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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쿡크다스 Jan 07. 2024

호주에서 맞이한 2024년

호주 24 주차(23. 12. 29.~24. 1. 4.)

12월 29일(금)
어제 말 그대로 미쳐버릴 정도의 바쁜 하루를 보낸 여파인지 피곤한 하루였다. 사실 요 며칠 새벽에 깨는데 보통 때와 달리 어제는 한참을 잠 못 들고 뒤척였다. 카페에서 일 한 이후 오른손 약지 마디가 건조하고 가렵고 가끔 죽은 피부가 벗겨지는데, 요 며칠 새벽에 깰 때마다 간지러워 아플 정도로 긁어야 성에 찬다. 병원을 가면 되지만 미련하게 참는 이유는 병원비가 비싸기도 하고 무엇보다 나는 이 나라의 의료 수준을 믿지 않는다. 여기서 1년 내내 병원 다녀도 낫지 않던 습진이 한국 가서 주사 한 방에 다 나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로는 더더욱. 이 놈의 손가락이 나를 언제까지 괴롭힐는지 두고 봐야겠다.

오늘은 어제와 달리 하루종일 한가해 코워커와 오랜만에 여유 있는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매일이 이러면 좋겠다고 즐기던 것도 잠시, 어디선가 나타난 이상하고도 이상한 손님으로 우리는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 손님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따로 다뤄보겠다. 다른 가게가 문을 다 닫아서 우리 가게에 처음 오는 손님들이 많은데 그 많은 사람들 속에 weirdo가 들어있을 줄이야. 걱정하고 긴장했던 수 십 분이 영겁의 시간처럼 느껴질 때쯤 손님은 자리를 떴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사람을 상대하는 최선의 방법은 해달라는 대로 해주고 빨리 내보내는 것이라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

앞으로 3일 동안 쉴 생각에 마음이 여유롭고 기분 좋다. 조만간 지점 간 인사이동이 있을 것 같은데 내심 기대된다. 한 곳에서 일 한 지 벌써 6개월 차에 접어들었다. 조금은 변화를 주어도 될 시기이지 않을까.

12월 30일(토)
실감 나지 않지만 2023년이 이틀만 남았다. 한 해가 간 다는 게 피부로 와닿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지만, 가장 큰 이유는 계절일 것이다. 늘 추웠던 연말이 올 해는 40도에 육박한 더운 여름이라는 게 심리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믿기지 않는다. 연말 분위기에 설렌다거나 내일이 희망찬 기분도 들지 않는다. 설렘은 매 년 나이 들어감에 따라 점점 더 무뎌진다.
 
오늘도 그런 하루 중 하나였다. 달력을 보며 벌써 12월 30일이야?라고 놀라긴 했지만 그렇다고 연말을 기념할 특별한 일은 하지 않았다. 바다 보러 가고 필요한 물건을 사고 집에 돌아와 낮잠을 자고 맛있는 저녁을 해 먹는, 똑같은 하루. 
 
인생은 유한적인데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평범한 날들이 많아지는 게 걱정될 때도 있다. 정해진 시간 안에 많은 것을 해야 이득, 살아있는 동안 더 많은 것을 보고 즐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 나에게 '그렇게 보고 즐기면 더 행복할까?'라고 반문하면 선뜻 '맞다'는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즐거움을 느낀다고 해서 내가 똑같이 즐겁고 행복하다는 보장은 없다. 내가 행복을 얻고자 하는 지점, 행복을 느끼는 지점이 남들과 다르다고 해서 그것을 손해라고 느낄 필요는 없다. 오늘 내 하루가 지극히 평범한 하루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쉽지 않은 이유는, 그 과정에서 내가 행복했고 즐거웠기 때문이다. 내일도 모레도 별 다를 거 없는 하루가 되겠지만 행복하다면 그걸로 됐다.

12월 31일(일)
한 주의 마지막이자 한 해의 마지막 날이다. 사실 덤덤하다. 그 어떤 날보다 많은 변화가 있던 1년이었지만 잘 살기 위해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왔던 것은 변함없었다. 살고 있는 장소가 호주로 바뀌고 하는 일이 바뀌었지만 내가 사랑하는 남편과 맛있는 저녁을 해 먹고, 주말엔 차 타고 나가 시간을 보내는 그 일상은 그대로다.

그렇지만 나 자신은 많이 바뀌었다. 살고 있는 환경의 변화는 몸과 마음에 변화를 가져왔다.
나는 더 이상 스트레스로 인한 체중 감소를 겪지 않는다. 눈물을 쏙 뺄 만큼 감성에 젖게하는 발라드 음악을 더 이상 듣지 않는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다. 남편에게 나 없어도 잘 살 수 있냐고 묻지 않는다. 힘든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을 위한 자기 계발서나 에세이를 더 이상 읽지 않는다. 이런 것들로부터 해방되며 나의 정신은 더 건강해졌다. 멘탈이 단단해졌는지는 모르겠으나 정신이 맑아졌음은 확실하다.
 
