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26 주차(24. 1. 12. ~ 24. 1. 18.)
1월 12일(금)
마감 두 시간 전에 하루 매출의 80%에 해당하는 손님이 몰려와 정신없었다. 오전에는 심심할 정도로 조용하더니 오후 돼서 몰려오는 바람에 일이 더 힘들게 느껴졌다. 금요일이라 청소할 것도 평소보다 많았는데 어찌나 바쁘던지..
마감 한 시간 전에는 전에 같이 일 했던 코워커가 잠깐 들렀다. 근처 볼 일이 있었는데 생각나서 한 번 왔댔다. 지난번 보다 표정이 훨씬 좋길래 요즘 어떻게 지내냐 물었더니 비자 문제가 잘 해결되어 간다고 했다. 호주에서 더 오래 지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려면 할 일이 너무 많아 일주일 내내 스케줄이 꽉 차 있다고 했다. 좋은 소식을 들은 것도, 그녀가 희망 차 보이는 것도 다행이었다. 같이 동고동락 한 기간은 고작 4달 정도지만 거의 매일 만난 꼴이라 정이 많이 들었는데, 같은 도시에 있다면 언제든 만나고 싶을 때 만날 수 있으니까.
부리나케 마감하고 집에 와서는 도저히 저녁 할 기운도, 입맛도 없어서 대충 빵으로 저녁을 때웠다. 아참, 오늘 오전에 트라이얼 하러 한 명 왔는데 나와 코워커 모두 그 친구가 마음에 들었다. 매니저에게 얘기하기는 했지만 지난번 일도 그렇고 내 의견은 전혀 반영하지 않을 것 같아 불안하다. 너 마음대로 할 거면 내 의견은 대체 왜 묻니..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니까 주말 동안은 잊고 지내보려고 한다.
1월 13일(토)
오늘은 아침 일찍 한인마트에 장 보러 다녀왔다. 김치가 떨어진 데다 오늘 수육을 해 먹으려는데 된장이 없어서 겸사겸사 갔다. 별거 담지 않았는데 금액이 꽤 나왔다. 두고두고 몇 달을 먹을 것들이라고 위로하면서 눈물을 머금고 결제했다.
한인마트 다음 목적지는 버닝스bunnings라고 창고형 철물점이었다. 거실 전구 사러 갔다가 선풍기까지 샀다. 에어컨 틀기엔 춥고, 창문만 열기에는 시원하지 않을 때 선풍기가 필요해 하나 장만했다. 저렴한 거라 튼튼해 보이지 않지만 확실히 있으니까 정말 좋다.
오늘 저녁은 대망의 수육. 돼지 잡내 잡기 위해 된장을 덕지덕지 바르고 인스턴트 팟에 야채 넣고 버튼만 누르면 완성이다. 한인마트 근처 보틀샵에서 구매한 소주와 함께 든든한 한 상 완성. 수육 좋아하지 않는 남편도 맛있게 많이 먹었다.
날씨가 더워 오전에 마트 외출이 전부였다. 하루 종일 에어컨 틀고 있을 정도로 바깥 열기가 너무 뜨거운 하루. 이게 호주의 여름이구나, 실감하고 있다.
1월 14일(일)
지금까지는 아무리 더워도 밤새 에어컨을 튼 적이 없는데, 지난밤에는 에어컨을 밤새 틀고 잤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빛이 왜 그렇게 뜨거운 건지, 하루 종일 블라인드로 햇빛을 가려야 했다.
일요일은 늘 그렇듯 대청소하는 날이다. 세차까지 하려는데 햇빛이 너무 뜨거워 저녁 먹고 늦게 세차했다. 정말 햇빛 아래 있으면 타 죽을 것 같다. 한국 여름도 이랬나? 호주 여름 햇빛은 뭐랄까... 불 앞에 있는 느낌이다. 금방이라도 화상 입을 것 같이 뜨겁다. 한국의 여름은 습해서 힘들었는데 호주의 여름은 불 같이 뜨거워 힘들다. 에어컨이 제습의 역할보다 뜨거운 거에 덴 피부를 식혀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여기나 저기나 에어컨 없으면 살기 힘들다.
문을 열어놓은 적이 없는데 오늘만 벌써 두 마리의 모기를 잡았다. 한 마리는 피를 빨았는지 빨간 핏자국과 함께 저승행. 우리 집 벽은 다 하얀색인데 그래서 그런지 모기가 아주 잘 보인다.
