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티파니에서 첫사랑을 만나다

by 강쌍용



으레 자유 여행이 그렇듯이 그 장점은 뭐니 뭐니 해도 시간에 쫓기지 않는 느긋함입니다. 아침 수다가 주는 여유는 홀가분하게 일정을 시작하게 해 줍니다. 간단한 브런치에 커피를 곁들인 담소는 그 자체로도 여행의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서두를 이유가 없습니다. 목적지에 얽매일 필요도 없습니다. 몸 가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구속 없이 노니는 자유스러움이야말로 여행이 주는 진정한 묘미일 것입니다.

비게인 산뜻한 바다공기가 폐부를 온통 뒤집어놓는 것 같은 청량감이 온몸을 가볍게 합니다. 혼자서 어슬렁거리는 아침 산책길은 어젯밤에 거닐던 길과는 사뭇 분위기가 다릅니다. 어둠에 가려져 불빛만 반짝이던 섬들의 실루엣이 모습을 드러내니 다도해의 진면목을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아침 일찍 서둘러 떠나는 우리를 보고 하얀 노을의 주인 마담이 약간 의아한 듯 눈웃음을 치며 배웅을 합니다. 한껏 멋을 낸 리오가 하루 새 말수가 확 줄며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꼭 첫선을 기다리는 처녀 같기도 합니다.

나로 1 대교를 건너자 어느새 익숙해진 마복산이 눈앞에 버티고 서서 내려다봅니다. 국도 15호선을 타고 페달을 밟자 왼편으로 솟은 산이 오봉산임을 알리는 농장의 팻말이 방향을 가리킵니다.

고흥반도를 벌교나 순천을 거쳐 내륙과 이어주는 중요한 간선도로지만 왕복 2차선에 불과한 좁은 도로라 운전이 꽤나 조심스럽습니다.

마치 똬리를 튼 것 같은, 얽히고설킨 낮은 능선들이 이합집산을 거듭하다 그중 한 줄기가 간척지로 곧장 뻗어 내렸습니다. 잠시 쉬어가듯 국도변에 이르러 나지막하게 둔덕을 이룬 곳에서 좌회전으로 차를 진입시킵니다. 보도블록으로 단장된 진입로에는 갖가지 꽃과 나무들이 바위와 조화를 이루며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아담하게 지어진 이층 양옥건물 여기가 바로 오늘의 약속 장소인 “티파니”입니다.

어젯밤을 하얗게 지새운 리오가 힘겨운 고민을 하다 망설임 끝에 수락한 곳이기도 합니다. 물론 일행들의 격려와 위로가 떨리는 만남을 결정하기까지 많은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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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오래된 책갈피에서 튀어나온 낡은 엽서를 볼 때가 있습니다. 간직해온 세월만큼 빛이 바랜 글자를 읽다 보면 어느새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에 빠집니다. 어제 같은 오래 전의 과거를 잠깐이나마 반추해 보는 것은 새롭습니다. 강물처럼 흘러간 시절을 훑어보는 것은 지난 생을 오늘 다시 마주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묻혔던 이력을 다시 들춰내는 기쁨은 실로 느껴본 사람들만이 알 수 있습니다.

오취리 섬 소년을 찾아 나섰던 날 이를 까맣게 모르고 있던 그는 집을 비운 탓에 만날 수 없었습니다. 짝사랑이었으니 밀고 당기는 복잡한 셈은 애초부터 염두에 둘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후에도 속마음을 전하지 못했으니 오늘은 때늦은 고백을 할지도 모릅니다.

“그때 내가 너를 좋아하는 줄 알았니?”

겸연쩍게 건네는 참 오래 전의 물음에 돌아올 대답이 궁금합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심중에 담아두고 있었던 말입니까?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밀랍 되어 있던 언어들이 조금씩 삐져나오는 기억의 틈새로 서로의 인생살이도 같이 나눌 것입니다.

리오를 혼자 내려두고 돌아서는 일행들의 가슴이 더 두근거립니다.

흔히 첫사랑은 깨지기 쉬운 거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인생에서 가장 풋풋하고 순수했던 조각들을 다시 판금질 해본다면, 그 궁상스러움은 자칫 방임해서 잊힐 뻔했던 한 시절을 오롯이 찾게 해 줄지도 모릅니다.

콩깍지가 끼면 눈에 솟은 다래끼조차도 진주처럼 아름답게 보인다고 합니다. 어느덧 초로의 혜안으로 다시 관조하는 첫사랑입니다. 콩깍지가 끼인 것이었다 하더라도 여실한 로맨스를 지금까지 가슴에 품고 살았던 애틋함이 대견스럽습니다.

자리를 피해 준 일행들이 멀리서 바라보는 티파니가 아름답습니다. 첫사랑의 설레는 해후가 이루어지는 티파니의 눈부신 아침은 더욱더 아름답습니다. 끝 간 데 없이 펼쳐진 초록의 벌판이 잔바람에 일렁이고 있습니다. 아름다움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고흥입니다. 이래서 정녕 고흥반도와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게 되나 봅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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