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23 주차(23. 12. 22.~23. 12. 28.)
12월 22일(금)
어제 가게에 잠시 들렀던 매니저 왈, 내일은 금요일이고 곧 크리스마스라 손님이 많이 없을 테니 평소 하던 거의 절반만 준비하면 돼.
하지만 그것은 bull shit이었다.
오전 10시 30분경에 쉬고 있었는데 코워커가 사색이 되어 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무려 8명의 할머니들이 방문한 것인데 각자 커피 한 잔씩을 주문하더니 금세 이야기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들어오는 족족 부리나케 커피를 만들었고 코워커가 직접 갖다 줬는데 한 할머니가 나는 이걸 주문한 적이 없다며 돌려보냈다.
그러나 코워커와 나는 분명히 들었다. 그 할머니는 아몬드 우유로 만든 라테를 주문했고, 할머니가 결제하기 전에 코워커가 재차 물어 확인까지 했고 나 역시 제법 큰 목소리로 아몬드 라테 만들겠다, 고 말했기에 코워커와 내가 주문을 잘못 받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렇다면 범인은 단 한 명.
7명의 다른 할머니의 목소리에 묻혀 자기 자신이 무엇을 주문했는지 까먹었다고 밖에 추측할 수 없는 바로 그 할머니인 것이다.
나야 커피 만들고 다시 쉬러 들어갔기에 끝이었지만 직접 커피 갖다 준 코워커는 컴플레인을 직접 받아냈으니 아마 마음이 꽤 불편했을 것이다.
거기다 어찌나 그 할머니들이 시끄러운지 온 가게가 떠들썩했고, 그 할머니들 때문에 다른 손님들도 목소리를 크게 내기 시작해 온 가게가 쩌렁쩌렁하기에 이르렀다. 아, 귀에서 피가 난다는 게 이런 거구나..
불행하게도 코워커의 수난은 아몬드 라테 할머니에서 그치지 않았다.
할머니 손님들 이후 3명의 젊은 여성이 방문했는데, 바게트를 반으로 잘라달라고 주문해 매니저에게 그대로 전달했더랬다.
그런데 매니저가 손님이 3명인 것을 보고 절반이 아니라 3등분을 했고, 코워커가 손님에게 그것을 가져갔을 때는 내가 너한테 반으로 자르라 하지 않았냐,는 볼멘소리를 손님으로부터 들어야 했다.
나라면 하루 온종일 기분이 안 좋았을 수도 있는데 코워커는 생각보다 여러 위기를 잘 넘긴 듯 보였다. 그 속내는 어떨지 모르겠으나..
일이 잘 풀리는 날이 있고, 잘 안 풀리는 날도 있으니까. 몇몇 손님의 컴플레인을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말라는 말로 위로했다.
아무튼 오늘은 안 바쁠 거라는 매니저의 말과 달리 아침부터 정말 많이 바빴다.
웬 손님이 그리 많이 오고, 큰 손 손님들이 많아, 한 명 한 명의 주문을 준비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화장실 갈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빴던 것은 처음인 것 같은데, 썩 좋은 경험은 아닌 듯하다.
내일부터 나는 4일간의 휴가 아닌 휴가에 들어간다.
휴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유급 휴가가 아니기 때문에.. 결국 그냥 돈 안 버는 대신에 일을 쉬는 것뿐이다.
그래도 호주에 와 일을 시작한 이래로 평일 이틀 연속 쉴 수 있게 돼 기쁘다.
비록 계획 한 바가 없어 어디 놀러 가지는 못 하지만, 맛있는 것 사 먹으면서 남편과 여유를 만끽해 보려 한다.
12월 23일(토)
아무리 여행 계획이 없다지만 아무 데도 놀러 가지 않는 것은 아쉽다.
어디라도 떠나자! 는 마음에 지도를 켜 곳곳을 찾아보는데 집에서 1시간~2시간 거리에 있는 웬만한 관광명소는 이미 다녀왔음을 알게 됐다.
하긴, 우리가 호주에 온 지 벌써 꽉 찬 5개월이고 차를 산 지는 꽉 찬 4개월이 다 됐다.
주말마다 차 갖고 여기저기 다녀왔는데 안 간 곳을 찾는 게 더 어렵겠지..
그래도 어찌어찌 구경할 만한 곳을 찾아냈다.
