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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쿡크다스 Dec 30. 2023

매출 떨어지는 게 내 잘못은 아니잖아요.

호주 15 주차(23.10.27.~23.11.2.)

10월 27일(금)
지난주부터 꽤 한가했는데 오랜만에 바쁜 하루였다.
아침부터 나를 붙잡고 한참 대화를 나누는 손님이 여럿 있었다.
오후에는 정말 바빴는데 잠시 쉬려고 하면 손님이 한꺼번에 3, 4팀 씩 들어와서 쉴 수 없었다.
겨우 잠깐 앉아서 숨 돌리고 허겁지겁 밥 먹고 바쁘게 일했더니 하루가 다 갔다.
바쁘고 체력적으로 힘들었지만 어제 보다는 훨씬 나은 하루였는데 아마 보스와 매니저가 없었기 때문이리라.
코워커는 주말에 데이트한다고 꽤 기분이 좋아 보였다.
데이트 어땠는지 월요일에 꼭 말해달라는 말로 작별 인사를 끝으로 한 주 일정이 모두 끝났다.

근무 일정에 많은 변화가 있을 것 같은데, 매니저가 다른 직원이랑 같이 일 하고 싶냐고 물어왔다.
문제는 내가 그 직원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왜 싫냐길래 이유를 하나하나 다 설명했더니 다른 직원한테 비슷한 얘기를 들어서 그냥 한 번 물어봤다고 한다.

타 지점 직원이 워킹홀리데이 비자 소지자로 곧 일한 지 6개월이 다 되어 그만두거나 지점을 옮겨야 한다.
아마 이것 때문에 우리 지점에도 인사이동이 있을 것 같다. 지금 코워커와 호흡도 잘 맞고 좋은데 다른 직원이 오면 언제 또 호흡을 맞추나..

이상하게 유독 더 길게 느껴진 한 주가 드디어 끝났다.
내일부터 이틀 잘 놀고 쉬어보자.

10월 28일(토)
오늘 걸은 걸음. 15,000보.
이 정도로 많이 걸을 생각은 없었고, 걷지 않아도 되었는데 어쩌다 보니 많이 걸었다.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곳에 가서 구경하기로 했다.
동네 구경도 하고 조각상(?)이 있다길래 궁금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건 핑계고 그냥 주말을 맞이해 차 타고 멀리 놀러 가고 싶었던 것 같다.
마침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여서 천천히 걷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목적이 있었으나 목표물은 눈에 보이지 않았고(visitor centre를 들렸더라면 그 고생은 안 했을 텐데)
결국 정처 없이 주위를 배회하는 꼴이 돼 버려 결국 둘 다 지쳤다.
커피라도 한 잔 하려고 했는데 근처 카페에는 자리가 하나도 없는 데다 도떼기시장 같이 왁자지껄해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카페를 찾아 겨우 걸어갔는데 그곳마저도 손님이 많았다.
하지만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던 우리는 플랫화이트를 두 잔 시켰고 주문이 밀렸는지 5분 이상 지나 나온 커피는 기다린 보람이 느껴질 정도로 훌륭한 맛이었다.
한 입 먹자마자 음~ 탄성이 나오는 맛.

그냥 우리 이렇게 도심을 즐긴 것으로 오늘 하루 잘 보냈다고 생각하자, 고 말을 했지만 맛있는 커피 한 잔과 집에서 싸 온 샌드위치 덕분에 체력이 회복돼 목표물을 꼭 보고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며 힘을 내기 시작했다.
목표물들이 어디에 있는지 안내책자를 두 장이나 집어 오고 시내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것을 보러 가기로 했다.

그런데 내비게이션이 주차장을 잘못 알려준 턱에 내려서 한참을 걸어갔는데
지도를 다시 보니 걸어갈 수는 있어도 돌아올 수는 없을 것만 같아 결국 차를 가지러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이러면서 1만 5 천보의 기록을 달성하게 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목표물은 하필 바다를 보고 있어 얼굴조차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함께 있던 커플이 사진도 찍어줬고, 부끄러움이 많은 우리는 그들에게 너희도 사진 찍어줄까,라고 묻진 못했지만
두 장 집어 온 안내 책자 중 한 장을 그들에게 주는 것으로 사진에 대한 보답을 했다.