호주에 오지 않았더라도 행복했을 수 있다. 그 삶에 만족하면서 버티고 버텨내 남편과 행복하게 살았을 수 있다. 그렇지만 이곳에 와서 내게 생긴 변화에 나는 정말 만족한다. 내가 이렇게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또 다른 나 자신을 알게 됐다. 인생에는 여러 방향이 있고 많은 갈래 중 하나를 선택한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방향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고로 한국에 있었다면, 이라고 가정하며 한국에서의 생활을 상상해 보는 것은 지금 내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앞으로도 나는 내가 선택한 호주라는 갈래에서 최선을 다 해 살아갈 것이다. 그것이 내가 선택한 내 인생에 대한 책임이고, 호주행을 선택한 과거 나 자신과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1월 1일(월)
아침 일찍 공원에 다녀왔다. 새해 첫날이라 그런 건지, 운동하는 사람이 평소보다 많아 보인 것은 기분 탓일까? 간밤 불꽃놀이를 구경하며 사람들이 이것저것 먹고 간 흔적이 눈에 띄었다.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 불꽃놀이가 시작하기를 오래 기다렸을 그 마음은 어땠을까. 설레고 즐겁고 한편으로는 한 해를 보낸다는 생각에 마음이 먹먹했을 수도 있겠다.
 
비교적 덥지 않은 날씨에 가만히 벤치에 앉아 남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갈색 강아지를 데리고 맨발로 산책 나온 머리 긴 여성이 나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모르는 사람과 가볍게 인사하는 경우가 왕왕 있어서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받았는데, 잠시 뒤 우리가 자리를 뜨려고 하니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다. 요지는 우리가 앉아있던 벤치 뒤 나무가 너무 멋있는데 우리 둘의 사진을 찍어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내 핸드폰으로 찍어준다는데 솔직히 핸드폰 훔치는 수작을 부리는 건가 싶어 잔뜩 경계하고 있었다. 하지만 강아지 목줄까지 손에서 놓고 진심으로 사진을 찍어주려고 하는 모습에 경계심을 조금 풀고, 그녀가 하라는 대로 자리를 잡아 몇 장 사진을 찍었다. 결과물은 꽤나 멋있었는데 웅장한 나무를 그녀가 사진에 잘 담아줬다. 그러고 보니 늘 서로의 사진만 찍어줬지, 둘 다 한 장의 사진에 담긴 적은 셀카를 제외하면 거의 없다. 굉장히 자유로운 영혼의 모습을 하고 있던 이름 모를 그녀 덕분에 실로 오랜만에 둘이 함께 피사체가 되어보았다.
 
지금 그 상황을 복기해 봐도 얼떨떨하고 꿈을 꾼 것 마냥 느껴진다. 내가 사진을 부탁하는 경우는 있어도, 풍경 예쁘다고 남의 사진을 찍어주겠다는 사람은 흔치 않으니까. 아마 새해를 맞이해 그녀의 기분이 상당히 좋아 모든 것이 다 아름다워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아시안 커플의 모습을 사진에 꼭 담아주고 싶었던 만큼.
 
내일부터는 다시 반복적인 일상의 시작이다. 지난주에도 그랬지만 남편하고 푹 쉬니 일하러 가는 게 싫다. 더 쉬고 싶다.
 


1월 2일(화)
월요일 같은 화요일이다. 오랜만에 출근한 가게에는 매니저와 보스가 와서 한참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몰래 옆에서 주워들으니 운영하는 가게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비자 사정으로 그만두거나 근무지를 옮겨야 해 골치 아프다는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직원을 재 배치 하는 과정에서 내가 가게를 옮기기로 매니저와 얘기를 끝내 굉장히 좋아하고 있었는데, 보스가 나는 무조건 여기 남아야 한다고 못을 박아버렸다. 
 
이곳에서 일 한지 벌써 6개월이 다 되어가고, 제일 오래 일 했던 직원이 지난 11월 부로 퇴사했기에 내가 졸지에 시니어 직원이 됐다. 일도 익숙해졌고, 단골손님들과의 친분도 제법 쌓았기에 계속 다녀도 상관없다는 입장이지만, 익숙함이 동반한 지루함을 요즘 느끼고 있다. 익숙해서 좋은데 반복적이니까 새로운 변화를 갈구하게 된달까. 그래서 매니저가 제안했던 다른 가게에 가고 싶었는데, 엄한 표정으로 여기 남으라는 보스 앞에서 차마 여기서 그만 일 하고 싶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울상이 된 내 얼굴을 보더니 매니저가 보스의 눈을 피해 '보스가 사업 확장 때문에 경력 직원을 계속 데리고 싶어 해..'라고 소곤소곤 말했지만 크게 위로가 되진 않았다. 사업 확장이 내 사정은 아니잖아... 입 밖으로 내뱉지 못 한 그 말..
 
