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 낼 대상을 제대로 분간하자
들으라는 혼잣말
나는 새로운 기계를 만지는데 크게 두려움이 없다, 물론 소프트웨어적으로. 하드웨어의 경우, 나사를 돌리다가 기계가 부러지진 않을까, 왼쪽으로 돌려야 할 것을 오른쪽으로 돌려 부품이 망가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기계의 견고성에 대한 불신과 내 힘에 대한 지나친 과신을 가지고 있어 꽤 부들부들 떠는 편이다. 새로운 핸드폰을 사서 버벅대는 순간은 새 기능 또는 내가 사용하지 않는 부가 기능을 실행할 때뿐이다. 어차피 같은 브랜드의 유사한 형식을 사용하는 기계가 뭐가 그리 다를까라는 생각.
키오스크 주문을 처음 접했을 때도 크게 당황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첫 키오스크 주문 매장은 베트남 음식점이었던 듯싶다. 다소 생소한 주문 방식에 당황은 했으나 굳이 어렵다는 느낌보다는 어르신들이 힘드실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해당 매장은 정말로 키오스크로 주문을 해야만 누군가 뿅 하고 나타나서 음식을 만들 것 같은 진정한 무인 매장처럼 보여서 크게 거부감은 느끼지 않았던 듯하다. 오히려 좀 더 재미있는 느낌이었던 것 같기도.
그리고 기억에 남는 매장은 햄버거 매장이었다. 내가 햄버거 세트 하나를 주문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이 내 옆 기계의 주문자들은 몇 명인가 바뀌었고 그 바로 앞 계산대에 꽤 한가해 보이는 직원들이 전혀 도움을 줄 의지를 보이지 않을 때는 정말 화가 머리끝까지 났었다. 내가 먹을 햄버거의 이름도 알고 사고 싶은 음료도 정해져 있는데 왜 그것을 주문하는 것이 이렇게까지 어려워야 하는지, 당황하니 더욱 허둥대고 자꾸 메인 화면으로 돌아가는 기계가 야속해서 포기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중에 해당 매장의 거지 같은 인터페이스를 욕하는 사람들이 나뿐이 아님을 알게 된 이후에 좀 마음이 수그러들긴 했지만 아직도 햄버거는 드라이브 스루를 이용하는 편이다. '어쩌면 지금도 햄버거 주문은 헤매지 않을까?'
오랜만에 도서관에 갔다. 대출을 하려는데 유인과 무인이 가능하다고 한다. 굳이 내가 읽는 책 목록을 공개하는 것보단 무인이 좋겠다 싶어 내심 신나서 키오스크를 이용하기로 했다. 하지만 아무리 책 번호를 스캔해도 기기는 다시 회원권 스캔을 하라며 첫 화면으로 돌아갔다. 반복적인 회원권 스캔 이후 겨우 한 권만 대출이 완료된 상태로 나는 다시 몇 번이고 책 번호를 스캔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행위가 계속 반복되니 또다시 이성이 잠시 나가서 이미 대출이 완료된 책을 스캔하는 바보짓까지 더하고 있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그래도 차분한 척 도서관 직원에게 문의하니 아주 조용하고 차분한, 도서관에 어울리는 목소리로 방법을 설명하는데 이미 한 권의 대출을 완료한 나는 '내가 못하는 게 아니라 기계가 거지 같다'라는 생각이 너무 확고해서 그 차분한 목소리에 더욱 화가 났다. 그래서 결국 "그냥 대출해 주면 될 일이지 바빠 보이지도 않는데"라는 혼잣말을 가장한 불만을 내뱉었다. 차분한 목소리는 차분한 마음 가짐을 동반하는 것인지 내 말을 들었을 것이 분명함에도 직원은 나를 친절하게 키오스크로 데리고 가서 "여기에 책을 올리시고요"라고 말했다.
'거기 책을 올리라뇨???' 하는 심정으로 이제야 키오스크를 제대로 보니 내가 책 번호를 스캔한 곳은 회원권을 두는 곳이고 책은 그 옆 아주 넓게 그리고 직관적인 책 모양이 그려진 부분에 놓는 것이었다. 나 혼자 마트 무인 결제 시스템을 생각해서 키오스크 옆에 있는 카트 위에 내 책을 두고 회원권 부분에 책을 스캔하려고 뻘짓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 그 한 권은 도대체 어떻게 대출이 된 거지?'
어렵지도 복잡하지도 않은 무인 기기를 제대로 읽지도 않고 내 멋대로 생각해서 작동하려 한 주제에 화가 나서 불평을 혼잣말처럼 가장해서 말한 내 야비함이 창피하고 내 무례함에 그제야 현타가 왔다. 그냥 처음부터 물어볼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아직 나는 키오스크가 어렵지 않고 싶다. 나는 아직 새로운 기계를 아무런 어려움 없이 작동하는 사람이고 싶다.
내가 원하는 모습이 되지 못하는 건 타인의 탓이 아닌데 순간 화가 나니 그 화를 엉뚱한 대상에게 풀어버리고 말았다. 최근 들어 크게 새로운 경험을 할 일이 없다. 늘 하던 일을 하고 늘 가던 곳에 가다 보니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일상이 아주 조그마한 변화로 인해 흔들리는 내 모습을 보니 덜컥 겁이 났다. 아직 변화는 시작되지도 않았다. 나는 아직 충분히 작은 글씨를 읽고 새로운 기계에 두려움 없이 도전할 수 있다. 하지만 곧 그렇지 않을 시간이 올 것이다. 시간은 자꾸 흐르고 지금 이 글을 쓰는 이 짧은 순간에도 눈이 피곤한 것을 보면..
늘 하는 공수표 같은 다이어트 다짐을 한 것 이외에는 아무런 새해 다짐도 하지 않은 올해 목표는 '새로운 일에 도전'으로 정하기로 했다. 어떤 새로운 일이 있을지는 나중에 정하더라도. 아! 일단 1차 목표는 햄버거 키오스크 도전이다. 할 수 있는지 알아볼 겸 조만간 햄버거를 먹으러 가야 할 듯. 익숙하기만 한 일상이 아니라 생소하고 당황스러운 새로움이 필요하다. 자꾸 조금씩 겁이 많아지고 이제는 '혼자 여행을 갈 수 있을까?'라는 두려운 마음이 드는 것을 인정하고 무서워도 좀 더 새로운 도전을 해봐야겠다. 그리고 못한다면 그 한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겠다. 까짓, 못하면 어떠한가, 할 수 있는 거 하면 되지.
남들이 보기엔 '왜 그렇게 되는 거지?'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호들갑스러운 생각 구조 덕분에 아주 사소한 키오스크 바보짓 에피소드는 거창한 새해 다짐으로 이어졌지만 '그래! 기왕 여기까지 이어진 거 올해는 뭔가 새로운 일이 도전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