그러고 집에 돌아오니 오후 2시.
보통 주말 아침에 놀러 다녀와도 12시경에는 돌아왔는데 오늘 정말 오랫동안 밖에 나가 있었다.
발도 너무 아프고 졸리다..

10월 29일(일)
날씨가 조금 흐리고 어제 1만 5 천보의 여파로 푹 쉬고 싶은 날이었다.
새벽부터 새들이 구역싸움을 하는지 엄청 시끄럽게 떠들길래 일찍 잠에서 깼다.
아침 먹고 늘 그렇듯 대청소를 했다. 가계부도 정리하고 다음 한 달 어떻게 살지 남편과 간단한 대화 후 어제 사온 고구마를 쪄 먹었다.
맛있어 봤자겠지, 했는데 웬걸 생각보다 맛있어서 하나 순삭 해 버렸다.

낮잠 안 잘 줄 알았는데, 안 자려고 했는데 침대에 누워있으니 졸려서 한참 침 흘리며 잤다.
남편이 나가고 싶어 하는 눈치였는데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 밖에 일절 나가지를 않아 미안했다.
남편은 내가 가고 싶은 데가 있을 때 웬만하면 다 가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남편이 어딘가 가고 싶어 할 때 나는 한 번에 알았다고 한 적이 없는 것 같다.
한국에서 유키 구라모토 콘서트도 그랬고, 오늘도 그렇고.
평소에 뭘 하자고 나서서 말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나한테 말할 정도면 정말 원한다는 건데, 앞으로는 신경을 더 써야겠다.

저녁으로는 (야매) 라구소스를 만들어 파스타를 해 먹었다.
한 통 듬뿍 만들었으니 이번 한 주 요긴하게 먹을 수 있겠다.

지난주 일요일에는 다음 날 출근하기 정말 싫었는데 오늘은 괜찮다. 힘내서 내일부터 다시 열심히 일 해야지, 하는 생각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면 꼭 힘든 일이 생긴단 말이지.. 내일을 기대해 봐야겠다.

10월 30일(월)
이틀 쉬어서 그런지 아침에 일어나는 게 힘들었다.
괜히 관절도 쑤시고.
그래도 일 하러 가야지, 몸을 일으켰고 언제 피곤했냐는 듯이 부지런히 가게로 향했다.
토요일 1만 5 천보의 여파로 오늘 아침까지도 서 있는 내내 다리가 뻐근했다.
점심도 맛있게 먹고 비록 30분뿐인 쉬는 시간이었지만 잘 쉬었다.

주말에 데이트했다는 코워커 얘기 재미있게 들었는데 오후엔 다른 사람과 데이트가 있다고 했다.(?)
코워커에겐 아주 로맨틱한 시월이다.

요즘 남편하고 반지의 제왕 정주행 중이다.
20년이 넘은 영화지만 아직까지 이만한 영화가 없다는 것을 매번 볼 때마다 느낀다.
세 시간이 짧게 느껴지는 영화다. 마저 보고 자야지.

10월 31일(화)
핼러윈이라고 대단하게 뭐 할 줄 알았는데 그냥 지나가는 하루 일 뿐이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점심시간에 손님이 정말 많았고, 코워커가 주문을 받으면서 손님을 구분할 수 있는 정보를 도켓에 적어 놓지 않는 바람에 더 혼란스러웠다.
폭풍 같았던 점심시간 이후 가게는 난장판이 되어있었다.

사람 한 명만 더 있었어도 이런 난리는 나지 않았을 텐데, 두 명이서 온 동네 손님 상대하다 보니 오늘 같은 불상사가 생긴다.
오늘 하루 매출 반짝 좋았다고 보스와 매니저는 행복한 것 같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과연 그럴까?
우리가 점심시간에 고군분투하는 동안 손님들은 주문한 음식 받기 위해 한참을 기다려야 하는데, 내가 손님이라면 그 가게에는 두 번 다시 가지 않을 것이다.
보스가 그 사실을 모르지 않을 것 같은데 인건비 줄이려고 하는 건지 지금 있는 인원대로만 하려고 한다.
불만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냥 지금 이대로 하듯이 하면 하겠는데, 코워커가 너무 힘들어하는 게 걱정이다.
그만 두면 새로운 사람이 올 거고 나는 그 사람과 적응해야 하고, 그런 게 또 다른 복병이니까.

