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문자라는 길을 따라 백지 위를 오가는 연필의 소리가 듣기에 달다. 그 길에 새겨진 흔적이 보기에 곱다. 붓처럼 그리 연하지도, 만년필처럼 그닥 엄하지도 않은 중용의 경도. 블랙도 화이트도 아닌 사이의 음영. 그 표정 없는 소리와 색깔 없는 빛깔을 벗삼아 흰 종이 위를 걷다 보면 어느새 연필 머리가 엄지와 검지 사이의 한 곳을 찌르게 된다. 내 기준으로 연필이 몽당연필이 되는 시점이다. 몇 센티미터 정도가 되었을 때 몽당연필이 된다는 합의 따위는 아마 없을 테지만, 사전에선 이렇게 말한다: 많이 깎아 사용해서 길이가 아주 짧아진 연필. ‘아주’와 ‘짧다’는 수치로 나타낼 수 없는 주관적 지표이기에 몽당연필의 길이에 대한 정의는 각자의 쓰임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저마다의 경험과 추억에 따라서도 다르리라.
‘몽당’을 접두어로 삼는 단어는 적지 않다. 몽당연필을 위시해서, 몽당바지, 몽당치마, 몽당빗자루, 몽당숟가락, 몽당칼이 사전에 나와 있다. 모두 오래 사용해서 그 길이가 짧아진 것을 뜻한다. 뜻이 이러하니 사용할수록 짧아지는 물건에는 모두 몽당을 붙일 수 있겠다. 필기도구라면 연필만큼은 아니겠지만 짧아 닳아지는 게 또 있다. 만년필과 붓이 그러한데 만년필 닳는 것은 육안으로는 확인하기 쉽지 않을 터여서 몽당만년필이나 몽당펜 따위의 단어는 없을 터이나 붓은… 글쎄다. 완당 김정희 선생이 인생 칠십 년을 회고하듯 쓴 문장이 있다. 七十年 磨穿十硏 禿盡千毫. 칠십년 마천십연 독진천호. 나는 칠십 년 동안 열 개의 벼루를 갈아 구멍을 냈고, 천 자루의 붓을 모지라지게 했다. 그가 지금 세상의 사람이었다면 한글로 이렇게 썼을지도 모른다. “열 자루의 붓을 몽당붓으로 만들었다.”
사전에서도 실제로도 사용하지 않는 몽당불이라는 단어도 있다. 모닥불과 같은 뜻이라 한다. 모닥불은 잎나무나 검불 따위를 모아 놓고 피우는 불이란 뜻이다. 앞서 말한 몽당의 뜻을 붙인다면 몽당불/모닥불은 화력이 많이 소진된 작은 불을 뜻하는 것이겠으나, 모닥불의 사전뜻에 따르면 모닥 혹은 몽당은 작은 것들을 한데 모아서 피우는 불이란 뜻이 된다. 닳아져서 작은 것들이 아니라 그냥 원채 작은 것들을 그러모아서 붙이는 불. 전남 방언에 ‘모닥그리다’라는 말이 있는데 ‘그러모으다’와 뜻이 같다. 이참에 드는 생각은, 몽당불을 모닥불의 비표준어로 취급해 내버릴 게 아니라 모닥불은 지금의 모닥불 그대로 사용하고, 몽당불은 몽당의 의미를 살려 ‘연료가 많이 닳아서 작아진 모닥불’이라는 새로운 뜻을 달아주면 어떨까 싶다. 몽당불이 되어 춥고 어두우니 땔깜을 좀더 넣어볼까? 라는 식으로.
몽당연필을 일본어로는 치비타엔비츠ちびた鉛筆라고 한다. 형용사 치비타는 동사 치비루禿びる에서 왔다. ‘끝이 무지러지다’라는 뜻을 갖고 있어 우리말 몽당과 유격 없이 바꿔 쓸 수 있다. 근데 禿가 낯익다. 위에 언급한 완당 선생의 禿盡千毫에 이 글자가 쓰였다. 이러하니 몽당연필을 한자어로 하면 독연필禿鉛筆, 몽당붓은 독필禿筆이라 할 수 있겠다. 독필은 이미 사전에 등재되어 있다. 그런데 부가적인 의미 하나가 더 있다. ‘자신이 쓴 문장을 겸손하게 이르는 말’이다. 졸필拙筆과 같은 뜻이다. 어쩌면 추사 선생의 독禿은 실제로 붓을 그만큼 닳게 했다는 사실임과 동시에 붓 천 자루가 닳을 정도로 쓴 글씨를 통해 겸손에 이르렀다[독진禿盡]는 고백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깍지를 끼운 몽당연필을 쓰다 쓰다 더 이상 쓸 수 없을 때가 왔어도 함부로 버리거나 할 수 없는 건. 키도 크고 로고도 선명하게 새겨진 새 연필보다 더 큰 존재감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어쩌면 몽당연필이 넌지시 일러주는 낮은 마음의 아름다움, 그리고 사물에 대한 예의로부터가 아닐까. 우리 지구의 소중한 나무와 광물을 아무렇게나 쓰고 버릴 수 없다는, 그리고 함께한 시간 또한 그렇다는. 그러기에 쓸모를 다했다고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할 수 없다는 마음. 그래서 책상 한 구석에 모아둔 몽당연필은 무용의 미덕을 잔잔히 뽐내고 있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