비록 사진만 잠깐 찍는 긴 시간 동안 즐길 거리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대로 집에 돌아가는 게 아쉬워 이전에 들렀던 도시에 다시 들러 공원에 앉아 점심으로 싸 온 샌드위치를 먹기는 했지만
이렇게 연휴 첫날을 잘 보내고 있었는데....
커피 한 잔 하며 그늘 아래서 쉬고 있는데 내 등 뒤로 먼 곳에서부터 한 남자의 큰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가만히 있는데 그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우리 앞에 한 남자가 우뚝 서서 말을 해 오기 시작했다.
아, 애보리진이다. Aboriginal. 호주의 원주민이다.
엄밀히 호주 땅의 주인이지만 영국인들의 박해로 많은 수가 살해당했고, 과거 고난의 대물림으로 경제적 빈곤과 교육의 기회를 제대로 얻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결국 도시 내의 많은 노숙자가 되었고 간혹 그냥 지나가는 사람 아무에게 시비를 걸어 경계해야 할 대상으로 자리 잡았다.
아무튼 제법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인 이 애보리진 남성은 거적때기를 손에 들고 신발은 제대로 신지 않은 상태였다.
남편을 바라보며 At least I speak English better이라는 문장을 반복해 말했다.
그 태도가 제법 aggressive 했는데 피가 거꾸로 쏟는 느낌에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머릿속으로는 저 인간의 뺨에 주먹을 날리는 상상까지 하기에 이르렀는데, 남편이 그냥 잘 달래니 자리를 금세 떴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남편에게 공격적으로 나오는 사람을 보니 심장이 뛰고 사고가 정지했다. 마음 같아서는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는데 남편 왈, 저런 사람은 그냥 빨리 돌려보내는 게 최선이다.
맞는 말이다.
이 나라에서 나는 minority이다. 누구도 나를 보호해 줄 의무가 없기에 나 스스로가 나를 보호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기에 비 정상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 정상인을 대하듯 할 이유가 전혀 없지만,
그 상대가 누구든 내 남편에게 그렇게 행동하는 인간이라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용서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이곳에 있는 동안 문제 상황을 일으켜 좋을 것은 하나도 없으니 앞으로는 그런 상황에서도 조금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대처할 줄 알아야겠다.
꽤 길었던 외출에서 돌아와 낮잠도 자고, 남편이 좋아하는 피자도 시켜 먹었다.
여행 가지 않는 대신 맛있는 것을 많이 사 먹는 듯하다. 결국 그 돈이 그 돈이 아닐는지..
내일부터는 시내 대중교통이 무료다. 시내에 나가 가게에서 일하는 동안 입을 시원한 바지도 사고한 적한 도심을 누려야겠다.
12월 24일(일)
오늘부터 약 한 달간 모든 대중교통이 무료다.
아침에는 늘 그렇듯 집 대청소로 시간을 보냈고 마트가 문 여는 시간에 맞춰 버스를 타고 시내로 향했다.
버스 안에는 사람도 없고, 시내에도 평소보다 사람이 훨씬 적었다.
덕분에 쾌적한 환경에서 필요한 물건도 사고, 근처 공원에 가서 집에서 싸 온 도시락도 먹었다.
공원에 앉아있는 동안 머리가 희끗한 할아버지가 갑자기 말을 걸어왔는데, 가볍게 인사 정도 나눈다는 게 장장 한 시간 동안이나 대화를 하고 있었다.
카페에서 일하면서 얼굴을 익힌 단골손님들과는 small talk을 많이 하지만 처음 보는 이와 이렇게 길게 이야기를 나눈 건 처음이었다.
재미있는 경험이었던지라 다른 글에 정리해 복기해 봐야겠다.
장장 한 시간에 걸친 이야기가 끝나고 오랜만에 소주가 그리워 근처 한인마트에서 소주를 구매했다.
보통 소주라고 해서 구매했지만 사과 향이 첨가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아마 알코올 향이 나는 진짜 소주라면 그 어떤 외국인도 소주를 마실 엄두조차 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과일 향으로 알코올 향의 거부감을 줄이기 위함이지 않을까..
사과 향이 나지만 소주의 묵직함은 그대로였다.
내일은 바닷가에 가서 물놀이를 해 보려 한다.
호주 와서 바다 구경은 많이 했어도 몸을 물에 담그고 논 적은 없다. 모래사장에 내 짐을 누가 훔쳐갈까 걱정되고, 수영을 잘하는 편이 아니라서.