새해 초부터 나의 거취에 대해 가게에서 말이 많다. 내일 다른 가게에 일 하러 가는 코워커가 새로 듣는 얘기가 있으면 공유해 주겠다고 했다. 결국 보스가 하라는 대로 해야겠지만 그래도 궁금한 건 참을 수 없다.
 
내일 벌써 수요일이다. 크리스마스와 새해 연휴가 끝나가 슬슬 바빠지려는 기미가 보인다. 모두가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고 있다.
 
1월 3일(수)
새벽 내내 세차게 부는 바람 소리에 자다 깨다를 반복 했다. 창문 떨어져 나갈 것 마냥 세게 부는 바람이 무섭기까지 했다. 어제 모든 게 예전 일상으로 돌아갈 것 같다고 짐작했던 대로 오늘은 휴가로 꽤 얼굴을 보지 못했던 많은 단골손님들이 가게에 찾아왔다. 반갑게 인사하며 크리스마스는 어떻게 보냈는지 간단히 얘기 나누고, 반가운 마음에 잘 안 팔리는 도넛 하나씩 줬더니 아주 좋아했다.
 
오늘은 하루가 유독 길게 느껴졌다. 지난 일주일 동안 여유로웠던 가게 흐름에 익숙해진 건지 조금 바쁜 흐름에 적응 못 하고 허둥지둥 댔다. 인간은 역시 적응의 동물인가 보다. 그 짧은 시간 동안 편한 환경에 몸이 금세 적응해 버렸다. 이전에 한창 바쁘게 일했던 때가 기억나지 않는다. 도대체 그 매출을 낼 때는 어떻게 일했던 거지?
 
한편 다른 가게에 일하러 간 코워커로부터는 특별한 소식은 없었다. 내가 다른 가게에 갈 확률은 더 작아졌고, 그녀가 오픈과 마감을 혼자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할 것 같다는 내용뿐. 사실 우리에겐 선택지가 없다. 매니저와 보스가 우리의 의견은 물어볼 수 있지만 그저 물어볼 뿐, 결정은 그들이 하기 때문에 내 의견이 결정에 영향을 줄지는 미지수다. 
 
새해 첫 주부터 참 다사다난하다. 아무튼 어젯밤에 잘 못 잔 만큼 오늘은 푹 자고 내일은 좀 더 활기차게 보내도록 해야지.
 
1월 4일(목)
못 잔 만큼 푹 자려고 했는데 바람 소리 시끄러워서 또 한참을 못 잤다. 오늘은 유독 바쁘지 않은 날이어서 체력적으로는 힘들지 않았지만 정신적으로 또 다른 고비를 맞이한 하루였다. 
 
예상대로 나와 같이 일했던 코워커 중 한 명은 다른 지점으로 가게 됐다. 이번 주 화요일이 그녀와의 마지막 근무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이렇게 갑작스러운 이별이라니. 소식을 듣고 조금 슬퍼졌다. 여기서 문제는 그녀의 자리를 대신해 새로운 직원이 올 예정이라는 것이다. 이제 막 모든 일과가 안정적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또 새로운 사람을 다시 교육하고 익숙해질 시간 동안 고생할 게 뻔히 보이는 내 모습에 여간 스트레스를 받는 게 아니었다. 나 정말 힘들다 힘들어. 당장 다음 주부터 바빠질 텐데 하필 이럴 때 새 직원이라니 앞이 캄캄할 뿐이다.
 
호주에서 풀타임으로 일 할 수 있는 외국인 중 상당수가 워킹홀리데이 비자인데 동일 직장 근무 기간을 6개월로 제한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자주 발생한다고 한다. 매니저가 매 3개월에 한 번씩 사람을 뽑아야 그나마 가게가 굴러간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너희가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이미 벌어질 일이고 내게 선택지가 없기 때문에 주어진 상황에서 일은 하겠지만 마음이 불편한 것은 사실이다.
 
오늘부터 새 가게로 발령받은 코워커는 오픈과 마감을 혼자 하게 돼 너무 힘들다고 했다. 아무리 작은 규모라고 할지라도 오픈, 마감 때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걸 혼자서 하게 두다니. 급여라도 더 받아야 할 것 같은데 급여 올려주는 건 고사하고 이번 주 주급이 안 들어온 것부터가 문제다. 모두가 급여를 못 받았는데 휴가 기간이라 회계 담당 직원이 어딜 놀러 간 건지 페이슬립조차 받지 못했다. 놀더라도 일은 하던가 아니면 업무 대행 지정을 해야 할 거 아냐. 너무 오래 급여가 밀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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