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13 주차(23.10.13.~23.10.19.)
10월 13일(금)
아침 일찍 출근해서 커피 세팅도 하고 단체 손님 주문도 받았다.
코워커가 어제 다른 식당에서 근무하던 중 health inspector가 와서 위생 상태를 점검했다고 했다.
꽤나 꼼꼼하게 검사했던 모양이다.
보스가 가게에 와서 맨날 health inspector 얘기를 엄청 하면서 걱정을 많이 하는데,
정작 그가 가게에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어서 말만 온다 그러고 안 오는 건 줄 알았다.
그런데 실제로 존재하고 그걸 겪을 사람이 내 앞에 있다니.
아무튼 health inspector가 정말 불시 점검하러 온다는 것을 실제로 경험한 자(내 코워커), 그걸 들은 자(나)는 오늘 하루 종일 청소에 매진했다.
평소에도 지저분 한 건 절대 아니지만 평소보다 더 빡빡하게 청소했달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사소한 부분도 깔끔하게 정리하고 평소 관리하던 곳은 더 세심하게 청소했다.
어제, 오늘 날씨가 좋아서 많은 사람들이 시내가 아닌 외곽으로 놀러 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가게는 한산했다.
막판에는 단골손님들이 조금 오긴 했지만 바쁜 일은 없었고, 그 덕에 마감도 평소보다 10분 정도 빨리 했다.
집에 돌아왔는데 뒷 문을 안 잠근 게 생각나서 다시 가게에 다녀왔다.
마감이 일찍 끝난 데다 내일부터 쉰다는 생각에 신나서 문 잠그는 걸 깜빡했던 것이다.
내일 출근 안 하니까 이런 번거로움도 괜찮다.
저녁은 카레 먹고 하루 마무리.
10월 14일(토)
아침 일찍부터 바다에 다녀왔다. 지난 주말 바다 나들이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이번에는 외곽으로 다녀왔다.
바닷가 근처 부자 집도 구경하고 시원하고 맑은 바닷물에 발도 담갔다.
햇빛이 너무 강렬했는데 습하지 않으니까 그늘에 들어가면 순식간에 시원하다. 땀이 안 나는 더위랄까. 이런 게 호주의 여름이겠구나 싶었다.
바닷가 근처에 있는 bunnings라는 대형 철물점(?)에 가서 바퀴벌레 약을 구매했다.
간밤에 손톱만 한 바퀴벌레를 목격했기 때문인데 부디 잘 해결되기를 바라며 스프레이, 튜브 등 다양한 종류로 구매했다.
장도 보고 오늘 하루 외출은 이 정도로 마무리했다.
오후에는 책 한 권을 뚝딱 읽었다.
소설 책 한 권 빌렸는데 너무 재미없어서 작년 이맘때 읽었던 책을 다시 빌려 읽었다.
여전히 설레는 연애 소설이었는데 재미있는 책을 읽으면 잠도 싹 달아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재미없는 책 읽을 때는 졸려서 눈이 계속 감겼는데 책을 바꾸니까 그 무겁던 눈꺼풀이 순식간에 가벼워졌다.
기다리는 택배가 있는데 아무래도 오늘내일 중으로 도착할 것 같진 않다.
지난주 일요일에 시켰으니까 이번 주말에는 안 오는 게 확실한데 너무 기다리는 물건이라 하루하루가 길게 느껴진다.
내일은 남편과 동네 카페에서 가 보려고 한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외식은 괜찮겠지?
10월 15일(일)
벌써 10월의 절반이 지나갔다. 시간 정말 빠르네.
아침 일찍 일어나 아침 먹고 계획대로 동네 카페에서 다녀왔다.
아침 출근길에 보면 이른 시간임에도(오전 6시 20분경) 사람이 늘 많다. 아무리 근처에 카페가 없는 곳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이른 시간부터 사람이 많을 정도의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8시 30분경에 도착했는데 역시나 벌써 많은 사람이 있었다.
나는 따뜻한 플랫 화이트, 남편은 아이스 롱 블랙을 시켜 야외 테이블에 앉았다.
호주에 와서 느낀 것은 커피가 정말 맛있다는 건데, 특히 라테류가 정말 맛있다.
