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쿡크다스 Dec 30. 2023

갑작스러운 이별: 코워커의 퇴사

호주 17 주차(23.11.10.~23.11.16.)

11월 10일(금)
한 주의 마무리를 하는 금요일.
이상하게 아침부터 많은 손님이 가게에 찾아왔다.
보통 코워커와 나는 격일로 하루는 주방, 하루는 홀에 있으면서 할 일을 하는 편인데
내가 홀에 있을 때는 1시간 내로 할 일을 마치고 주방 일을 도와주는 편이다.
그런데 오늘은 홀 손님이 아침부터 많아서 9시가 넘도록 주방 일을 도와줄 수 없었다.
바쁜 와중에 셰프는 너네 아침에 많이 바쁘니?라고 물었는데 마치 아침에 바쁘지 않으면 한 명은 조금 늦게 출근시키려는 것처럼 들려 굉장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숨 막힐 정도로 바쁘진 않았지만 금요일이라 그런지 마감 15분 전까지 손님이 왔다.
와중에 코워커가 갑자기 월, 금요일에 비자 관련해 중요한 일이 생겨서 갑자기 다음 주 이틀 동안 근무할 수 없게 됐다고 알려왔다.
코워커가 일을 못 하는 거는 당연히 이해하고, 내가 걱정했던 부분은 나를 혼자서 일 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주말에 혼자서 일 하는 직원이 있는데 걔는 혼자서 하는데 너는 왜 못하니,라고 하거나 나를 혼자서 일 하게 트레이닝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할까 봐 많은 걱정이 됐다. 
일단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미리 걱정하지 않기로 하고 주말에 푹 쉬는 것에 집중해야지.
 
남편이 맛있는 거 먹고 싶다 그래서 집 앞에서 즉석 피자도 사고 음료수도 샀다.
다른 때는 별 말 없으면서 유독 금요일만 되면 junk food 같은 게 먹고 싶은가 보다.
 
11월 11일(토)
지난밤 누가 폭죽놀이를 하는지 펑펑 터지는 소리가 나서 자다 깼다. 수면리듬이 깨진 탓에 잠을 푹 못 잤는지 아침부터 기운이 없었다.
일찍 잠든 탓에 간밤에 온 카톡을 못 봤는데 집주인께서 방문한다는 카톡이었다.
매주 일요일에 대청소를 하지만 마땅히 갈 데도 없고 집주인 분도 오신다기에 이번 주는 토요일에 대청소를 하게 됐다.
대청소라고 해 봤자 화장실, 부엌 물 때 제거, 바닥 청소기와 걸레로 닦기, 마당 쓸기 정도다.
마치고 한참 쉬고 있으니 집주인 분이 오셨고 한 시간 정도 이야기 나누다 돌아가셨다.
 
어디 가기에는 조금 애매한 시간이라 근처 마트에 가서 장을 봤다.
필요한 물건을 사고 맥주도 같이 구매하려고 하니 ID를 보여달라고 했다.
다른 가게에서 술을 구매할 때는 한 번도 ID를 요구한 적이 없었고, 평소 출퇴근길에는 차를 운전하기에 운전면허증을 소지하지만 마트까지 걸어가다 보니 운전면허증도 갖고 있지 않았다.
없다고 하니까 외국인은 항상 여권 같은 ID를 소지하고 다녀야 한다고 점원이 이야기했는데, 
피해의식인지 모르겠으나 그의 말에서 미묘하게 거슬리는 부분이 있었다.
 
