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단어들 14화

언어의 딥 필드

by 박정훈

언어: 인간의 생각이나 느낌을 나타내거나 전달하기 위한 소리나 문자 같은 수단.

언어를 소유한 주체가 인간이라고 못박은 게 눈길을 끈다. 국어사전뿐만 아니라 일어사전에도 ‘사람의’가 있다. 영어사전도 본다. ‘사람들이 사용하는’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다. 인간이 소유하거나 사용하지 않으면 언어는 그 자격을, 최소한 사전에서는 박탈당할 수도 있다. 생각과 느낌의 주체를 단정적으로 설정한 까닭은 사전적 정의의 불명확성을 피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설정에는 데카르트의 동물기계론, 즉 동물의 표현은 기계적인 반응일 뿐이라는 사상이 보이지 않게 작동하고 있다. 언어의 낱말 뜻은, 언어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17세기에 머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다큐멘터리 <신비한 소리의 세계>는 온갖 소리들이, 즉 거의 모든 종種들의 신호가 공기 중을, 심지어 물속에서도 저마다의 체계를 띠고 오고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 체계적 신호는 당연히 소음이 아니고, 발신자와 수신자가 고정된 기계적 반응도 아니다. 본능적인 표현뿐만 아니라 감정, 정보, 요구를 전달하고 받는다. 다름아닌 언어활동인 것이다. 첨단 오디오 기술이 잡아낸 인간의 가청범위 밖 언어들은 허블 우주 망원경이 드러낸 딥 필드와도 같다. 빈 곳이라 여겼던 암흑공간이 실제로는 무수한 은하를 품고 있는 광대한 터전임이 밝혀졌듯이, 무음 또는 소음이라 여겼던 것이 실상 의미를 지닌 언어라는 발견은 세계라는 필드를 우리가 얼마나 얄팍하게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반증한다. 따지고 보면 첨단장비나 가청범위를 운운할 일도 아니다. 별 노력이나 장비 없이도 통할 수 있는 다른 언어가 이미 우리와 접하고 있으니 말이다.


수달과 진짜로 그의 삶에 대해 아직 얘길 나누지는 못했어. 수달은 이빨이 너무 많아서 모음을 발음하는 데 곤란을 겪지. 그래서 우리는 몸의 표현으로 서로를 이해해. 수달은 말은 없지만 그가 자신의 삶에 대해 하는 이야기는 분명하지. 수달은 내가 누구를 아님 무엇을 숭배하는지 궁금해하지 않아. 대신 그토록 차갑고 상쾌하고 생기 넘치는 강에 왜 내가 뛰어들지 않는지 아침마다 궁금해하지.

—메리 올리버, 「거의 대화에 가까운」 중에서


내세에 대해 두려움을 갖거나 재물 떠받드는 걸 그치고 자신과 함께 자연과 동화하자는 수달의 명료한 메시지는 ‘지금 이 순간만이 있을 뿐’이라는 깨달음의 언어처럼 담백하다. 여기에 형식, 문법, 논리를 들이대며 언어로서의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고 단정할 수 없고, 소리가 없는 몸짓일 뿐이므로 언어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도 없다. 시인이 수달과 ‘거의 대화에 가까운’ 소통을 할 수 있었던 건 수달의 소리와 몸짓을 언어 이전 단계로서의 무엇이 아니라 더 넓은 세계에 속한 다른 언어로 받아들인 덕분이다. 시라는 문자 언어의 가장 순결한 형태를 짓기 위해 ‘인간의’ 언어를 벗어난다는 역설. 인간의 언어라는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면 다른 언어와의 소통을 가능케 하는 열린 공간을 만난다. 그 공간은 다름아닌 우리의 마음이다. 동물을 인간의 타자로 대하지 않는 마음, 종種의 차이와 언어의 다름을 위계적으로 나누지 않는 마음.


물론 의심의 여지 없이 문자는 인간 문명의 위대한 발명품이다. 하지만 이 명제는 오직 태양계에서만 잠정적인 참이다. 드니 빌뇌브 감독의 영화 <컨택트>에서 헵타포드라 불리는 외계생명체는 문자가 인간 문명만의 산물이라는 고정관념에 의문을 갖게 한다. (이 작품이 허구라는 점을 아주 잠시만 덮어두자.) 오히려 영화 속 헵타포드의 문자 언어는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의 선형적 흐름에 휩쓸려 가는, 행위와 행위 주체를 별개로 갈라놓는, 추상을 구상보다 고차원으로 여기는 인간 문자의 협소한 틀을 벗어나 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이러한 초월성에 있지 않다. 다른 언어와의 소통을 위해서 선결되어야 하는 사항은 무엇인가. 언어학자인 루이스가 사각 테두리에 갇힌 인간의 단어를 무기 버리듯 바닥에 내려놓고, 투구와 갑옷처럼 보이는 보호장비를 과감히 벗었을 때 헵타포드와의 진정한 대화가 시작되었음을 떠올려보자. 다른 언어 간의, 심지어 같은 언어 간의 참다운 대화를 위한 조건은 언어 그 자체에 있지 않다. 소리들을 떠받치고 있는 허공처럼, 은하들을 담고 있는 우주처럼, 언어를 배고 있는 마음, 그 딥 필드를 서로 받아들일 때 소통의 문은 조금씩 열린다. 닫혀 있는 듯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의 하늘을 향해 우주 망원경의 렌즈를 열흘이나 열어둔 무모한 시도처럼 그 시작이 무의미해 보일지라도.

keyword
이전 13화창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