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전후의 추위, 한겨울의 심한 추위를 뜻하는 세한歲寒이라는 단어는 마치 공자가 최초로 사용한 것처럼 느껴진다. 『논어』에 등장하는 세한의 영향에서 내가 줄곧 머물고 있는 까닭이다. 「자한子罕」 편에 이런 구절이 있다. “선생께서 말씀하시길, 세한이 온 뒤에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나중에 시든다는 걸 알게 된다.”
낮아진 기온과 메마른 바람이 넌지시 겨울의 기색을 나타내기 시작할 즈음 은행잎과 단풍잎의 노랗고 붉은 색이 우리 눈에 불꽃처럼 선명하게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겨울 한가운데를 지날 때에야 진갈색 나목들 사이사이 잠잠히 드러난 솔잎들이 여전히 초록빛 잃지 않았음이 보인다. 겨울 중에서도 소나무의 푸른 잎이 더욱 빛을 발하는 때는 눈이 하늘과 땅 온 세상을 한 가지 빛깔로 뒤덮는 건곤일색乾坤一色의 날이다. 사위가 뿌옇고 하얀 우윳빛 기운으로 가득한 속에서 마치 세상에 홀로 남은 색인 듯 홀연히 떠오르는 가지 끝 솔잎들, 그 푸른빛 맵시. 하얀 겨울산으로 들어가면 이 빛은 더욱더 낭랑하게 발한다. 눈을 지붕으로 삼아 은근한 포물선을 그린 나무가지 아래 공손히 자리한 솔잎의 빛깔은 해질 무렵 호롱불 밝힌 초막집처럼 단정하다.
이런 광경을 본 후 공자는 깨달음을 얻은 것이었을까. 한겨울이 되고 나서야 솔잎이 뒤늦게 시든다는 걸 알게 된다는 깨달음. 한 발 더 나아가 우리도 흔히 변치 않는 소나무와 같은 마음을 품어야 하지 않을까, 라는 깨달음. 지상으로 낙하하는 사과를 보며 뉴턴이 물리적 진리를 발견했듯이 공자는 겨우내 푸른 잎사귀를 보며 인문적 진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지조와 절개 같은 덕목들을 꼭 매서운 겨울 같은 난세와 연결 지을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충성 이데올로기에 삽입시킬 이유도 없을 것이다. 늘푸름의 마음가짐을 극기 정신 따위로 들먹일 처지 또한 아니다. 다만 공자 스스로 괴력난신怪力亂神에 대해 함부로 말하기 꺼려 했듯이, 세한의 깨달음 역시 한 사람의 한 사람의 품격에 대한 것이었을 테다. 그것이 가장 우선이었을 테다. 깨달음은 철저히 개인적인 사태이기 때문이다. 본 것을 나눌 수는 있어도 알게 하긴 힘들며, 앎을 전할 수는 있어도 깨우침을 줄 수는 없는 때문이다. 혹 줄 수 있다 해도 어느 정신, 어떤 마음에 맺히느냐에 따라 깨달음의 강도와 결은 달라진다. 공자의 경우처럼 인륜의 경우에 머물기도 하지만 때로는 인정의 영역으로까지 굴러가기도 한다.
완당 김정희 선생의 <세한도>를 본다. 일말의 온기도 약간의 수분도 느껴지지 않는 영하의 칼바람이 화면을 훑고 지나간다. 그 가운데 덩그렇게 놓인 집 한 채는 추위를 막아주기에 힘겨워 보인다. 그나마 집을 에워싼 네 그루의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이 나무들에 매달려 있는 가느다란 잎들이 이 쓸쓸한 정경에 자그마한 위로를 건넨다. 완당 선생도 세한의 푸른 잎들을, 이 푸른 잎들이 불러온 제자 이상적의 모습을 유배 생활의 위로로 삼았을 것이다. 선비들이 본받아야 할 겨울철의 세 벗, 즉 매화 소나무 대나무를 뜻하는 세한삼우歲寒三友의 유학적 덕목 다 뒤로 하고서, 이상적이 멀리서 보내준 귀한 서책들 다 잊고서 상록의 소나무 잎처럼 자신을 한결 같이 기억해주는 한 사람의 의연함에 얼음처럼 딱딱하게 굳은 마음 녹였을 것이다. 완당에게 소나무의 깨달음이란 이런 것이었을 테다. 예술과 학문의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해 평생 애쓴 그가 종내 다다른 경지는 이런 수수한 마음에 있었을 테다.
세밑가지에 이른 날, 동네 터줏대감인 양 집 앞 공원에 서 있는 열두 그루의 크고 작은 소나무 사이를 지나면서 염불 외듯 이 구절을 암송한다. 세한연후歲寒然後에, 지송백지후조야知松柏之後凋也. 그런 다음 가지 이곳저곳에 드뭇이 또는 듬성히 박혀 있는 가는 솔잎들을 보며 중얼거린다. 이렇게 추운데도 아직 시들지 않았구나. 내 마음도 저런 늘푸름을 잃지 않는다면, 그것을 내 마음에 언제나 간직할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