 영국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그는 영국이 자체적으로 핵무기 개발에 들어갔으며 이를 미국과는 공유하지만 같은 동맹국인 소련과는 공유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분개했죠. 그리고 영국 내 독일 공산주의자들과 만남을 시작합니다. 그중에는 조르게의 수제자로 최고의 여성 스파이로 기록되는 루스 루친스키도 있었죠. 그는 영국의 핵무기 개발 자료들을 마이크로필름으로 찍고 자신의 소견을 담아 루친스키에게 전달합니다. 43년 11월부터는 영국 대표로 마침내 미국으로 건너갑니다. 맨해튼 계획에 본격적으로 참여하죠. 물론 그는 미국의 핵무기 개발에 상당히 기여했습니다. 그러나 공보다 과가 더 많죠. 설계도와 함께 폭발 유도 방식의 핵심인 내적 설계법도 빼돌려 소련 측에 넘겼죠. 그리고 핵실험 결과도 소련 측에 누설합니다. 이를 대가로 받은 돈이 당시 돈으로 500달러였다는 걸 보니 폭스는 돈이 아니라 신념 때문에 이 짓을 했다고 봐야죠. 그가 관여하지 않았던 우라늄 235의 관련 자료는 그가 미국에서 활동으로 신뢰를 얻은 뒤 46년 영국으로 건너갈 때 소련으로 넘어갑니다. 그는 영국의 핵개발 정보를 통째로 소련에 넘겼습니다. 당시 미국은 한 달에 100 킬로그램의 우라늄과 20 킬로그램의 플루토늄을 생산하고 있었습니다. 이 정도면 핵을 보유하지 않던 소련을 초토화시킬 수 있는 규모였습니다. 스탈린은 미국 정보기관 모르게 은밀하게 핵 개발을 추진하고 있었고 49년 드디어 핵실험에 성공합니다. 그래서 그는 김일성이 일찌감치 요구했던 남한 정복을 자신들이 핵무기를 개발한 이후(즉 미국이 절대 핵으로 소련을 공격하지 못하리라는 학신을 가진 후)에 허락합니다. 미국과 영국은 49년 소련이 핵 실험에 성공할 무렵 소련의 암호문을 해독하면서 뒤늦게 간첩이 양국의 가장 중요한 군사기술을 통째로 적국에 넘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그는 영국에서 재판을 받고 14년(제 생각에는 사실상 총살 감인데 너무 적은 형량입니다. 당시 그가 이렇게 터무니없이 적은 형량을 받은 이유 중에는 원자폭탄과 관련된 이슈가 공론화되는 걸 꺼려했던 영국 노동당 정부의 입장도 반영됐을 겁니다.) 형을 선도받은 뒤 셀제로는 10년을 살고 동독으로 추방됩니다. 동독에서 그는 칼 마르크스 훈장을 받고 국민 영웅이 되죠. 그리고 그는 흐루쇼프 집권 후 중국과 소련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소련이 중국의 핵무기 개발에서 손을 떼자 앞장서서 중국의 핵무기 개발을 돕습니다. 우리에게는 안 좋은 기억일 수밖에 없는 게 클라우스 폭스인데 이런 생각이 드네요. 88년 동독이 무너지기 직전에 죽어서 자신의 꿈이 무너지는 걸 보지 몫하고 죽었다는 게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그가 소련에게 핵 기밀을 통째로 넘기지 않았다면 소련은 최소 10년 이상은 핵무기 개발에 더 시간이 걸렸을 것이고 이는 스탈린 생전에 핵보유국은 불가능했을 거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김일성은 남침의 타이밍을 결코 스탈린 생전에 잡을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럼 우리 민족의 최대 비극 중에 하나를 노래한 “아아 잊으리. 어찌 우리 그날을”이란 노랫말도 사라졌겠죠. 우리의 비극은 45년 8월 15일로 끝날 수도 있었을 텐데 이를 독일인 간첩이 막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