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자신을 가리킬 땐 엄지를 내 가슴 쪽으로 향하게 하고, 상대방을 가리킬 때 검지를 네 가슴 쪽으로 향하게 한다. 나와 너의 모음의 돌기 방향은 이와 반대다. 나의 손가락은 너에게 향하고 있고, 너의 손가락은 자기 자신에게 향해 있다. (‘내’와 ‘네’도 마찬가지다.) 나 자신은 너를 대하듯 객관적으로 대하고, 너를 대할 땐 나 자신에게 하듯이 귀히 여기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는 하기에는 근거가 너무 없다. 단지 모음의 역방향에 이와 같은 의미를 주면 어떨까 생각할 뿐이다.
너를 나처럼 대하는 인칭대명사가 하나 더 있다. 흔히 연인 사이에 주고받는 ‘자기’가 그렇다. 자기는 자기자신을 말하지만 이들 두 사람에게 자기는 그 자신이라는 울타리 너머의 대상을 뜻한다. 울타리 내부도 외부도 모두 하나의 명칭으로 부른다면 굳이 안팎을 나눌 필요가 없다. 그리하여 ‘자기’라는 호칭은 나 자신과 나 밖의 너가 개별적 존재가 아닌 한몸이라는 뜻이다.
나와 너를 합치면 우리가 된다. 흔히 나의 복수형이라고 한다. 둘 이상의 나, 그러니까 서로 자기라고 주고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인원이 충족된다면 이 집단은 우리가 된다. 우리는 한글 초기 문헌부터 이어져 내려온 단어다. 15세기 당시의 문헌에 실렸다는 것은 많은 이들이 입말로 사용한 단어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 어원이 확실하지는 않다. 단지 일정한 범위나 경계를 나타내는 울 또는 울타리에서 왔다는 설이 있을 뿐이다. ‘우리’라고 할 때 자연스레 어느 한정된 영역이 심정적으로 그려지는 탓에 이러한 가설이 나왔는가 보다.
한중일 삼국 언어의 인칭대명사 중 일인칭 복수, 즉 ‘우리’의 단어 모양새는 우리 한국어가 가장 독특하다. 중국어와 일본어 모두 나에 복수를 뜻하는 보조사 ‘들’을 붙인 것을 우리로 삼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중국어나 일본어의 우리를 멋대가리 없이 직역하자면 ‘나들’이 된다. 나에 해당하는 아我에 여럿을 뜻하는 문們을 붙이면 중국어의 우리가 된다. 일본어 역시 나라는 뜻의 와타시私에 들에 해당하는 보조사 타치たち를 더하면 우리라는 뜻이 된다. 의미는 이렇게 통한다 해도 중국인이나 일본인이 이 단어를 사용할 때의 어감이 우리 한국인이 우리를 우리라 부를 때 받는 그 느낌과 같을지는 모르겠다.
한국어에서의 우리는 둘 이상의 나가 단순히 속해 있는 느슨한 집단이 아니라, 둘 이상의 나가 모여 하나의 울타리 안에 거하는 또다른 차원의 공간이다. 그래서 여럿의 나들이 공존하는 명사 앞에 우리를 붙이는 경우가 빈번하다. 우리나라, 우리말, 우리글, 우리 민족, 우리 가족, 우리 학교 등처럼 말이다. 심지어 우리 남편, 우리 아내처럼 붙이면 의미상 오류가 생기는 경우에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붙인다. 우리의 언어 습관은 이러한 오류에 관대하다. 일일이 지적하지 않아도 그 뜻을 충분히 헤아린다. 여기서의 우리는 문법적으로는 소유격 조사가 붙은 명사이지만 우리 한국인에게 우리는 마치 맨손의 맨, 풋사랑의 풋, 군것질의 군, 찰떡의 찰 같은 접두사처럼, 분리하면 그 뜻이 서로 어긋나게 되는 오묘한 품사다. 오묘한 만큼 우리는 가장 넉넉한 품을 지닌 단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