맛있는 커피와 따사로운 햇살, 옆 테이블에 앉아있는 강아지들까지. 행복한 외출이었다.
집에 돌아와 수건 빨래하고 세차하고 청소까지 했는데 바퀴벌레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어디 숨어있는 건지 아니면 나간 건지. 차라리 사체를 보는 게 마음이 놓일 것 같다.
얼마나 더운지 널어놓았던 수건은 반나절 만에 바싹 말랐다.
이것이 호주의 더위이구나, 실감할 수 있었다.
건조기가 필요 없네.
우리나라의 여름은 습하고 더운데 호주의 여름은 비교적 건조하고 덥다. 그래서 빨래가 잘 마르는 걸까.
저녁 먹고 내일 하루를 준비하기 위해 일찍 자려고 한다.
지붕으로 내리쬐는 햇빛에 지붕이 달궈진 건지 2층이 너무 더워서 에어컨을 안 틀 수 없었다.
한국에서는 더위와 습기를 잡기 위해 에어컨을 틀었다면, 이곳에서는 열기를 식히기 위해 에어컨을 틀게 될 것 같다.
내일은 내가 호주에 온 이래로 가장 더운 날이다.
두렵다 얼마나 뜨거울지.
10월 16일(월)
아침부터 꽤나 후끈한 날이었다.
밤이 다 된 지금도 집에 열기가 가득하다.
오늘 아침에는 바퀴벌레 사체를 발견했다.
뒤집어져 있는 사체는 생각보다 컸는데 엄지손톱 만 한 것이 아니라 엄지 손가락만 했다.
남편이 빗자루로 쓸어버리려는데 꿈틀꿈틀 움직였다.
깜짝 놀라 에프킬라를 듬뿍 뿌렸는데도 꿈틀꿈틀.
에프킬라는 웬만한 바퀴에게는 효과가 없나 보다.
그렇다면 저 바퀴는 무엇으로 죽은 것일까.
우리가 산 약은 바퀴가 먹고 죽는 약, 벌레 결계(?) 약, 에프킬라, 이 세 가지인데 바퀴가 먹는 약은 효과가 없다고 들었다.
그런데 결계약 맞고 죽었을 것 같지는 않고, 먹는 약 먹고 죽었거나 죽을 때가 다 돼서 죽었을 거라 짐작하고 있다.
어쨌든 죽은 모습을 봤으니 한시름 놓인다. 어디 있을지 모르는 채로 동거하는 것은 최악이다.
오늘 가게에서는 안 좋은 일이 있었다.
모두가 싫어하는 직원 A에게 쏘아붙인 건데, 사건의 발달은 이렇다.
매주 월요일 아침에 출근하면 모든 것이 엉망인지 한참 됐다.
썼으면 채워 넣는 게 다른 사람에 대한 예의라고 지난주에 말했고 A는 알았다고 했다.
하지만 오늘 아침에는 역시나 아무것도 되어있지 않았고 그것에 대해 말하자 A가 다른 직원 탓을 하는 것이다.
이것 외에도 주문 잘못 받아서 꼬이기 등 일 하는 데 전혀 도움이 안 됐는데 모든 게 겹쳐 내 참을성이 폭발했지 싶다.
남한테 화내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마음이 편한 건 아니지만 한 두 번도 아니고 두 달째 참아왔다.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10월 17일(화)
오늘은 한 달 만에 마감하지 않고 일찍 퇴근하는 날이었다.
조금 더 쉴 수 있어서 어젯밤부터 설렜다.
아침부터 카페 안에 죽어있는 바퀴벌레 사체를 밖으로 밀어버리고, 열심히 청소하고 손님맞이하고 바쁜 점심시간을 보냈다.
중간에 매니저가 와서 손님 주문을 받아 준 덕분에 한결 수월했다.
평소 끝나는 시간은 학교 끝나는 시간과 겹쳐 퇴근 길이 조금 번잡스러운데, 오후 1시에 퇴근하니 정말 여유로웠다.
남편이 일찍 끝나는 날이었으면 같이 점심이라도 먹었을 텐데 그러지 못해서 아쉬웠지만, 그래도 퇴근하고 집에서 편하게 쉴 수 있어서 좋았다.
아침에는 셰프와 코워커가 어제 오후에 어땠는지 물어봐서 솔직하게 다 얘기했다.