그래도 요 며칠 더운 날씨에 바닷물에 몸을 담그고 싶은 욕구가 많아졌다. 호주에 있는 내내 바다에 발만 담그기도 아쉽고.
어차피 사람들 많이 놀러 가서 바다도 꽤 한적할 테니, 신나게 놀아보자.
12월 25일(월)
공휴일 알람 울리지 않기 설정을 안 해 놨더니, 새벽 5시에 알람이 울렸다. 쉬는 날인데 손해 본 기분.
물놀이하려면 아침 든든히 먹어야지. 계란, 식빵 야무지게 먹고 물놀이 후 먹을 간식까지 준비 완료했다.
이제 남은 것은 한국에서 가져온 래시가드만 입으면 되는데... 이런! 래시가드 하의는 있는데 상의는 없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래시가드 하의는 운동할 때 입을 것이니 챙기고 상의는 필요 없다고 생각해 버리고 온 것이었다.
입을 일 없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정말 알 수 없다.
하지만 래시가드 상의 없다고 물놀이를 안 할 수는 없다. 대충 반팔 아무거나 입고 출발.
가는 길에는 차가 없길래 한가할 거라 생각했는데, 세상에 바다에서 꽤 먼 주차장이 벌써 만차인 것이 보였다.
이러다 주차할 데 없이 뱅뱅 돌기만 하는 거 아니야? 했으나, 우리 남편은 러키가이. 마침 나가는 차를 발견해 빈자리를 냉큼 차지했다.
해변에는 벌써 엄청난 사람이 모여있었다. 호주 와서 사람 이렇게 많이 모인 거 정말 처음이다!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왔나 보다.
크리스마스라고 산타 모자를 쓰고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있었고, 캠핑 온 것처럼 텐트부터 간이 식탁, 의자까지 갖춘 사람도 있었다.
그에 비해 우리가 들고 온 것이라곤 두 개의 비치타월과 여분의 수건뿐.
훔쳐갈 것도 없으니 걱정할 것도 없다. 그냥 모래 바닥에 비치타월과 신발을 놓고 바다로 돌진했다.
바닷물은 생각보다 차가웠지만 물속에 한참을 있으니 괜찮았다. 파도에 머리가 젖기 전까지는 말이다.
물이 정말 맑아 얕은 물에서 돌아다니는 물고기도 보았다. 다음에는 스노클링 할 때 쓰는 물 안경을 갖고 와야겠어.
수영을 하는데 여기저기 사람이 많아 전진하기 쉽지 않았다. 게다가 간헐적으로 오는 높은 파도는 분명 즐길거리였지만 수영하는 데 썩 좋은 조건은 아니었다.
깊은 바다에서 드문드문 수영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파도의 영향도 사람으로 인한 진행 방해도 안 받기 때문에 깊이 들어가 수영하는 듯했다. 수영에 자신도 있겠지. 그래도 나는 발이 안 닿는 곳에서의 수영은 아직 무섭다.
한참을 놀다가 잠시 쉴 겸 해변으로 나왔는데 평소라면 뜨겁다고 생각했을 햇 빛이 웬일로 따뜻하게 느껴졌다.
차가운 바닷물에 홀딱 젖은 몸이 햇빛을 따스하다고 느꼈으리라.
머리가 젖어서 그런지 몸이 금방 차게 식는 느낌이었다. 몸은 비치타월로 감싸고 있지만 머리는 어떻게 손 쓸 방도가 없었다.
그렇다면 다시 물에 들어가면 안 춥겠지. 다시 바다로 돌진!
높은 파도가 올 때 It's coming!이라고 소리 내고 파도를 맞으며 깔깔대는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와 함께 한참을 놀았더니
벌써 두 시간 가까이 시간이 지나있었다. 사실은 뜨겁지만 따뜻하게 느껴지는 햇빛 아래에 잠시 누워있다가 물에 젖어 무거운 몸을 이끌고 차에 올라타 귀가했다.
샤워하며 온몸에 묻은 모래를 털어내고 거울을 봤는데 세상에 햇빛에 노출됐던 팔과 얼굴이 새카맣게 타 있다!
분명 선 크림도 두둑하게 발랐는데 이게 무슨 일이지?! 워터프루프가 아니라 소용없었던 걸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두 시간 동안 햇빛 아래에 있었다고 이렇게 타는 건 너무하잖아... 강력하다는 호주 햇빛 늘 조심하려고 하는데 너무 신나게 놀던 나머지 피부 보호에 미처 신경을 많이 쓰지 못했던 듯하다.
