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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로 Moreau May 03. 2024

새로 왔어요?

27년 만의 면접을 보고, 오늘 첫 출근을 했다. 그런데 오늘 출근 전, 내 상태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냉장고가 말썽인 데다가, 전날 미국서 온 언니의 생일이어서 파티를 (엄마가 함께 사는) 우리 집에서 해야 했다. 냉장고가 말썽인 상태로 음식을 하는 건, 좀 스트레스다. 게다가 파티가 끝난 후인 늦은 밤, 100일 글쓰기 숙제를 하느라고 늦게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하여 수면 부족과 피로와 노이로제가 혼합된 상태로 첫 출근을 하고 말았다.


그런데 근무지에 도착해 작업 앞치마와 명찰과 카디건을 걸치자, 문득 나 자신이 자랑스럽게 느껴지고 바짝 긴장되면서 정신이 말똥말똥 해지는 것 아닌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쭈뼛거리는 내게, 선임자들은 모두 친절하게 이 일 저 일을 알려주었다. 모두 처음 접하는 일인지라 굉장히 다양하고 복잡한 일처럼 여겨졌지만, 선임자들은 내게 자꾸 반복하다 보면 그냥 몸이 알아서 잘하게 될 거라는 말도 덧붙여 주었다. 안심이 됐다.


선임자들의 명찰에는 이름이 적혀있지만, 내 명찰에는 아직 "수습활동가"라고만 쓰여있었다. 그 명찰 때문인지 아니면 단골 조합원이라서 활동가들을 모두 잘 알기 때문인지, 어떤 조합원님이 매장에 들어서자마자 모기만 한 목소리로 수줍게 인사를 하는 내게 "새로 왔어요?"하고 물었다. 예, 새로 왔어요, 정말 오늘은 모든 게 새로왔어요!


*  


오늘 배운 일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술래잡기'다. 모든 선임자들은 매장 물품의 판매 원칙인 '선입선출(先入先出)'을 매우 강조했다. 그래서 내게 물품 진열에 대해 가르쳐주면서 소비기한이 긴 물품은 안 쪽에, 짧은 물품은 바깥쪽에 하라고 했다. 소비기한이 짧은 것이 먼저 판매되도록 말이다.


그러나 조합원님들 역시 그걸 알고 있고, 소비기한 날짜가 가장 길게 남은 물품을 가져가고 싶은 어떤 분들은 우리가 애써 진열해 놓을 걸 마구 헤집어 가장 안쪽의 것을 가져가고 싶어 한다. 물론 나도 물품을 사기만 하는 입장이었을 땐, 그런 식의 '후입선출(後入先出)' 원칙을 종종 따랐기에, 그분들을 탓할 수 없다.


그렇게 헤집고 간 물품을 다시 '선입선출' 원칙에 따라 다시 정리하면서, 술래잡기 같다는 생각을 했다. 활동가는 감추고 조합원님들은 찾아내기. 그러면 또다시 감추고, 다시 찾아내기. 아마도 결코 끝나지 않을 영원한 술래잡기.


*


앉거나 누워 있던 시간에 서 있고 왔다 갔다 하고, 이것저것 힘써 나르고 해서 그런가 어느 순간 출출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마침 때맞춰 휴게시간이 찾아왔던 것이다. 근로기준법상, 4시간 이상 일하면 30분의 휴게 시간을 줘야 한다. 그런데 어디서 어떻게 쉬어야 하나? 주춤거리고 있자 선임자가 나를 매장 뒤편의 휴게 장소로 데려갔다.


그곳의 자그마한 테이블 위에는 에어프라이어로 갓 구워놓은 주먹밥과 물김치와 사과까지 예쁘게 깎아져 있었다. 먼저 쉬러 왔던 다른 선임자가, 뒤에 쉴 우리 둘을 위해 해 놓은 것이었다. 고단한 나를 위해 누군가 이렇게 풍성한 휴식을 준비해 준 적이 그 언제였던가! 평소 같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간식이, 얼마나 꿀맛이던지. 퇴근한 내게 '직장 만족도'가 몇 점이냐고 묻는 딸들에게, 나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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