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우리에게 영원한 영웅인 맥아더, 미국에서도 영웅일까?

by 신진상
맥아더.jpg

우리에게 맥아더는 영웅 중의 영웅이죠. 우리를 두 번이나 구했으니까요. 한 번은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또 한 번은 북한의 김일성으로부터. 그러나 미국인들에게는 어떨까요? 일단 그는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을 정복한 정복자로 평가받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미군의 해군이 일본의 해군을 월등하게 박살 낸 덕분이지 맥아더의 육군이 잘해서 태평양 전쟁에서 이긴 건 아닙니다. 사실 미국 육군의 주력 부대와 장군들은 대부분 육군이 훨씬 강한 독일과 싸우려 유럽에 파견돼 있었죠. 미드웨이 해전을 승리로 이끌며 일본의 11척 항공모함 중 4척을 파괴한 니미츠 제독이나 레이테 해전으로 일본 해군의 씨를 말린 홀시 제독이 진정한 승자일 겁니다. 그리고 호주로 탈출한 맥아더를 대신해 압도적인 다수의 일본군과 맞서 싸워 최대한 버틴 웨인라이트 장군이 없었다면 맥아더의 일본 정복 또한 없었을 겁니다. 그는 오히려 미국에서는 비판받는데요, 그 이유는 후배들의 공을 가로챘다는 평가가 많고 정치적 성향 때문에 민주당 대통령들과 사이가 아주 안 좋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국 전쟁에서 그의 활약에 대한 평가 역시 미국에서는 부정적입니다.

그는 미국 역사 상 가장 민주당이 진보적일 때, 무려 20년 동안 집권했던 유일한 독주 시기(사실 루스벨트가 당선되기 전까지 근 50년 동안 민주당에서 대통령이 나온 사레는 그로버 클리블랜드와 우드로 윌슨 정도였을 겁니다.)에 철저한 반공을 외치던 극우에 가까운 공화당원이었습니다. 실제 공화당 대선 예비 후보로 두 번이나 나갔다가 둘 다 예선에서 떨어진 적이 있습니다. 그의 육사 후배이며 한 때 그의 비서로 필리핀에서 함께 일한 바 있는 아이크(아이젠하워)가 공화당 대통령이 된 것과 아주 차이가 크죠. 재미있는 사실은 노골적으로 정치 성향을 드러내며 군 통치권자를 씹던 맥아더와 달리 아이크는 민주당의 대통령들에게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신임을 받았다는 점입니다. 아이크가 대선 출마하기 전에 선배인 맥아더와 단 둘이 식사를 한 적이 있는데, 맥아더는 그에게 대선 출마할 거냐고 노골적으로 물었습니다. 아이크는 진심을 드러내지 않고 정치를 할 생각이 없다고 잘라 답했죠. 그랬더니 맥아더는 아이크에게 자네는 정치를 할 준비가 다 되어 있군이라고 말한 일화가 있습니다.

맥아더가 공산주의에 얼마나 치를 떨었는가 하면 그를 아끼고 그를 육군 참모총장에 앉힌 하버트 후버 대통령(공화당이 12년 연속 집권할 때 마지막 대통령으로 대공황이 그의 임기 내에 일어나 역대 최악의 대통령으로 평가받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와 히틀러와 일본 군부가 민주당의 20년을 만든 장본인이죠.)이 그에게 대공황 때문에 연금이 끊긴 퇴역군인들의 시위를 진압하라고 하자 탱크까지 동원해 무력 진압했던 인물이 바로 맥아더입니다. 시위자들을 향해 대놓고 빨갱이들이라고 불렀던 게 맥아더죠. 그에 반해 아이크는 연합군인 영국은 물론 동맹국이었던 소련 군의 총사령관 주코프와도 사이가 좋았습니다. 주코프와 소련군이 흘린 피가 없었으면 미국과 영국은 절대 독일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진심으로 고마워했죠. 물론 대통령이 되면서 핵 무장한 소련과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 상호 확증 파괴를 통해 공멸하겠다고 선언한 아이크였지만 공동의 적 히틀러와 맞설 때는 공산당과 손 잡을 줄도 알았습니다.

맥아더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든든한 뒷배였는데요, 일본에 있으면서 중국 내전에 개입하지 않는 트루먼에 많은 불만을 표시했습니다. 트루먼은 맥아더의 말을 안 듣고 태평양 전쟁 때 중국에서 중국군을 도우며 일본 공습을 주도했던 스팀웰 장군의 말을 믿었습니다. “부패한 국민당이 민심을 잃어 절대 내전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개입하지 않는 게 국익을 위해 좋습니다.”

그러다 625 전쟁이 일어났죠. 그는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공격해 오기 전에 먼저 트루먼에게 중국 해안과 내륙의 산업 시설을 공습과 해군을 통해 포격해서 선제공격을 하자고 주장해 트루먼을 놀라게 했습니다. 나중에 중공군이 개입한 뒤에는 대만 국민당 군대를 한반도에 끌고 와 중공군과 전투를 벌여 중국 본토 수복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잘 아시는 대로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밀리기 시작하자 맥아더는 만주에 핵 사용을 요청했고 트루먼은 49년 소련이 자체 핵실험에 설공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며 3차 세계 대전의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거부했죠. 결국 그는 트루먼에 의해 해임당합니다. 당시 애치슨 국무 장관에 따르면 맥아더는 협상 능력이 없었으며 그는 항상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식으로 강경하게 나왔다고 술회했습니다. 실제 장진호 전투를 비롯해 한국 전쟁에서 우리를 구한 진정한 영웅은 압도적인 수적 열세에도 영웅적으로 싸운 스미스 장군과 교통사고로 죽은 워커 장군을 대신해 한국 전쟁 지상군 총사령관을 맡은 리지웨이 장군 덕분입니다. 한국 전쟁이 발발할 때 맥아더는 일흔이었고 당시 합창의장인 브래들리(패튼과 함께 유럽 전선 최고의 명승부 발지 대전투의 영웅이죠.)장군보다도 나이가 많았던 그는 합창의장은 물론 심지어 대통령까지 애송이 어린아이 취급을 했습니다. 맥아더는 어찌 보면 꿈이 너무 컸죠. 리지웨이는 공산주의로부터 남한을 지키는 것이 전쟁의 목표였다면 맥아더는 중공 정벌이 목표였던 것이고 이는 중공보다 훨씬 센 소련과 본격적인 3차 세계대전으로 붙자는 뜻이었죠. 미국에서 맥아더 하면 독불장군 호전광 하극상 이런 부정적인 단어들이 먼저 떠오르게 되는 게 미국군입니다. 오죽하면 린든 존슨이 베트남 전쟁에서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에게 총사령관 임명장을 수여하며 맥아더처럼만 행동하지 말라고 했을 정도로 맥아더는 대통령들(특히 민주당)에게는 최악의 비호감입니다, 맥아더는 미국 군대 역사에서는 악의적인 본보기가 되어 버렸죠. 그러나 어찌 됐든 우리에게는 고마운 존재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겠죠.

keyword
작가의 이전글주식 투자자들이 채권과 금리에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