어쩐지 우리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한참 동안 선크림을 온몸 구석구석 여기저기 듬뿍 바르더라니.. 남들이 괜히 그러는 게 아니다.
피부 탄 거야 어쩔 수 없으니 허기 진 배를 달래기로 했다. 메뉴는 라볶이.
원래 물놀이 다녀오면 라면 먹는 게 진리다. 육개장 사발면이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없으니 집에 있는 라면에 떡으로 대체한다.
라볶이 국물까지 싹싹 긁어먹고 배 두드리며 책 읽다가 낮잠까지 자고 체력 충전 완료했다.
호주에서의 첫 물놀이 너무 즐거웠다. 물놀이 자체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는 이들의 행복한 웃음소리와 그 분위기에 더 좋았다.
매주는 아니더라도 종종 더운 날 남편과 물 놀이 하자고 약속했다. 물이 맑으니 다음에는 정말로 스노클링 안경을 들고 물속 물고기를 좀 더 가까이 볼 수 있을 것이다.
12월 26일(화)
아, 내일 다시 출근이라니.
꿈만 같았던 4일간의 휴식이었다.
크리스마스를 고점으로 가장 더웠던 날씨가 오늘부터 다시 선선해진다.
집에만 가만히 있기는 아쉽고 멀리 가기에는 내일 아침 오랜만에 일찍 일어나야 하는 게 부담 돼 가까운 공원에 잠시 산책 다녀왔다.
그동안 더운 날씨 탓에 어디를 가더라도 최대한 적게 걸었는데 오랜만에 한 시간 가까이 걸으니 몸이 한 결 가벼워진 듯했다.
산책 후에는 마트에 다녀왔다.
깐 마늘이 필요한데 파는 곳이 몇 군데 없어 먼 길 돌아 찾아갔는데 휴일의 여파인지 야채 매대 대부분이 텅 비어있어 빈 손으로 돌아왔다.
휴가 기간에는 사람도 없고 파는 물건도 없구나. 괜히 Long Holiday라고 불리는 게 아니었다.
아쉽지만 마늘은 필요할 때 직접 까서 쓰기로 하고, 집에 와서는 밀린 빨래를 하고 침대에 누워 하염없이 시간을 보냈다.
이렇게 의미 없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서.
12월 27일(수)
지난 5개월 동안 몸이 적응한 건지 나흘 만에 새벽 5시의 기상이었지만 아무렇지 않았다.
다음 주까지 방학인 남편은 잠옷 바람으로 출근하는 나를 배웅해 줬다. 평소 같으면 학교 갈 준비 하느라 화장실에서 이 닦는 중이었을 텐데.
오랜만의 출근길은 한산했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길로 출근하기 때문에 매일 아침 도로 상황을 꿰뚫고 있는데 웬만한 신호는 대기하지 않고 바로 통과!
확실히 출근하는 사람이 적어졌다는 게 실감 났다. 나만 출근해 나만!
매일 오전 커피를 픽업하는 단골손님들은 근처 회사 직원들인데, 회사가 약 2주간 휴가에 들어가 그들 없는 조용한 아침 시간을 보냈다.
늘 보던 사람들이 안 보이니 아쉽기도 했지만 할 일 많은 오전에 온전히 일에 집중할 수 있다는 점은 좋았다.
코워커랑 한참을 수다 떨었는데 세상에 나이 차이가 꽤 나는 언니, 오빠가 있다고 한다.
막내였다니. 그래서 네가 그렇게 귀여웠구나.(실제로도 정말 귀엽다)
가게를 제외하고 바깥 활동을 거의 안 하는데, 본국에서 엄마가 놀러 오셨다고 했다. 약 3주 정도 머무를 계획이시라고.
언니, 오빠는 결혼해서 출가했고 막내도 일 하겠다고 해외로 나왔으니 엄마가 많이 외로워하셔서 이왕 휴가 시즌을 맞이해 여기저기 모시고 구경할 거라고 했다. 효녀네 효녀.
이렇게 재밌는 이야기 한창 나누고 있는데, 점심시간이 다 될 무렵부터 갑자기 손님이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얼굴이 많아서 무슨 일인가 했더니, 주변 가게가 전부 문을 닫아 우리 가게로 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좋은 건가? 사실 내 사업이 아니기 때문에 좋고 나쁘고 따질 필요는 없다. 굳이 따져야 한다면 나한텐 안 좋지.. 바쁘니까..