바로 나를 외국인이라고 단언한 점이다.
물론 생긴 걸로 봤을 때는 누가 봐도 외국인이지만, 호주는 다인종 국가로 나처럼 생긴 사람도 얼마든지 Australian 일 수 있다.
캐셔는 southeast asia 계통의 사람이었는데,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내가 당연히 외국인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을까?
내가 어려 보이지만 백인이었다면 Passport를 들고 다녀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 
당연히 Citizen이 아닌, 외국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여권을 들고 다니라고 말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외국인인 것이 사실이고 그렇기에 Passport를 요구하는 것이 당연하니까 기분이 나쁠 일이 아닐 수도 있다.
그렇지만 어떤 상황에서든 상대방을 내 기준대로 판단하는 자세는 지양해야 한다.
나의 보스는 호주에서 나고 자란 베트남계 호주인인데, 손님들 중 간혹 보스에게 where are you from? 하고 묻는 양인들이 있다.
그런 질문을 들을 때마다 보스가 썩 기분 좋은 표정이 아닌데 아마 살면서 계속 저런 질문을 받았기 때문 일 것이다.
양인처럼 생기지 않았다고 저 사람은 당연히 외국인이라고 제 멋대로 생각하는 행동은 잘못된 행동이다.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으나 캐셔의 말뿐만 아니라 사고 싶은 것을 못 샀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불쾌함도 있을 거고,
진짜 외국인인 내가 다른 사람이 나를 외국인이라고 판단했다는 것이 이렇게까지 기분 나쁠 일도 아니니 이 정도로 일기장에 풀고 넘어가야겠다.

11월 12일(일)
오후 들어 날씨가 안 좋아질 것 같아 아침에 외출했다.
카페에 가려고 했는데 시티에 있는 카페는 대부분 주말에는 문을 열지 않아서
내가 일 하는 가게 근처에 있는 카페에 갔다.
노상 자리가 있길래 처음으로 밖에서 앉아 커피를 마셨는데
분위기가 좋았던 것에 비해 커피 맛은 다소 아쉬웠다.
카페에 가면 항상 플랫화이트만 시켜서 카페 별로 커피 맛을 비교해 보곤 하는데
어떤 카페는 한 입 먹자마자 탄성이 절로 나오는 데 반 해, 오늘 간 카페는 커피 맛이 너무 약했다.

집에 돌아오니 셰프가 로스터를 보내왔고 걱정했던 것과 달리 다른 코워커와 월, 금요일에 같이 일하게 됐다.
혼자 일 할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데.
걱정거리도 사라졌으니 푹 자고 내일 한 주를 잘 시작해야겠다.

11월 13일(월)
오랜만에 다른 코워커와 함께 일 하는 월요일이다.
이 친구는 손이 느리고 커피를 잘 만들 줄 몰라서 내가 아침 일찍 출근해 먼저 주방 일을 하다가 손님이 몰리는 오전 8시경에 교대했다.
미리 일을 해 둔 덕인지 다행히 모든 것이 9시 30분 이전에 끝났고 오전 내내 손님이 거의 없어 여유 있었다.

빨리 마감하고 일찍 집에 가려고 몇몇 손님에게 우리 이미 마감했다며 돌려보내기를 수차례.
3시가 되자마자 문 닫고 퇴근해 버렸다.
오랜만에 일 해서 그런가 월요일은 유독 힘들다.

11월 14일(화)
코워커의 폭탄선언. 내일이 마지막으로 근무하는 날이야.
아침부터 충격받고 멍해져 일에 집중하지 못했다.
너가 가면 나는 누구랑 일 해?

좋은 곳으로 이직하기 때문에 잘 됐지만 그동안 호흡을 잘 맞춰왔고, 다른 사람과 다시 처음부터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아득해졌다.
나보다 경력이 오래돼 알게 모르게 내가 많이 의지했는데 이제는 직원들 중에 내가 경력이 제일 오래된 사람이다.
탈압박을 잘 못하는 성격이라 바쁜 상황에 숙련자가 있다는 게 참 좋았는데, 너무 아쉽다.
천년만년 같이 일 할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갑작스러운 이별에 당황스럽기도 했다.

아득한 미래가 걱정되지만 그래도 새로운 사람과 일 하다 보면 적응될 거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졌다.
우당탕탕 하면 되겠지 뭐.
잘하려고, 빨리 하려고 하니 마음이 급하고 불안해지는 거니까 뭐든 될 대로 되라는 마음가짐으로 내려놔야 한다.

