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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단어들 12화

'막'은 없다

by 박정훈

마구의 준말인 막에는 크게 두 가지 뜻이 있다. 갓 곧바로 금방. 그리고 거칠게 함부로. 전자의 의미를 취한 음식으로는 막회와 막장이 있다. 갓 곧바로 금방은 시간의 상대성을 띠고 있기에 막을 접두사로 둔 단어 역시 상대역이 있다. 막회에 숙성회가 있다면 막장에는 된장이 있다. 막장은 막된장의 준말이다. 쌈장이라고도 한다. 마구 만든 된장이라 인스턴트 음식의 어감을 주지만 숙성시키는 데 서너달은 족히 걸린다. 눈 감았다 뜨면 세상이 뒤바껴 있는 요즘 같은 시대에 그 정도면 나름 적지 않은 시간이다. 그럼에도 된장의 숙성 기간인 삼 년여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래서 시간을 두고 익히는 된장 앞에 재래식이나 전통 같은 장로 우대의 수식어가 붙는가 보다. 우습게도 막장에는 아파트 된장이라는 다른 이름도 있다. 왜 이런 별칭이 생겼는지 짐작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다른 짐작을 해보자면 아파트 역시 속성이기 때문이 아닐까. 짓는 것도 허무는 것도 속성이니까. 그러고보니 숙성의 반대말은 미숙이 아니라 속성이로구나.


막이 가진 ‘거칠게 함부로’의 의미를 지닌 음식으로는 막걸리가 있다. 거친 상태의 원료를 넣는다거나 제조를 함부로 한다는 뜻은 절대로 아닐 것이다. 술독 위에 뜬 맑은 술보다 험한 맛이기 때문도 아닐 것이다. 탁주가 청주보다 더 부드럽게 술술 넘어간다고 하는 애주가들도 많으니까. 맑고 탁한 것도 시간과 마찬가지로 절대가 아닌 상대일 뿐이어서, 뽀얀 빛깔을 탁함이 아닌 맑음으로 받아들인다고 억지는 아니다.


막의 두 가지 의미를 모두 망라한 음식도 있다. 막국수는 메밀 껍질을 말끔히 벗겨내지 않고 빻아서 다른 국수 재료보다 거칠다. 때문에 막국수라 부른다. 또한 바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국수이기 때문에 막국수라 부른다. 둘 모두 막국수 명칭 유래의 설명이다. 번외로 막국수의 메밀면은 찰기가 부족해 잘 끊어지기에 숟가락으로 마구마구 퍼먹어야 해서 막국수라 부른다는 설도 있다. 그 어느 것이 되었든 내가 아는 막국수는 거칠게 함부로 만든 음식이 분명 아니다. 어느 다큐멘터리에서 본 막국수 만드는 과정을 보고 그걸 알게 되었다. 그 과정은 간단하기는커녕 수많은 손길과 땀방울을 필요로 했다. 거친 맛을 내기 위해 도리어 섬세해야 하는 그런 음식이었다.


이쯤 되니 자연스레 떠오르는 물건 하나가 있다. 막사발. 국어사전의 의미는 품질이 낮은 사발. 백과사전류에서는 좀더 길게 설명한다. “막사발은 고급스러운 청자나 백자와 달리 일반 서민들이 생활 속에서 쓰게끔 그야말로 막 만들어낸 그릇이다. 때로는 밥그릇으로, 막걸리 잔으로, 심지어는 개밥그릇으로까지 쓰였다.” 메밀 껍질을 거르지 않은 까닭에 식감이 거칠어 오히려 입맛이 당기는 막국수처럼, 흙의 질감을 그대로 살린 이유로 표면이 거칠어 차라리 손맛이 동하는 막사발은 절대 막 만들거나 마구 사용하는 그릇이 아니었다. 조선땅 아무데서나 마구 굴러다니던 그릇이 어느 왜인倭人의 미감에 발견되어 결국 자기네 섬나라의 국보급 유물로 격상되었다는 극적인 반전에 황공히 머리를 조아릴 의도가 아니라면, 달리 말해 역사적 가짜 뉴스에 선동되고 싶지 않다면 막사발을 제대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정당한 이름으로 불러주어야 한다. 그 꾸밈없는 경지에 이르기 위해 얼마나 많은 꾸밈의 형태를 미련 없이 깨트려 버렸을지 짐작해본다면, 무위의 아름다움에 다다르기 위해 결코 아름답다 할 수 없는 지난하고 고단한 작위의 시간을 밟아왔을지 헤아려본다면 거칠음과 부드러움, 성김과 섬세함의 분별을 아득히 넘어서 있는 무심의 그릇에 함부로 ‘막’이라는 접두사를 붙일 수는 없으리라. (그렇다면 뭐라 불러야 할까. 도예가 신한균 선생은 ‘멧사발’이나 ‘멧그릇’이라는 명칭이 옳다고 한다. ‘메’는 제사 때 신위神位 앞에 놓는 밥을 말한다. 그러니까 제기祭器로서 귀히 만들고 사용했다는 뜻이다.)


생각이 여기에까지 닿다 보니 ‘막’을 머리로 둔 여러 단어들 중 ‘막노동’을 잘 살펴보고 싶어졌다.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하는 노동… 을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해야 할 만한 사정이 있는 사람들이 하는 노동, 이라고 다시 써본다. 어느 숲해설가에게 들은 말이 있다. 잡초는 아무데서나 잘 자라지만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자라지는 않아요. 지금 내 귀엔 이렇게 들린다. 잡초 같은 인생이라 아무 일이나 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살지는 않아요. 막국수가 결코 아무렇게나 만들고 먹는 먹거리가 아니듯, 막사발이 절대로 함부로 짓고 사용한 그릇이 아니듯 막노동도 허투루 하는 일이 아닐 것이다. 자신의 삶을 막 대하는 사람이 하는 일도 아닐 것이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몸으로 노동이라는 삶의 엄중한 제祭를 올리는 시시포스의 존재들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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