그리고 다음 주 로스터가 나왔고 어김없이 나의 의견은 반영되지 않았다. 말을 해도 달라지는 게 없으니 그냥 대놓고 말했다. 금요일에 트라이얼 왔던 애가 더 괜찮았고, 나는 그렇게 arrogant 한 애를 트레이닝시킬 자신이 없다고. 그랬더니 답이 없다. 코워커한테는 뉴 스태프가 있으니 내일 오전 두 시간만 나오라고 해서, 코워커가 두 시간 일 할 거면 안 하겠다고 문자 보냈다고 한다. 그녀도 답장은 못 받은 상태다. 말을 해도 달라지는 게 없지만 말을 하는 게 내 속은 편하다. 속이라도 시원하게 할 말 다 하고 살아야지.
언제 연락이 올지 모르겠지만 기대도 안 한다. 두고 보자.
1월 15일(월)
지난밤 셰프에게 보낸 코워커와 나의 문자는 철저히 무시당한 채 월요일 아침이 밝았다. 기필코 결단을 내린다는 각오로 출근을 하고 셰프와 면담을 할 수 있었다. 손이 빠른 사람이 필요하고, 자기 고집대로 하려는 사람을 적절하게 트레이닝하기 어렵다, 자꾸 트레이닝시키고 다른 지점 보내려고 하는데 너무 힘들다, 트레이닝하는 것 내 일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일 다른 사람 보낼 거 아니면 난 일 못 한다, 여기 있는 모두는 트라이얼 하고 일하기 시작했는데 트라이얼도 없이 바로 로스터에 꽂는 거 공정하지 않다, 지난주 금요일에 트라이얼 했던 건 아느냐, 진짜 괜찮았다고 말했는데 어차피 마음대로 할 거면 내 의견은 매번 왜 묻냐, 난 진짜 내일 다른 사람 없으면 일 못 한다 진심이다.
일 하면서 단 한 번도 불만 제기 한 적 없는데 악에 받쳐서 얘기를 하니 당황한 건지 해결책을 찾아보겠다고 하며 돌아갔다. 내가 면담하는 동안 코워커가 새로운 직원에게 몇 가지 알려줬는데, 나중에 나에게 이야기로는 비효율적으로 일을 한다고 했다.
오후에 마침 보스가 들렀길래 사실대로 모든 걸 다 이야기했고 결국 마감하고 내일 새로운 직원을 보내겠다고 했다. 그런데 또 두 명만 일 하라고 하길래 못 한다고 학을 떼면서 얘기했더니 그러면 코워커에게 내일 출근할 수 있는지 물어보랜다. 네가 하면 되잖아?라고 하니, 로스터 바꿔달라는 건 너니까 네가 얘기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진짜 열받았지만 아쉬운 건 나니까 참았는데 다음에 하는 말이 더 가관이다.
아침이랑 점심에 바쁘니까 오전에 두 시간, 오후에 두 시간 하는 건 어떠냐고 물어볼래?
출근을 두 번 하라는 소리인데 말인가 방귀인가 싶었다. 너 같으면 하겠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지만 순화해서 NO라고 할 것 같은데 물어는 보겠다고 했다. 코워커는 당연히 그렇게는 못 하겠다고 했다. 오며 가며 시간 버리는 게 얼마인데, 그렇다고 가게에 가만히 앉아있을 수도 없고. 그렇게는 안 한단다 그리고 코워커 없이 나 혼자는 못 있는다, 고 못 박으니 결국 오전부터 오후까지 같이 있는 걸로 결론이 났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속이 뒤집히는 하루였지만 좋은 결과를 끈질기게 얻어내서 다행이다. 내일은 좀 마음 편하게 있어도 되겠지.
1월 16일(화)
세 명이 일 하니 참 편하다. 쉬는 시간에도 마음 편히 쉬는 데만 전념할 수 있다. 아침부터 부지런하게 새로운 직원 트레이닝을 하는데 생각보다 잘 따라왔다. 메모하는 습관이 있는 걸로 보아 글로 정리해서 주면 시간 별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본인이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그 어떤 트레이닝보다 난도가 높은 실전이었을 거다. 첫 시작이 어려웠으니 내일, 모레는 더 쉽게 느껴질 거라는 말이 위로가 되려나.