코워커와 예상하기로는 내일은 손님이 거의 없을 것이다. 누가 오겠어. 귀한 점심시간 잠깐 나왔는 데 커피 받으려고 10분 이상 기다려야 했는데.

11월 1일(수)
시간 정말 빠르다. 벌써 11월이라니.
코워커에게 나 일 한지 벌써 3개월이라니까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오래됐냐며.

어제 예상했던 대로 오늘은 정말 한가했다.
오전에 코워커가 일이 있어서 셰프가 나를 도와줬는데 나중에 보니 셰프가 엉망으로 해 놓고 가서 당황스러웠다.
당연히 셰프니까 잘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엉망진창.
우리가 그런 식으로 했다면 보스한테 한 소리 들었을 거다.

장사가 좀 안 되는 것 같으니 매니저가 나 보고 일찍 가라고 했다. 코워커에게 마감 혼자 하라고 하고.
그러면서 최대한 할 수 있는 것 다 하고 가라고 하는데, 그러면 남은 30분 동안은 장사를 못 하는데?
어쨌든 오후에 손님도 없고 마감을 빨리 시작해서 둘 다 퇴근 시간 이전에 끝냈다.

하루 장사가 안 돼서 그런가 보스가 조금 언짢아 보였지만, 나는 예상했던 일이라 놀라지 않았다.
당연하다니까. 누가 오겠어. 어제 온 손님들은 이제 저 가게는 사람 많을 때 가면 대접도 못 받는다고 생각할 텐데.
일찍 집에 오니 여유 있고 좋다. 내일은 오랜만에 다른 코워커랑 일 한다. 다른 느낌의 하루가 될 것 같다.

11월 2일(목)
다른 코워커와 함께 맞이한 아침.
이 코워커는 손이 조금 느려서 아침 준비하는 데 시간이 많이 지체됐다.
거기다 아침에 둘 다 실수를 하는 통에 더 정신이 없었다.
나는 아이스 라테를 뜨겁게 만들고, 코워커는 포스기를 계속 잘못 만져서 수습하느라 바빴다.

오전에는 보스가 잠시 들렀는데 어제 하루 매출 안 좋았다고 우리 다시 back 하고 있지 않냐고 나에게 말했다.
나보고 어떡하라는 건지. 월, 화요일 매출 좋았던 거는 생각도 안 하고 하루 안 좋았다고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네 어쩌네 걱정하는 모습에 기가 찼다.
매번 나와 코워커에게 매출에 대해 얘기하는 것도 황당하고, 불가능한 한 시간 휴식을 강요하는 것도 싫다.
우리나라에는 일희일비하지 말라는 말이 있어,라고 영어로 유창하게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도 나 혼자 복장 터진다.

한창 마감하고 있는데 내가 싫어하는 직원이 갑자기 가게에 왔다.
그 직원 하고는 딱 한 번 같이 일 했는데 너무 싫어서 셰프한테 쟤랑 일 하기 싫다고 대놓고 말해서 셰프가 같이 일 안 할 수 있게 시간표를 짜 준다.
아무튼 갑자기 방문해서 뭐지, 하는데 남은 음식 싸가려고 왔댔다.
가져가는 건 상관없는데 지가 가져갈 가면 지가 싸든가. 코워커가 남은 거 하나하나 싸고 있는데 옆에서 멀뚱멀뚱 보기만 한다.
그걸로도 모자라 이거를 왜 여기다 뒀냐느니, 잔소리까지 시전.
그 꼴 보느니 그냥 땡볕 아래에서 지지는 게 낫겠다 싶어 쓰레기 버린다는 핑계로 밖에 나가 있었다.

지난번에는 손님한테 준다고 냉장고 문 잠깐 열어놨더니 전부 다 contaminated 됐다고 남은 거 안 갖고 가겠다고 하더니, 오늘은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다 가져갔다. 남김없이.
남은 거 버리거나 가져가거나 상관없는데 자기 근무일도 아닌데 갑자기 오는 것도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된다.
장사 잘 돼서 아무것도 없었으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는지.
내일 코워커한테 할 얘기가 생겨서 나야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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