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하얀 노을 하얀 밤

쌍룡섬의 비밀

by 강쌍용



다시 발길을 옮깁니다. 마을 앞 저수지를 지나는 소로의 양쪽으로 드넓게 펼쳐진 들판이 한때 바닷물이 들고 나던 개펄이었다니 놀랍습니다. 고흥 어디를 가나 개펄과의 질긴 인연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 같습니다. 그만큼 먹고사는 문제가 절실했을 것입니다. 어디든 쌀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간척을 위한 삽을 들고 부족한 농토의 현실을 타개해려 했던 당시의 뚝심이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바다를 접하고 걸었던 해변 길을 이제는 논물을 접하고 걷는 격세지감을 느끼며 찾은 곳이 남성 해수욕장입니다. 점토질이 섞인 잔모래가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펼쳐진 작은 백사장은 마치 업보를 초월한 와불이 길게 드러누운 듯 고즈넉합니다. 밀물이 들어오는지 거품을 머금은 잔물결이 발밑에서 잠깐 머물다 이내 미끄러져 내려갑니다.

근처 들판의 농업용수를 모아 쓸어내리는 집적로 끝 지점이라 백사장을 할퀸 자국이 눈에 거슬립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분위기를 해칠 그런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긴 막대기로 하얀 백사장에 일행들을 환영한다는 글자를 그렸습니다. 나이를 잊은 유치 발랄함이 오랜 시간 고요에 잠겨있던 해변의 적막을 깨웁니다.

덩달아 수려한 해송도 깨어난 듯 그 푸름을 마음껏 발산하는 늦은 오후의 바닷가는 너무 평화롭습니다.

가까이 백사장과 마주하는 두 섬이 대룡도와 소룡도라 하니 결국 두 개의 섬은 쌍룡도가 되는 셈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쌍룡 섬이 바다에 떠 있는 것입니다. 우연의 일치라 하기엔 너무나 기가 막힌 섬의 지명입니다. 어떤 연유로 두 개의 섬이 용섬이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아마도 몇 천 년 전 왕이 될 용장군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조용한 이곳으로 피해 때를 기다리고 있는 섬인지도 모릅니다. 오늘 이곳에 쌍룡이 베로까지 데리고 왔다 갔으니 이제 뜻을 이룰 날도 멀지 않은 것 같습니다. 백사장을 나서니 어둑한 하늘에서 다시 비를 뿌리기 시작합니다.

어느새 어둠이 내립니다. 고흥 시골집 같은 민박집을 구하려 했으나 몇 군데를 둘러도 찾는 집은 좀처럼 나오지 않습니다. 코로나로 관광객이 끊긴 탓이라 아예 문을 닫은 곳이 많습니다. 민박집을 찾아가다 보니 내나로도를 지나 외나로도 끄트머리에 자리한 우주발사 체험관까지 당도했습니다. 늦은 시간이고 코로나로 인해 관람은 당분간 중지한 상태라서 전시실을 둘러볼 기회는 없었습니다.

다시 넘어오는 산길은 아기자기한 조각물들이 섬의 빼어난 경치와 어울려 불시에 방문한 나그네의 눈을 즐겁게 합니다.

결국 내나로도 초입 언덕에 하얀 성처럼 서 있는 “하얀 노을”에서 여장을 풀기로 했습니다. 다도해 해상국립공원답게 점점이 뿌린 섬들이 나로도의 내외 만에 걸쳐 한 폭의 거대한 그림을 펼쳐 놓은 것 같습니다. 궂은 날씨만 아니었다면 지금쯤 분홍 파스텔의 향연이 정점을 향해가는 아름다운 노을의 풍경을 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문득 왜 하얀 노을이라고 이름을 지었는지 주인장이 발휘한 의외의 상상력이 궁금해집니다.

갑자기 비가 억수같이 쏟아집니다. 한산한 내나로도 수협 위판장에 고인 물웅덩이를 향해 차를 갑자기 돌진시킵니다. 일행들의 비명이 쏟아집니다. 순간 바퀴와 충돌한 거대한 포말이 차량 하부를 때리며 요란한 소리와 함께 튕겨져 나갑니다. 롤러코스트를 탄 짜릿한 전율을 순간적으로 느낀 일행들의 환호가 이어서 터져 나옵니다. 이름하여 “놀이 세차”입니다. 하부의 염분은 씻어냈으니 상부는 내리는 비만 맞히면 그만입니다. 세차비를 벌었으니 이젠 저녁 끼니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쏟아지는 비를 뚫고 찾아든 식당은 어디나 마찬가지로 한산했습니다. 따끈한 매운탕으로 허기를 채우는 낯선 항구에는 가로등이 하나 둘 불을 밝힙니다. 가까이 보이는 섬마을의 호롱불 같은 불빛이 세찬 비에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하며 물안개에 잠겨갑니다. 이른 저녁을 드신 늙은 홀아비가 졸다 잠든 문틈사이로 혼자 떠드는 16인치 구식 텔레비전이 쏟아내는 불빛일 것입니다. 안부를 걱정하는 자녀들의 애꿎은 전화도 함께 울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제철 병어와 갯장어가 입맛을 돋우는 소주잔으로 긴 하루의 여정을 마무리하는 어둠이 점점 깊어갑니다. 티파니의 약속을 기다리는 누군가의 밤도 더 깊게 더디게 흘러갑니다. 아마도 잠 못 이루는 하얀 노을의 하얀 밤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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