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22 주차(23.12.15.~23.12.21.)
12월 15일(금)
호주는 오늘부터 약 6주간의 school holiday가 시작된다.
아침 출근길 라디오에서는 오늘 하루 공항이 가장 바쁜 날일 것이라고 한 것을 보니
긴 연휴를 맞아 많은 이들이 해외로 나가는 듯했다.
내심 가게에도 사람들이 많이 안 올 것을 기대했지만 한 명 한 명이 이것저것 다양하게 사 가는 통에 썩 여유롭지는 않았다.
거기다 보스가 와서 한참을 상주하다 돌아가는 바람에 마감이 조금 늦어졌다.
6주 간의 휴가라니, 한국이었다면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물론 모두가 6주 동안 회사에 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인 분위기가 크리스마스와 연말이니까 넉넉하게 여유를 보내자는 분위기이다.
학생들이 오랫동안 학교에 가지 않으니 부모가 같이 시간을 보내야 하고, 회사에서는 그런 부모를 배려하는 분위기랄까.
정부 기관도 shut down 하는 기간이 있다고 하는 걸 보니 아마 연말에는 온 동네가 고요할 것만 같다.
내가 퇴근하는 시간은 학생들이 막 귀가하는 오후 3시~3시 30분 사이인데,
방학이라 그런지 오늘은 퇴근시간이 밀리지 않아 좋았다. 코워커도 퇴근길 버스 타면 사람이 너무 많아 서서 갔는데 어제, 오늘은 앉아서 갔다고.
1월 말까지 어떤 변화가 있을지 기대 반, 걱정 반이다.
12월 16일(토)
호주 도착 이래 처음 장거리 운전을 했다. 왕복 300km가 넘는, 2시간 넘는 거리의 도시에 방문하기로 한 것이다.
특별히 그 도시에 볼 것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주말이니까 드라이빙 겸 멀리 다녀오고 싶었다.
갈 때는 남편이, 올 때는 내가 운전했는데 두 시간 동안 직진만 하는 게 마냥 쉬운 운전은 아니었다.
약 한 시간 떨어진 거리까지는 차가 제법 많았는데 그 후로 다른 한 시간 동안은 도로에 차가 거의 없었다.
도심에서 멀어질수록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 것은 어느 나라나 똑같다는 것을 체감했다.
도로 양 옆으로 광활한 농장이 이어졌고 넓은 들판에서 여유롭게 풀을 뜯고 있는 소, 말을 보았다.
땅이 넓으니 너희는 제법 자유롭게 넓은 공간을 이용할 수 있구나, 한국은 저런 공간을 제공하려야 제공할 수 없는 환경임이 아쉬웠다.
유명한 지역 농산물 마켓에 들러 납작 복숭아와 그냥 복숭아를 구매했다.
더 구경하고 싶었는데 너무 센 냉장고 바람 탓에 도저히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정육 코너에서는 너무 추운 나머지 몸이 덜덜 떨릴 정도였다.
다음 행선지인 유명 해변은 파도가 워낙 잔잔해 수영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수영복 갖고 올걸! 하는 아쉬운 마음이 계속 들었다. 차 트렁크에 수영복이랑 큰 수건을 넣고 다니다가 수영하기 좋은 해변에 가면 바로 갈아입고 놀 수 있게 준비해야 할 것만 같다.
크게 한 것은 없지만 긴 운전에 지쳤는지 배가 고파 근처 맥도널드에서 한 끼 때웠다.
그리고 도시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전망대로 이동해 파란 하늘과 푸른 바다를 감상했다.
바다를 따라 해변 드라이빙을 할 수 있길래 한참 길 따라 운전을 하다 잠시 주차하고 해변가로 내려갔다.
마치 비밀의 해변처럼 한참을 모래 언덕을 오르다 내려가니 해변이 나왔고 정말 거대한 백사장과 넓은 바다에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갑자기 부모님 생각이 나 양가 부모님께 영상통화를 걸어 바다도 보여드리고 한참을 센 바닷바람에 휘몰아치는 파도를 감상했다.
평소 주말과 크게 다를 것은 없었지만, 도심에서 멀리 떨어져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 곳의 이점을 제대로 누릴 수 있었다.
