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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작가다.

15 경희, 순애 그리고 탄실이

by 무아노

오랜 친구들을 만나면 추억 여행을 하게 된다. 나와 관련된 단골 소재 중에 하나는 그 당시 친구들을 모델로 해서 쓴 소설이다. 나와 친구 하나가 같이 스토리를 짰고 글 작가는 나였다. 따지고 보면 첫 완결작이었다. (기회가 되면 브런치에서 연재하려고 한다.)


그리고 다른 소재는 볼 때마다 새로운 국어 문제집을 풀고 있는 '무아노'였다. 다른 과목은 기억 안 나는데 유독 국어만 자주 사서 풀었던 기억이 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하나 추측해 보자면 문제로 실리는 소설을 재미게 읽어 내려간 기억이 있으니, 그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근현대 소설들을 보려면 도서실에서 빌리면 되는데, 더 많은 작품이 있는데 왜 문제집을 사서 읽었을까. 지금의 나는 어린 무아노를 이해할 수 없다.


이번 기회로 오랜만에 근현대문학을 읽으려고 하니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때 읽었던 문제집에 나온 현진건, 김동인, 나도향 등 전부 남자작가였는데 왜 여자 작가는 없었지? 그렇게 해서 <경희, 순애 그리고 탄실이>를 읽게 됐다.


이 책은 여성작가인 나혜석, 김일엽, 김명순의 작품을 엮었다. 작품마다 그 당시 여성들의 삶을 조금이나마 들여다볼 수 있다.

나혜석의 원한을 예로 들자면, 주인공 이 소저는 10대에 시집을 갔는데 남편은 주색잡기에 빠져 있다가 결국 술 때문에 죽는다. 시댁은 제 아들이 잘해준 것도 없고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됐으니 잘해주지만 그뿐이다.

문제는 이 소저를 아버지뻘인 '박참판'이 강간하는데(이 부분은 두루뭉술하게 표현된다.) 시댁은 이 소저의 입장은 들어보지 않고 망신이라 생각한다. 친정, 시댁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상황에서 이 소저는 결국 박참판의 첩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박참판은 또 첩을 들였고 거의 종노릇을 하게 된 이 소저는 가출하여 험난한 삶을 살게 된다.


조혼, 과부에 대한 인식과 재가 금지, 축첩을 엿볼 수 있는 답답한 이야기에서 이 소저가 가출하여 험난하지만 삶을 이어나가는 결말이 그나마 마음에 들었다. 김동인의 <배따라기>에서 불륜을 의심받은 아내, 최서해의 <누이동생을 따라>에서 매춘부 누이동생이 자살하는 것보다 훨씬 나으니까 말이다.

또 이 소저가 자신을 안아 줄 넓은 품을 그리워하는 솔직함은 이 시기에 표현됐다는 점에서 박수받아 마땅하다.


국어 선생님은 아니지만 잠시 빙의하자면 출제하고 싶은 문항이 머릿속에 절로 떠올랐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 작가들을 모르고 있었을까?


엮은이의 말에 따르면 세 명의 여성작가들은 한국문학사에서 배제되고 삭제되었으며 작품에 대한 논의가 철저히 부정되었다고 한다. 창작의 주체가 아니라 스캔들의 주인공으로 회자됐기 때문에. 분명 뛰어난데도 '작가'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다.

작품들은 그 당시 사람들의 생각과 생활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좋은 역사적 자료다. 훌륭했던 '작가'들의 다양한 작품을 교과서에서 만나기에 이제 전혀 문제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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