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고향의 온정

밤바다 어장

by 강쌍용



이젠 정겨운 시골 마을을 고향으로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더는 볼 수 없을지 모릅니다. 젊은이들이 없는 시골 마을에 아기 울음소리 그친 지 오래입니다. 적어도 태어나서 유년을 보내야 고향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작금의 암울한 상황은 차라리 절망입니다.

고향이 어떤 곳입니까? 누구나 세상사 힘들 때면 모든 걱정 잠시 내려놓고 찾아가는 안식처 같은 곳입니다. 마룻바닥 퍼지고 앉아 어머니 차린 양은 밥상에 호박 쌈 한입 삼킬 때면 세상 근심도 함께 삼킬 수 있었습니다. 생선 가시 발라주며 한술 떠 뜨라 이르시는 어머니 포근한 정이 있습니다.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는 따뜻함입니다. 그래서 산다는 일이 아무리 어려워도 꿋꿋하게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걸친 듯 입은 듯 아무르면 어떻습니까? 슬리퍼를 질질 끌면 어떻고, 셔츠 하나 대충 껴입은들 그게 무슨 대수입니까? 언제 가더라도 아무 때나 드나들 수 있는 친구 집이 있습니다. 열려있는 문을 굳이 두드리거나 애써 부를 필요도 없습니다. 내세울 것 없지만 착하고 부지런하게 살아가는 친구입니다.

애 터지게 고향을 지키는 친구가 참 고맙습니다. 변함없이 맞이해 주는 환대 속에 오래된 정이 고스란히 묻어납니다. 그냥 손 내밀면 덥석 잡아주는 투박한 손이 좋습니다. 굳은살 박인 그 단단함은 오래전 아버지의 억척스러운 손에서 전해오던 장작불 열기와도 같습니다.

구김살 없는 너털웃음까지 닮았습니다. 세월이 아무리 변해도 바뀌지 않는 속 깊은 친구의 우정을 확인이라고 하듯 말입니다.

애써 나누지 않아도 됩니다. 이심전심 통하는 편안함입니다. 눈길 가는 대로 마당 한켠 꼬들꼬들 말라가는 서대 몇 마리 집습니다. 들쑤신 아궁이에 허연 재가 좀 날면 어떻습니까? 맞바람에 호롱불 꺼지듯 순식간에 구워낸 안줏거리는 어떤 성찬에 견주어도 모자람이 없습니다.

마루에 걸터앉으면 어둠에 묻힌 대밭에서 서걱거리는 댓바람 소리가 들려옵니다. 흙담 쪽으로 기운 장독간의 짙은 음영이 기억의 그림자처럼 다가옵니다. 때맞춰 솔가지에 걸린 수줍은 하현달이 춘새 끝에서 눈을 맞추어 줍니다.

어느새 술잔이 돌아가고 밑도 끝도 없이 꺼낸 푸념들도 함께 돌아갑니다. 흘러넘치도록 따라주는 술잔은 너무 깊고 넓어서 세상 어떤 호사가도 누릴 수 없는 술맛입니다. 오래 묵은 된장 맛 같기도 하고 그 옛날 할머니 바지춤에서 꺼내 주던 눈깔사탕 맛이기도 합니다.

달아오른 술기운에 밤이슬도 녹아듭니다. 빈 병처럼 널브러진 허언들이 흙담을 기고 올라 달빛에 부서질 때쯤 따뜻하게 등을 두드리며 친구가 배웅합니다. 긴말이 필요 없습니다. 요란한 시늉은 겉치레일 뿐입니다. 한번 꼭 안아주면 그만입니다.

취해 올려다본 밤하늘에는 별빛이 심중을 헤아리듯 쏟아져 내리고 있습니다. 익숙한 골목길을 휘이휘이 걸어 나서며 거나한 취기에 철 지난 유행가 한가락 고래고래 뽑아봅니다. 박자가 틀리고 가사가 틀리면 어떻습니까? 누구도 언짢다고 말리는 사람 없습니다. 초저녁 잠이 깬 어른들이 “윗집 용이가 또 왔구나!” 하고 목소리만으로 지레짐작합니다. 오히려 귀 기울이시며 자식 생각에 다시 잠을 청하면 그만입니다.

우물가 담벼락에 늘어 둔 깻단이 미끈한 전봇대와 키 재기를 하듯 비스듬히 서 있습니다. 엎어진 깻단을 일으켜 세웁줍니다. 짜르르 여느 전설처럼 쏟아지는 깨알이 잊힌 이야기를 들려주듯 흘러내립니다. 지저귀는 소곤거림 같기도 하고 쑥덕거리는 뒷담화 같기도 합니다. 어쩌면 낯이 붉어질 오래 전의 부끄러운 비밀을 가만히 들려주고 싶은지 모릅니다.

섬의 적막입니다. 취기를 날려버리는 듯 코끝을 돌아나가는 비릿한 갯바람이 싱그럽습니다. 모든 것이 넘치도록 고요하고 평화롭습니다.

달빛 스미는 콩밭 두렁에 잠시 서서 심호흡해 봅니다. 돌담 사이로 들려오는 밤벌레 소리에 딱히 연유도 모를 울음이 터집니다. 울컥울컥 치밀어 오르는 세상사 한잔 술에 달래는 고향의 밤은 그렇게 깊어 갑니다.

이렇듯 고향에서 밤새 소주잔을 기울여 본 사람이라면 지금의 변화는 차라리 두려움이라 말해도 과장이 아닐 것입니다.

문득 밤바다 어장에서 불을 밝히고 있을 친구가 보고 싶어 집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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