가족 단위로 오는 손님들이 많아, 한 팀 한 팀 주문이 단체 주문 같은 느낌이었다. 어찌나 힘들던지.
날씨가 덥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 정도 난이도에 날씨까지 더웠다면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주문받았을 거다.
다행히 오후 2시부터는 사람이 없어서 빨리 마감하고 남편이 기다리고 있는 집에 돌아왔다.
집에 누가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급해진다. 더군다나 하루 종일 혼자 있었을 남편을 생각하니 집에 빨리 가고 싶다는 생각이 하루 종일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번 주는 수, 목, 금 3일만 일 하면 된다. 그리고 1월 1일, 월요일에 하루 더 쉰다. 3일 일 하고 3일을 쉴 수 있다니.
국경일이 많이 없는 호주에서 크리스마스, new year's day가 주는 달콤한 휴식이 너무 반갑다.
12월 28일(목)
코워커가 4월에 친구들과 한국 여행 계획이 있다고, 서울에서 즐길 거리를 추천해 달라고 했다.
잘 모르지만 실컷 아는 척했다. 내 나라에 대해 내가 모르면 누가 알겠어.
3월 말에 영어학원 코스가 끝나서 보름 정도 동아시아 4개국 정도 여행을 할 거라고 한다. 멋진 계획인데 보름은 동아시아를 즐기기엔 조금 짧은 시간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나에게 한국 여행에 대해 물어본 외국인 친구들은 한국어를 할 줄 알 정도의 관심이 있었기에 내가 세심하게 정보를 알려주지 않아도 스스로 한국 여행을 계획할 정도였다.
코워커는 한국에 대해서는 드라마(천국의 계단, 겨울연가 정도)가 전부이기에 도저히 어디서부터 서울의 어떤 곳을 소개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다.
우리나라 볼 것, 즐길 것, 먹을 것, 놀 것 정말 많은 나라인데 한정된 시간 안에 그 많은 것을 다 소개할 수도 없고, 내가 같이 가는 것도 아니니까 한국 사람만 아는 것을 알려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내 나라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내 나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0부터 설명하려니 막히는 느낌이다.
한국으로 여행 다녀온 외국인 유튜버 영상을 참고하는 게 지금으로선 최선인 듯하다.
어제보다 더 바쁜 오후 시간을 보내고 여전히 손님으로 가득 찬 가게를 보며 청소는 언제 하고 집에는 언제 가나, 한숨을 쉬는 와중에 전에 같이 일했던 코워커가 가게 열쇠를 돌려주러 왔다.
곧 들린다고 문자 보냈던데 너무 바빠서 도저히 핸드폰을 들여다볼 새가 없었다. 시간이 있었다면 끝나고 차 한 잔 하면 좋았을 텐데 남편과 장 보러 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던 터라 근처 역까지 태워다 주는 차 안에서 짧은 대화를 나눴다.
꽤 심각한 표정으로 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담담하게 꺼냈는데, 최근 호주 정부가 발표한 강화된 학생비자 규정으로 인해 코워커가 차근차근 쌓아왔던 계획이 모두 물거품이 되었기 때문이다.
무려 5개의 유학원과 상담을 했는데 코워커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돈을 요구로 하는 선택지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풀이 죽은 목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운전에 집중하느라 말도 제대로 못 했고 5분이라는 시간은 이런 이야기를 나누기에 너무 짧았다.
다음 주에 다른 유학원과 상담이 잡혀있다는데 크게 기대는 하지 않는다고 한다. 포기하지 말라고 하고 싶었지만, 자신의 현 상황에 대해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을 코워커에게는 크게 와닿지 않을 말이기에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고국에 돌아가는 걸 결정하게 되면 알려주겠다고 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헤어질 수밖에 없는 걸까 라는 생각에 허탈했다.
어떤 말로도 위로를 할 수 없는 이 상황이 참 안타까울 뿐이다.
우리끼리 머리 맞댄다고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없으니 건네는 위로의 말도 결국 스쳐 지나가는 말 뿐이라는 생각에 선뜻 메시지를 보내기 어렵다.
기운 없는 표정, 목소리를 바로 알아차리기에는 나도 오늘은 너무 지쳐있었다. 그녀의 모습이 며칠간 잔상으로 남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