매주 화요일은 기름 값이 제일 저렴한 요일이라 저녁 먹고 집 근처 주유소에 다녀왔다.
저렴한 가격에 가득 주유 완료. 늦은 저녁의 선선한 바람이 좋았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평소에는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 있던 가게가 손님으로 꽉 찬 모습을 보았다.
호주 사람들 저녁에는 다 집에 가서 쉬는 줄 알았더니 가게가 인산인해라니 놀라웠다.

내일은 코워커와 함께 근무하는 마지막 날.
아쉬운 마음에 잠이 잘 오지 않을 것 같다.

11월 15일(수)
대망의 마지막 날이다.
아침부터 방문한 매니저에게 코워커는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오늘까지만 근무하고 다른 데서 일 하게 됐다고 말을 꺼냈다.
이야기는 생각보다 잘 마무리됐다. Casual이라 그런지 사실상 당일 퇴사 통보인데도 크게 뭐라 하지 않는다.

마지막 날이라 여유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손님으로 하루종일 북적였다.
러시가 있던 것은 아니지만 끊임없이 손님이 들어와 인수인계를 받으러 가야 하는 코워커는 마음이 급해 발을 동동 굴렀다.
내가 혼자 마감할 테니 일찍 가라고 했지만 최대한 다 하고 갈 거라며 청소, 시재 점검까지 마치고 급하게 우버를 잡아 떠났다.
이렇게 여유 없이 인사도 못 나누고 작별할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아쉬운 마음에 한참을 둘이서 문자를 주고받았다.

당장 다음 주가 걱정돼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는 나를 보며 괜찮을 거라고 다독여줬지만, 안 괜찮을 것 같다.
누가 와서 일을 같이 하든 부담이 많이 될 거다.
이 친구랑 같이 일 할 때는 주방에 있든 홀에 있든 하나도 걱정되지 않았다. 상대를 믿고 나는 내 할 일에만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사람과 같이 일 하게 되면 한동안 서로 맞춰가느라 힘들 게 예상된다.
하지만 이 친구와도 한동안 서로 맞춰가는 과정이 있었던 만큼 다른 사람과도 잘 맞춰나가리라 믿는다.

11월 16일(목)
코워커가 떠나면서 매니저는 부랴부랴 사람 구하느라 바빠 보였다.
내일만 해도 두 명이 오전 중에 트라이얼 하러 오기로 한 걸 보면 엄청 급하긴 급한가 보다.
오늘 같이 일 한 코워커랑 다음 주 로스터는 어떻게 나올지 정말 걱정된다, 너는 여기서 계속 일 할 생각이 있느냐 등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오늘은 매니저가 꽤 오랫동안 상주해 있던 덕에 한 시간 가까이 쉴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오트밀크로 커피를 만들어 먹었는데 아몬드 밀크보다 훨씬 내 입맛에 맞아서 종종 즐겨 먹을 것 같다.
브랜드마다 맛이 다르겠지만 아몬드밀크보다 곡물 맛이 덜 나서 커피의 맛도 크게 방해하지 않았다.
내일은 하나는 우유, 하나는 오트밀크로 만들어 맛을 비교해 봐야겠다.

가뜩이나 바쁜 금요일에 두 명이 트라이얼 하러 온다니까 걱정이 많이 된다.
정신이 없을 것 같은데 오늘 같이 일 한 코워커가 말했듯 Don't worry, be happy다.
같이 있으면 참 든든하다. 나는 정말 좋은 코워커들과 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집에 왔는데 갑자기 집 인터넷이 끊겨 우리 집만 문제인가 했더니
온 동네 서버가 터져 꽤 넓은 지역 인터넷이 먹통인 상황이라고 한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서 저녁 먹고 홈트 하는 대신에 산책을 다녀왔다.
여름이 다가오고 있어 낮에는 정말 덥지만 저녁이 되면 시원하다.
추운 날씨가 더 좋다고 생각했는데 시원한 저녁 바람을 맞으니 이런 날씨도 괜찮다고 느껴진다.



작가의 이전글 총체적 난국: 바퀴벌레, 임금체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