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글쓰기(7)
새벽 4시, 전화벨이 울렸다. "아빠가 돌아가셨어..." 언니였다.
인파선암으로 1년 넘게 투병 중이셨다. 아빠의 회복되는 모습을 보고 온 지 얼마 안돼서였다. 전화를 끊고 강릉행 고속버스를 타러 집을 나서면서 일기장에 끼워놓았던 아빠의 사진을 챙겼다. 어릴 때 사진관에서 찍은 유일한 가족사진이었다. 왠지 그게 필요할 것 같았다. 가장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죽는 모습을 안 보인다고 하더니 아빠는 내 곁을 말없이 떠났다. 장지로 이동할 때 마지막으로 아빠의 얼굴을 보았다. 그 모습은 너무 평안해 보였다.
우리 인생은 기찻길에 있는 두 개의 레일처럼 슬픈 일과 기쁜 일이 함께 온다. 아빠는 어릴 때 가족과 함께 살지 못한 일로 늘 미안해하셨다. 고 3 때 엄마가 돌아가신 후 아빠는 나를 살뜰히 챙겨주셨다. 그때의 마음이 낡은 일기장에 적혀져 있다. "아빠를 용서하기로 했다. 그리고 나를 용서한다."
쓴다는 의미는 희미한 안개를 걷어 내는 일이다. 방금 흘린 눈물이 무엇이었는지, 왜 그렇게 느꼈는지, 왜 분노했는지, 왜 아직도 우울한지 쓰고 나면 조금씩 또렷해진다. 막연한 감정을 추수리고 다시 일어설 힘을 얻게 된다. SNS에 일기를 쓰고 있음에도 여전히 손때묻은 일기장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쓰면서 느끼는 거룩한 촉감 때문이다. 일기장에 쓰고 있으면 그 순간은 외롭지 않았다. 쓴다는 것은 내 감정을 똑바로 쳐다본다는 것이다. 이해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적어도 쓰는 것만으로 내 마음만은 지킬 수 있었으니까..
내 안의 외로움, 인생에 대한 불안감이 나를 조여올 때마다 노트에 글을 쓰고 나면 마음이 조금 풀렸다. 쓰다 보면 어느새 내게 '괜찮아..'라고 위로해 주는 것 같았다. 니체가 말하길 인간이 자기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진정으로 나답게 살아야 한다고 했다. 나답기 살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고 했다. 글을 쓰면서 니체의 말을 내 것으로 받아들였다. 일기장의 위로가 필요했던 내 안의 어린아이는 쓰고 쓰면서 모든 것을 이해하려 했다. 쓰지 않았다면 느껴보지 못했을 감정이다.
뒤늦게 글 쓰는 사람이 되려니 매번 질문하게 된다. 나의 글쓰기는 자기 성찰인가 아니면 나의 '데스티니'인가? '데스티니(destiny)'란 의미를 우리가 생각하는 '운명'이라고 표현하기는 아쉽다. 서구 기독교 문화 속에서 '데스티니'라는 의미는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흔하게 말하는 '팔자'라는 의미가 아닌 각자의 삶에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명확한 설계도가 있고 목적이 있다. 내가 믿음을 선택했다면 내가 가는 이 길은 우연이 아니라 살면서 툭툭 던져놓은 구슬들을 꿰어가는 여정이다.
만약 전업 작가의 길을 빨리 시작했다면 나의 무재능을 탓하면서 이미 포기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기에 시작하기에 늦은 때는 없다. 읽고, 듣고, 보고, 경험하는 이 모든 행위가 글 쓰는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내 퍼즐은 완성되지 않은 것이다. 살면서 겪었던 삶의 재료들이 책을 쓰기 위한 재료가 된다면 '데스티니'로 가는 여정이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 공감, 그 과정을 연결하는 일은 결국 나의 해방일지를 쓰는 일이다.
늘 바쁜 아내를 지켜보던 남편이 하루는 내게 질문한다.
"당신 너무 열심히 공부하는 것 아니야.. 몸도 생각해야지.. 그게 나중에 돈이 되는 일이야"
남편에게 말했다.
"그건 모르겠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어"
잘 쓰기 위해 좋은 밭을 가꾸지 않고 기적적으로 잘 쓸 수는 없다. 잘 살아야 잘 쓸 에너지가 생긴다. 요즘 사람 사는 일에 관심이 많아졌다. 남의 말을 경청해서 들으려 한다. 그들의 이야기가 글이 되기도 한다. 사는 게 조금 재미있어진다. 책은 읽을수록 읽을 책이 더 늘어난다. 어떤 글은 퇴고라는 수술대 위에 많은 시간을 보낸다. 보고 또 보고 고치다 보면 눈이 빠지는 듯하다. 그런데 글 한편이 완성되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이게 좋아서 글 쓰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