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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훈 May 22. 2024

살 삶 사람 사랑

사량. 생각할 사思에 헤아릴 량量을 쓴다. 국어사전은 생각하여 헤아림으로 풀이한다. 량에는 가득하다는 뜻도 있으니 생각으로 가득 찬 상태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누군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충만해지다, 라는 뜻이다. 이름난 여러 학자들이 사량을 사랑의 어원으로 삼는다. 일단 둘의 꼴이 매우 유사하고 다음으로 사량의 뜻이 저러하기 때문이다. 사랑의 사전적 의미가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이라 하니 제법 그렇다고 여길 만하다. 여기에 더해 옛 문헌들까지 제시하면서 사량이 사랑의 원조라 하니 더욱 그럴듯하다. 문자적으로는 일면 타당한 주장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입말로서의 사랑이 사량에서 왔다고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 학자들이 한 것처럼 이유와 근거를 제시하라면 딱히 내세울 것이 없다. 그저 내 언어적 직감이 도리질을 치고 있다는 게 이유라면 이유다. 언어적 직감을 한 글자로 줄이라면 ‘살’이라고 하겠다. 


살과 삶, 사람과 사랑은 우연하다고 보기에는 심하게 닮았다. 영어의 live, life, love도 그렇다. 명사는 인식의 추상화 작업의 일환이므로 어원을 동사인 live로 잡는 게 타당하다. 마찬가지로 살다를 네 개의 명사, 살 삶 사람 사랑의 어원으로 삼는 게 이치에 맞다. 네 개의 명사 중에서 추상성 짙은 삶과 사랑을 제외시키면 구체 명사인 살과 사람이 남는다. 이중에서 살이 사람보다 좀더 구체적이고 무엇보다 신체적이다. 게다가 1음절이다. 인식의 거름망을 상대적으로 덜 거쳐서 나오는 감탄사의 대다수가 한 글자를 넘기지 않듯이 신체밀접형 명사는 눈 코 입 귀 뺨 목 손 발 팔 등 배가 그러하듯 외마디이다. 


모든 기원은 단순하다. 물이 (수원 원源) 처음 솟아오르는 (일어날 기起) 곳, 즉 발원지는 언제나 하나의 작은 틈이다. 어원도 마찬가지다. 생각하고 헤아리는 것도 여러 겹을 거쳐 나오는 인식의 작용이다. 반면 사람이 살을 입고서 온갖 것들을 느끼고 경험하며 사는 데에는 그 어떤 매개체의 개입도 간섭도 필요치 않다. 바로 그 자체인데 다른 무엇이 무슨 소용인가. 사랑을 사량이라는 한자어까지 제시하면서 복잡하고 어렵게 설명할 거 하나 없다. 사람과 사람이, 생명이, 사물이 서로의 살을 내주고 또 취하는 살가운 과정에, 사람이 삶을 누리는 가장 아름다운 방법에 생각할 일도 헤아릴 것도 없다. 사랑은 그 어원처럼 단순하다. 그저 그 존재 자체로 충만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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