날씨도 너무 덥고 손님도 많아서 힘들 법도 하지만 새로운 직원은 열심히 일 했다. 처음부터 너무 텐션 올리면 금방 지쳐서 못 하겠다고 할 까봐 걱정이긴 한데, 호주 도착한 지 두 달이 다 되어 갈 동안 일을 못 구해서 꽤 절박한 상황이었다고 했다. 기회가 왔으니 놓치지 않을 거라고.
내일도 다행히 세 명이서 일 한다. 조금 덜 바쁘기를 바란다. 제발!
1월 17일(수)
오늘 하루종일 보스가 가게에 상주하는 통에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가게 인테리어며 샌드위치 레시피를 바꾸려고 하는데, 일을 못 하게 자꾸 한 명을 붙잡고 놓아주지를 않는 거다. 그리도 그 붙잡힌 사람이 나였다.
손님이 있거나 말거나 붙들고 자기 하고 싶은 말 하고 레시피 구상한다고 온 주방을 쑥대밭을 만들어놨다. 거기다 애들을 데리고 왔는데 가만히 있지를 못 하도 이리 갔다가 저리 갔다가 하며 얼마나 어질러 놓던지. 평소에 두 시부터 시작하는 마감을 두 시 반이 돼서야 할 수 있었다. 결국 15분 늦게 퇴근.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지칠 대로 지쳐서 장 보러 가는 걸 하루 미룰까 했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보스가 내일도 올 게 뻔해 그냥 오늘 다 힘들기로 했다.
그리고 정말 마음이 찢어지게 아픈 일이 일어났는데, 주차하다가 기둥에 차를 긁어버렸다. 마트 가는 골목이 굉장히 좁은데 맞은편에서 차가 오길래 피한다는 게 반대쪽으로 차를 너무 붙였고, 골목 주차 되어 있는 차에 걸려있던 자전거 거치대에 조수석 사이드미러가 부딪쳐 살짝 접혔다. 조수석 사이드 미러로 시야 확보가 잘 안 되는 상태에서 주차장에 들어가 후면주차를 하다가 그만 기둥에 긁은 것이다. 후방센서가 분명히 경고했는데 집중을 안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걸 못 듣고 그냥 밀어붙이다니... 구겨진 데는 없지만 도장이 벗겨졌고 내 마음에 생채기도 크게 생겼다.
남편은 괜찮다고 하는데 진짜 안 괜찮다. 결국 저녁 먹으면서 주말에 먹고 남은 소주 병나발 불었다 속상해서.
1월 18일(목)
오늘은 코워커랑 둘이서 일 하는 날. 두 명이서 일 하는 거 오랜만이다. 아침부터 정말 바빴는데 휴식을 취하지 못할 정도였다. 점심 먹다 말고 뛰어나가기를 여러 번. 결국 나는 폭발해 버렸다.
오후에 어김없이 보스가 셰프를 데리고 왔는데 다행히 어제처럼 우리를 방해하는 일은 없었다. 대신 한 명 더 남아서 신메뉴 개발 도와달라길래 나는 단칼에 거절했고 내가 거절한 탓에 코워커가 한 시간 정도 더 고생하게 됐다. 그리고 나는 셰프에게 월요일에 그랬듯 불만을 토로했다. 사람 한 명 더 필요하다, 5분 쉬다가 나가서 일하고 다시 들어와서 5분 쉬다가 나가는 게 무슨 휴식이냐,라고 하니 다 이해한다, 란다. 이해하면 뭐 어쩔 건데 액션이 있어야 할 거 아니야.
오늘 아침에 코워커랑 한참 이야기를 나누며 나는 이제 이판사판이라고 했다. 이렇게 말해서 바뀌면 내가 편해져서 좋은 거고, 안 바뀌면 오래 있을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돼서 좋은 거다. 코워커도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는 성격이라 다행이다. 주말에만 일 하는 직원이 있는데 그 직원은 아무리 부당한 일을 겪어도 늘 네,라고 하는 바람에 스스로를 극한의 상황으로 몰고 갔다.
내일은 세 명이서 일 한다. 근처 마트 가서 사 올 게 있는데 두 명이서 일 할 때는 자리를 비울 수가 없다. 내일 다녀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