마치 내가 전세 낸 것 마냥 사람 한 명 없는 백사장과 넓은 바다. 다니는 차가 없는 도로에서의 운전.
바다 보고, 점심 먹고, 복숭아 산 것이 전부였지만 자연을 온전이 내 것처럼 즐길 수 있어 특별했던 하루였다.
12월 17일(일)
어제 장거리 운전의 여파인지 무려 9시간 동안 잤다.
이렇게 오랫동안 푹 자 본 게 얼마만인가. 그 간의 피로가 싹 풀리는 기분이었다.
느지막이 아침 먹고 늘 그렇듯 청소하고 세차했다.
이상하게 이번 주에 새가 똥을 너무 많이 싸 놔서 차 지붕이 지저분했다. 말끔하게 닦아내니 내 속이 다 후련.
오후에 남편은 학교 숙제가 많다며 숙제하고 나는 옆에서 그냥 핸드폰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평일에 줄곧 일 하니까 주말에는 회복할 겸 푹 쉬는데 의미 없이 스크린만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지는 것 같다.
짧은 시간이라도 핸드폰을 내려놓고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겠다.
크리스마스, 박싱데이에 쉰다고 말할지 고민이다.
놀러 갈 계획을 세운 건 아니지만, 남들 다 쉬고 노는데 나만 일 하자니 억울한 마음이 든다.
공휴일에 일 하면 돈을 많이 버니까 그건 좋은데..
일단 내일 물어봐야지.
12월 18일(월)
다음 주 월, 화 이틀 동안 가게 문을 닫는 게 확정됐다.
day off 달라고 말하지 않아도 돼서 좋다.
남편에게 얘기했더니 신나서 어디 갈지 찾아본다는데, 비싼 숙박비가 발목을 잡는다.
예산을 확보해 놓았다면 예산 안에서 계획하면 되는데 갑작스러운 여행 계획을 세우려다 보니 정하기 쉽지 않다.
올해 4월 필리핀 보홀 여행 갔을 때는 돈 쓰는 게 하나도 아깝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왜 이렇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까.
이미 우리는 해외여행 중인 거나 마찬가지이고
지금은 향후 2년 간의 성공적인 정착을 위해 돈을 모아둬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여행이 망설여지는 것 같다.
평소에도 돈 쓰는 걸 즐기는 편이 아니기도 하고.
그렇지만 인생이란 게 마냥 일만 하면서 보낼 수는 없고, 작은 추억거리라도 만드는 재미가 있는데 쉬는 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에만 있는 것도 못 할 짓인 것 같다.
나중에 길게 여행 갈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매번 미루고 미루다 지금을 즐기지 못하는 건 아닌지.
깊어지는 고민과 함께 시간은 계속 간다.
12월 19일(화)
새벽 거친 바람 소리에 잠에서 깨 한참을 뒤척였다.
잠든 사람을 깨울 정도의 거친 바람이 요 며칠 계속 불어온다.
아침에 배달이 늦게 와서 손님도 돌려보내고 바쁘게 움직여 겨우 제시간에 모든 것을 마쳤다.
방학인 데다 크리스마스까지 다가오기에 사람이 없을 줄 알았는데, 웬걸. 어제오늘 연달아 너무 바빠 점심시간에는 거의 뛰어다녔다.
포장 손님만 있으면 괜찮은데 먹고 간다는 사람도 종종 있어서 더 바빴던 듯.
오후에는 퇴사한 코워커가 들러서 퇴근 후 같이 근처 해변으로 갔다.
그늘에 앉아서 한참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같이 아이스크림 사 먹고 돌아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오랜만에 봐서 너무 반가웠는데 어차피 목요일에 다시 와야 한다고.
갖고 있던 가게 열쇠 반납을 깜빡해서 목요일에 가지고 온다 한다.
다음 주에 놀 생각을 하니 마음이 급해진다.
얼른 이번 주가 지나가서 빨리 쉬고 싶은 마음인데 아직 화요일이라니. 아직 3일이나 더 일해야 한다고 투덜댔더니 이제 3일만 일 하면 된다고 생각해,라고 한다.