갈등이 있었고 내가 그에게 바라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할 일을 하는 것인데, 말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싫다고.
보스나 슈퍼바이저가 있을 때는 열심히 하지만 그들이 떠나고 나면 시켜도 제대로 할 일을 안 하는 것 역시 불만사항이라고 얘기를 전했다.
셰프는 워낙 sweet 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번 일에 대해서 그에게 주의를 줄 것 같진 않다. 내가 불편한 것은 다음 주에도 그와 함께 일을 해야 할 수도 있다는 것인데, 철저히 무시하면 되지만 일하는 사람이 나와 그, 둘 뿐인 상황에서 과연 그것이 나를 위해서도 좋을 것인지는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한다.
점심을 애매하게 일찍 먹어서 집에 도착해서 남편과 빵을 같이 먹었다.
저녁은 둘이서 간단하게 라면에 밥 말아먹기로 했다. 라면이 한 개 남아서 나눠먹을 수는 없고 밥까지 말아먹어야 든든할 것 같다.
내일은 다시 마감까지 일 해야 한다.
오늘 푹 쉬었으니 내일 열심히 일 할 수 있을 거다.
10월 18일(수)
칼에 깊게 베었다. 엄지 손가락을.
빵 칼이라서 그나마 덜 다친 것 같다고 셰프가 상처를 보더니 말했다. 일반 칼이었으면 살점 떨어져 나갔을 수도 있다며.
베이는 느낌이 심상치 않아 피가 많이 나고 꿰매어야 하면 어쩌나 걱정이 많았다.
그래도 할 일은 해야 하기 때문에 워터프루프 밴드에 골무까지 끼고 그것도 모자라 장갑을 세 겹을 썼다.
둔탁한 손 끝 감각에 골무까지 씌워 상처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나는 최악을 가정했다.
계속 피가 나고 있고 결국 상처 부위를 꿰맨다는 상상.
한국이었으면 아무것도 아니었을 칼에 베이는 상황이
낯선 땅에서 이방인으로 있으니 큰일이 되는 것 같아 약간의 서러움이 밀려왔다.
병원에 가는 그 사소한 행동이 내 나라가 아닌 곳에서는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되자,
비로소 내 한 몸 지키기 위해 온 신경을 곤두서야 하는 외딴곳에 나와 있다는 게 실감 났다.
내 나라가 아닌 곳에서 나는 사소한 일 하나에도 엄청난 시간, 노력이 필요하구나. 이래서 집 나가면 고생이라는 말이 있는 것 같다.
다행히 피는 멈췄고 며칠 정도 밴드 붙이고 최대한 물에 안 닿게 처치하면 될 것 같다.
남편에게 부탁해 약도 사서 바르는데 어째 빨간약 바를 때 보다 연고 바를 때가 더 아프다.
밴드를 붙여야 되는지 아니면 공기 통하게 말려야 하는지 그것도 잘 모르겠다.
아침부터 신경 써서 그런지 너무 피곤하다.
일단 약 더 바르고 잠자야겠다. 자는 동안은 손 끝에 아픈 느낌을 잊어버리니까.
10월 19일(목)
약을 잘 바르고 자서 그런지 생각했단 것보다 손가락 상처는 양호했다.
힘을 주거나 물건을 집을 때 소름 끼치는 쓰라림이 있어서 일하는 동안 밴드, 골무를 끼고 있었다.
땀이 차는 게 찝찝해 중간중간 땀을 말려 주었다.
오늘 아침 평화는 불과 30분 만에 깨졌는데 보스가 이른 아침부터 가게에 왔기 때문이다.
그냥 온 것도 아니고 오전에 만들 샐러드, 샌드위치를 같이 만들었는데
덕분에 빨리 끝나긴 했지만 온 주방이 mess였다.
빨리빨리 하면서 주변을 깨끗이 하는 게 쉽지 않지.
보스는 어떨 때는 깔끔하게 하라고 하면서 어떨 때는 오늘처럼 빨리빨리 rough 하게 하라 그런다.
어떤 장단에 맞춰야 하는지 코워커랑 하루 종일 ��� 이런 표정이었다.
보스는 전통적으로(?) 금요일에는 가게에 오지 않는다.
내일은 안 왔으면 좋겠는데 어떨지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