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고 싶은 질문들
시골로 이사를 온 지 보름 정도가 지난 후 가족들을 초대했다. 8월의 한여름에 부모님과 이모와 이모부, 둘째 부부와 셋째, 그리고 우리 부부까지 아홉 명의 사람이 스물다섯 평 작은 집에서 복작거리며 세 끼를 먹고 돌아갔다. 가족들은 제각각 집에 대한 품평을 아끼지 않았다. 이미 다 지은 집에 이게 뭐니 저게 뭐니 품평해 봤자 고칠 수도 없는데. “어머 너무 예쁘다” 같은 낯간지러운 말은 역시 가족과는 어울리지 않는 법이지. 딱히 기대도 없으니 타격을 입지도 않는다. 하지만 듣고도 못 들은 척했던, 가슴에 가시처럼 박힌 한마디 말이 있다.
“좋은 학교 보내 놨더니 여기서 이러고 살고 있네.”
약주를 한 잔 하신 아버지가 이모부에게 한탄하며 내뱉은 말이었다. 거실과 주방이 어차피 한 공간이라 주방에 있던 나에게도 또렷이 들렸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 뒤로도 따로 아버지와 그 말에 대해 얘기를 나누지 않았다. 우리가 그렇게 살갑고 정다운 부녀지간이 아니기도 하고, 얘기를 한다 한들 의견 차이가 좁혀질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직도 한 번씩 술을 잔뜩 드신 날에 전화를 걸어와 꼬부라진 혀로 묻는다. 지금 (그러고 사는 게) 행복하냐고.
시골의 삶을 동경하는 친구들이나 어차피 네 삶이니 내가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지인들은 시골행을 나름 용기 있는 있는 결정이라고 인정해 준다. 딱히 인정을 바랐던 건 아니었지만 부정적인 평가보다는 듣기 좋은 게 인지상정. 우리 마을 어른들은 젊은 사람들이 시골에 왔다는 사실만으로 우리가 도시에서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쫓겨온 것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그런 게 아니라고 해명하고 싶지만 그냥 둔다. 내게 그다지 영향을 주지 않는 타인의 오해에는 별 타격감이 없다. 하지만 아버지는 다르다.
그날 뒤돌아 서서 설거지를 하며 얼굴이 조금 화끈거렸다. 내가 쌓아온 가치관으로 선택한 삶에 대한 자부심이 일순간 바닥에 떨어진 코 푼 휴지 뭉치처럼 보잘것없게 느껴졌다. 아버지의 인정을 받고 싶었을까. 아버지가 내가 살아온 세상은 다르기에 아버지는 내 선택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내 결정에 대해 이해를 구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내 삶을 ‘여기서 이러고 사는’ 것으로 평가절하 당하고 싶지도 않았다. 마음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으면 되었다. 듣지 못한 생각은 내게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으니까. 하지만 곧 깨달았다. 평가하는 말을 듣고 싶지 않은 마음은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과 다를 게 없었다.
자기 정체성은 타인의 인정을 받아야만 우리가 부여받고 싶어 하는 가치를 얻게 된다.
악셀 호네트, 인정투쟁
이제는 타인의 인정에 목매지 않는다고 자부했지만 여전히 나는 타인의 인정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부럽다, 나도 언젠가는 그렇게 살고 싶어, 너무 용기 있다.’ 친구들과 가까운 지인들의 친절한 말들에 ‘부러울 게 없다, 각자의 인생길이 있고 나는 그저 이 길로 가는 것뿐이다’라고 소탈한 척했지만, 나는 그 살가운 말들에 누구보다 기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쓰는지도 모르겠다. 내 생각과 결이 비슷한 사람들로부터 정서적인 인정을 받고 싶어서. 그런 마음을 들여다보게 되면 내가 좀 징글징글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이 사람과 사는 한 필연적으로 인정받고 싶어 할 수밖에 없을 텐데, 인정받고자 노력하고 의식하는 것을 부정하기보다는 오히려 앞으로 나아가는 동력으로 삼는 게 바람직하지 않나 하고 누군가 또는 내 안의 타자가 묻는다면?
사람은 인정이 필요하지 않거나 인정받을 자격이 없는 일에도 인정받기를 바라는 맹점이 있다는 악셀 호네트의 말을 빌리고 싶다. 인정이 필요하지 않은 일을 잘 발라내고 싶다. ‘여기서 이러고 사는’ 삶에 대해서는 누구의 인정도 필요 없는 마음으로 살고 싶다. 불인정의 말을 들어도 아하 너는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자세로 살고 싶다. 내 삶에는 아주 작고 귀여운 인정만 남겨 두고 싶다. 네가 키운 배추가 아주 달고 꼬숩다든지, 네가 구운 케이크가 딱 적당히 달고 맛있다든지, 네가 꾸민 책상은 간결하고 포근하다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