그래 너 말이 맞다. 결국 모든 것은 내 마음먹기에 달렸다.
12월 20일(수)
오늘부터 덜 바빠지는 걸까?
아침부터 고요하고 오후에도 고요했다.
남편은 매주 수요일마다 일찍 끝나는데 친구가 집에 놀러 오고 싶다 했다고 집에 함께 가 있겠다고 했다.
집에 온 손님한테 줄 건 없고 그냥 가게에서 안 팔린 빵 몇 개 챙겨서 퇴근.
매주 수요일이나 목요일에는 남편과 함께 장 보는 날인데 오늘 마침 마트에서 통닭구이를 할인하길래 홀린 듯 구매했다.
집에 와서 가게에서 가져온 콜라와 남아있던 맥주와 함께 치콜, 치맥까지 완료.
내 코워커들도 남편의 친구들도 크리스마스 연휴에 무엇을 할지 아직도 정하지 못했다고 한다.
공휴일에는 가게에 가도 15% surcharge가 붙어 밖에서 커피 한 잔 마시는 것도 쉽지 않을 듯하다.
그 돈 내고 커피 어떻게 마셔.. 밥은 어떻게 사 먹고!
크게 신경 쓰지 않아서 체감을 못 하고 있지만 호주에 코로나 환자가 점점 늘어나는 추세라 한다.
가게 셰프 중 한 명도 일주일 휴가 냈는데 코로나 걸려 휴가 내내 집에만 있었다고.
연휴 끝나면 더 늘어날 것 같은데 가게 오는 손님 중에 코로나 확진자가 있을까 걱정이다.
그나저나 곧 다가올 연휴에 대체 우리는 어딜 놀러 갈 수 있을까.
12월 21일(목)
아직도 목요일이라니!
다음 주 이틀 가게 문 안 열고 쉰다니까 휴가 받은 기분이라 그런지 유독 이번 주가 길게 느껴진다.
돈 못 버는 건 생각도 안 하고..
아침에 전 날 주문한 것들을 받아 정리하는데 뭔가 이상했다.
주문 안 한 재료, 6개를 주문했는데 4개만 도착한 재료 등 어제 내가 작성한 주문서와는 다르게 물건이 도착한 것이다.
알고 보니 화요일 주문서 대로 물건을 보내와야 할 것이 안 오고, 안 와도 될 것이 두 배로 도착했다.
두 배로 도착한 거야 나중에 더 쓰면 되니 상관없지만, 당장 필요한 게 안 온 것은 긴급상황이기에 급하게 셰프에게 sos를 보내 상황을 수습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 올 수록 손님이 줄어들고 있다.
오늘은 어제 대비 손님 수가 많이 줄었지만 한 명 한 명이 대량으로 구매해 매출은 어제보다 늘었다.
같은 건물에 있는 옆 가게는 내일부터 휴무에 들어간가고 하니 내일 길에는 아무도 없을 듯싶다.
마감 즈음에 초등생 남자 손님이 왔는데, 지난번 도넛 하나를 친구들이랑 나눠 먹는 모습이 귀여워 남는 도넛을 무료로 준 적이 있다.
그걸 기대하고 다시 왔던 것 같은데 올 때마다 줄 수는 없지.
그냥 먹고 가면 될 것을 굳이 나에게 와서 도넛 너무 맛있다 고맙다,는 말을 하고 다시 자리로 돌아가더니 한참 뒤에 내가 보는 앞에서 tip jar에 팁을 넣고 가는 것이다.
코워커도 상황을 지켜보더니 말하는 태도나 표정을 볼 때 기대하는 바가 있는 것 같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엽게 보이긴 했다.
그때는 콩알 한쪽도 친구랑 나눠먹으려는 듯 한 그 모습이 좋아 보여 우리 역시 선의로 행동한 것인데,
이번에는 시커먼 속내를 우리에게 들켜버렸다.
매니저가 내일은 안 바쁠 테니 평소 준비하던 것의 반 만 준비하라고 했다.
오전 시간이 많이 안 바쁠 것 같아서 좋다. 그런데 정말 안 바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