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늙는다
쓸데없이 감정이 풍부해서 별 것 아닌 일에도 화를 내고 안절부절못하며 안정은커녕 죽기 전에 내 삶에 안정이라는 단어가 찾아올지 시시때때로 불안감을 느끼는 나는 사회적으로 충분히 '연세가 지긋'하다. 평소에는 나이에 대한 부담감이나 강박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나와 동갑인 사람과의 대화가 매우 연세 지긋한 분위기로 흐르면 어찌할 바를 모르겠고 나이를 묻는 질문을 받게 되면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어느 순간부터 내 나이를 세지 않고 있다가 며칠 전 모친과 친구분이 대화를 나누다가 친구분이 자신의 자녀의 나이를 언급하며 내쪽을 보며 '너랑 동갑이야'라고 하자 우리 모친은 '우리 딸이 그렇게 나이가 많아?'라고 놀랐고 나는 '우와 제가 벌써 그 나이예요?'라고 함께 놀랐다. 언제부턴가 내 나이는 살아온 세월을 더한 숫자가 아니라 태어난 년도로 갈음되고 있었으므로 나의 놀라움은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최근에는 새로운 일을 하지 않는다. 새로운 일을 하지 않다 보니 자기소개를 할 일도 없고 새로운 학생을 만나도 직업 특성상 '타인의 나이를 묻는 것은 무례'라는 미국식 문화 교육을 빼놓을 수 없으므로 학생과 나는 함께 수업을 한 시간이 1년이 넘어가도 서로의 나이를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렇게 말하니 내가 매우 '나이를 초월'한 멋진 사람처럼 보이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절대 그렇지 않다. 나는 언어를 가르치는 사람이다. 그리고 다른 언어를 배워본 사람이다. 언어를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나이에 대한 강박을 느낀 것은 꽤 오래전부터였다. 예전에 내가 근무했던 어학원은 강사들에게 타 언어 무료 수강을 제공했다 (본인이 가르치는 언어도 수강 가능했는지 여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건 너무 스파이 같은 짓이라 아무도 안 했으므로 그 부분은 정확히 모르겠다.)
대학생 때부터 일본어를 공부하기도 했고 그 이전에도 일본 드라마를 자주 봐서 어느 정도 일본어 기초는 있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공부니 '기초'부터라는 학생의 자세로 일본어 기초반 수업에 들어갔다. 그래도 직장 동료니 교실 뒤쪽에 아주 조용히 앉아 존재감 없이 수업에 들어갔는데 몇 분 지나지 않아 큰일이 났음을 직감했다.
나 역시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물론 선생 개개인에 따라 수업 방식은 큰 차이가 날 수 있다는 그 다양성을 무시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수업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학생의 흥미를 끌 수 있는가'이다. 그것이 재미있는 말솜씨건 현란한 수업 실력이건 외모건, 특히 어학을 배우는 성인에게는 단순히 '영어를 잘하고 싶어' 정도의 동기 이상의 무언가가 있어야만 꾸준히 수업에 참여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의 일본어 선생님은 연세가 지긋하셨는데 아마도 60대 정도 되어 보이셨고 외모도 늘 단정하고 학원에서도 항상 조용하고 얌전하신 여자분이셨다. 그 선생님은 일본어 기초 회화반을 담당하며 말하기보다는 문법에 특화된 수업을 하셨다. 하지만 나는 언어의 목적은 소통이라고 생각하고 높낮이 없이 차분한 목소리는 그 내용이 아무리 재미있다고 해도 오래 집중하지 못하는 주의력이 매우 연약한 사람이다.
그래도 다른 반으로 이동하는 것은 눈치가 보여 1달가량 수업을 듣고 '경력자'라는 핑계로 다른 선생님이 가르치시는 중급반으로 이동했다. 당연히 이동 전 새로운 강사에 대한 신상 정보를 꼼꼼히 확인했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 나는 혹시라도 내가 강의를 들을 일이 있으면 선생님의 학력 프로필보다는 나이를 좀 더 꼼꼼히 체크하게 되었다.
물론 편견일 수 있다. 나이가 많다고 소위 꼰대 같거나 지루한 수업을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게 60대는 사실 실질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를 가르치는 강사로서는 너무 많은 나이라는 생각이다. 나는 우스갯소리로 언어를 배우기에 가장 좋은 상대는 어린아이라고 말한다. 쓰는 단어가 쉽고 단순하며 무엇보다 현재 상용되는 언어를 말하는 사람이 바로 어린아이이기 때문이다.
지역민을 위한 인문학 수업이 있다길래 이미 다 지난 유행일 수 있지만 지금이라도 인문학이 뭔지 좀 배워볼까라는 생각이 들어 수업을 주관하는 곳에 전화를 걸어 강사가 누구인지 문의했다. 이전에도 인문학 수업에 관심이 있었지만 해당 수업을 진행하는 강사가 100살이 넘은 저명한 학자라는 사실을 듣고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오래 살았고 더 오래 공부했으니 더 깊은 지식과 연륜을 기대할 수도 있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나이를 지나면 위로만 쌓아 올려져 한쪽으로 치우친 고집 섞인 지식이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나 역시 지금이야 어찌어찌 시대에 발맞추어 가고 있지만 언젠가는 아무도 쓰지 않는 단어를 가르치고 시대에 동떨어진 대화 주제로 '라테'이야기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보아온 어른들은 대부분 말투가 너무 느려서 나 같은 집중력 바닥인 사람은 절대로 집중할 수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기도 했다.
강사 문의를 하고 인터넷으로 해당 강사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다 '김모모 옹'이라는 호칭에 오래간만에 생긴 공부 의지가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씁쓸한 마음으로 또 한 번 멀지 않은 미래의 나를 걱정한다.
'나는 어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