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에 꺼낸 서른셋의 일기. 고맙다. 잘 살아줘서.
2001년 12월 3일.
첫출근을 시작했다. 스물여섯에 신입사원이란 새로운 시작.
2008년 가을.
금융 위기가 찾아 왔다. 리먼 브라더스 사태의 여파는 컸다. 차입금 규모가 컸던 회사는 자회사와 자산을 매각하며 버티기에 돌입했다. 동시에 '불요불급'이란 명목하에 구조조정도 시작되었다. 나를 포함한 4명이 팀원이 있었던 인재개발팀은 불요불급의 1순위였나 보다.
2009년 1월 30일.
서른세살의 나는 마지막 출근을 하고 있었다.
'이제 뭐하지?'
2025년 3월.
쉰살의 나이를 살고 있다. 시간 참 빠르구나. 내가 벌써 쉰이라니.
나름 잘 살아온 것 같다. 예쁘고 착한 아내와 아들 딸 두 아이와 함께 행복하다. 대기업도 다녀봤다. 이름만 대면 다 아는 그 회사에서 리더의 역할도 해봤고, 억대 연봉도 찍어 봤다. 돈도 벌고 집도 사고, 이 정도만 했어도 나름 잘 살아온 것 같다.
쉰 살이 된 지금, 두번째 커리어를 시작하고 있다. 23년의 회사 생활을 뒤로 하고, 이제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있다. 커리어, 도전, 참 멋진 말이다. 하지만, 난 내가 가졌던 많은 것을 내려 놓아야 했다. 대기업이란 백그라운드도 사라졌다. 매달 꼬박꼬박 들어오는 돈도 사라졌다. 하루 100통 가까운 문자, SNS, 전화도 사라졌다. 나를 찾던 사람들도 이제는 없다. 직장을 떠나며 나는 내가 익숙했던 모든 것들과 이별해야 했다.
두번째 커리어는 외로운 ‘홀로서기’에 가까웠다.
'이제 뭐하지?'
또다른 새로운 삶을 찾아야 하는 두번째 시간이 찾아왔다.
17년 전, 2009년 봄에도 나는 내가 가지고 있었던 것들을 잃고 있었다.
2001년 입사한 나의 첫 회사는 7년 사이에 3000억에서 5조의 규모로 성장해 있었다. 대단했다.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가 아니라, 고래를 잡아먹는 새우라고 할 정도로 과감한 투자와 M&A로 폭발적인 성장을 했다. 2008년 가을에 리먼 브라더스 사태가 일어났다. 금융위기였다. 1997년 IMF 이후 최대의 위기였다. 회사는 흔들리기 시작했다.투자와 M&A를 통해 높아진 부채와 높아진 금리는 5조의 거대 기업을 뒤흔들고 있었다.
‘불요불급’
회사는 구조조정을 선택했다. 부채율을 낮추기 위해 자산과 계열사를 매각하며 시작했다. 그리고, 비용을 줄이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그룹 산하의 인재개발팀 소속이었다. 당시 4명의 대리가 함께 일하고 있었다. 그룹의 CFO는 우리에게 말했다.
‘인재개발팀은 불요불급합니다. 퇴직을 권고합니다.’
버틸 수는 있었다. 아니, 버틸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원하는 직무가 아닌 다른 곳으로 발령을 낼 것이라고 했다. 젊은 혈기에 자존심이 앞섰다. 어디든 일할 곳 없겠냐는 생각으로 목숨 구걸하듯 살고 싶지 않았다. 호기였을까, 객기였을까. 그렇게 나는 처음으로 직장을 떠나고 있었다.
하지만, 자존심은 변명이었다. 난 도망치고 싶었다. 이 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나를 모르는 곳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2008년은 너무 힘들었다. 모든 것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사랑도, 사람도, 돈도, 심지어는 직장도 어느 것 하나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삶이 두려울 정도로 힘들었다. 직장을 그만두는 것은 두려움을 벗어나기 위한 도피처이기도 했다. 내가 존재하던 공간을 떠나 다른 곳에서 나는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그곳을 떠났다.
2009년 3월 6일.
나는 홍콩행 비행기에 올랐다. 호주로 가기 위한 경유하는 비행기였다.
잠시 내가 머무르는 공간을 벗어나고 싶었다. 나를 모르는 시간과 공간 속으로 도망치고 싶었고, 마음 편하게 머무르고 싶었다. 그리고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던 삶에서 행복을 살리고 싶었다. 웃으며 행복하게 사는 내 모습을 찾고 싶었다. 도피와 구원을 위해 나는 한국을 떠나고 있었다.
서른세살의 젊은 청년은 힘들다고 말할 수 밖에 없었던 그 시절을 견디고자 호주로 떠났다. 그리고 왜 살아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하려 했다.
그 청년은 36일을 호주에서 머물며, 일기를 썼다. 다시 살고 싶어서 다시 불행하고 싶지 않아서 떠난 여행에서 매일을 기록하고 싶었다.
2025년 3월.
쉰이 되어버린 그 청년은 다시 그 일기를 꺼내어본다. 두번째로 찾아온 인생의 홀로서기에 서른세살 청년의 지혜를 빌어보고 싶다. 다시 살고 싶다. 나와 내 가족, 내 일과 함께 아름답고 가치있는 나로 살아보려 한다.
"쉰에 꺼내는 서른셋의 일기"
그 이야기를 처음으로 세상에 꺼내고 있다.
사실 17년을 숨겨온 이야기이다. 부끄러웠다. 부끄러운 살을 꺼내보이는 듯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난 그 어려웠던 순간도 잘 이겨내고 여기에 와 있다. 그리고, 지금의 어려움도 난 잘 이겨낼 것이라 믿는다.
그 용기를 얻고자 그 서른셋의 이야기를 꺼내어 본다.
나를 위해서.
그리고, 어쩌면 당신을 위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