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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로 Moreau May 04. 2024

우리들의 공전

요즘 매일 기다려지는 시간이 있다. 그건 바로, 늦은 저녁 둘째와 단둘이 하는 공원 산책이다. 공원에는 걷거나 달리는 사람들을 위한, 중앙에 축구장을 둘러싼 트랙이 있다. 사람들은 그 트랙 안에서 제각각 속도는 달라도, 모두 같은 방향으로 돌고 있다. 마치 태양 주위를 공전하는 행성들 같다. 우리 둘도, 그 대열에 합류해 같은 방향으로 걷는다.


트랙에서는 원래 자전거를 타면 안 되는데, 오늘은 중학생 하나가 자전거를 타고 돌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자전거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에, 둘째가 작년 어느 날 친구와 둘이 자전거를 타고 꽤 먼 호숫가 공원까지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했다. 우리 가족들도 종종 소풍삼아 가기도 하는 곳인데, 차로 가도 20~30분 거리니 자전거로는 꽤 오래 걸렸을 것이다.


자기 말로도 생각보다 꽤 멀어서, 돌아오는 길에는 너무 힘들어서 쓰러질 뻔했단다. 그런데 나는 둘째에게 그랬던 날이 있었다는 걸 까맣게 몰랐다. 큰 애였다면 그런 일 정도는 바로 알려주었을 텐데, 둘째에 관한 일은 한참이 지나서야 알게 되는 게 많다. (그마저도 모르는 게 아마 더 많을 테지만.)


*


큰 애는 누구에게나 생글거리며 안기는 아기였는데, 둘째는 낯을 많이 가리는 아기였다. 한때는 나 말고는 아무에게도, 심지어 남편한테도 안기려 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좀 더 자라 혼자 장난감 놀이를 할 줄 알게 되었을 때, 뭘 하든 내게 보여주고 설명하고 칭찬받으려고 하던 큰 아이와 딴판으로, 둘째는 내게 '저리 가'라 했다. 그러곤 장난감을 갖고 혼자 중얼중얼하고 깔깔대면서 놀이하고만 놀았다.


잠들기 전 책 읽어주는 시간에도 큰 아이는 집에 있는 모든 책을 번갈아가며 골고루 골라왔다. 반면 둘째는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책만 가져와서 매일, 몇 번이고 읽어달라고 해서 나중에는 그 책을 혼자서, 글자도 모르면서 외워서 읽고 있었다.


그런 둘째가 사춘기가 되자, 걸핏하면 '문 닫고 나가'라며 이번에는 거꾸로 내게 낯을 가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최근 몇 년간 우리들의 대화는 취조하는 형사와 용의자처럼, 질문과 짧은 대답으로 이루어지곤 했다. 아이와 마주할 수 있는 짧은 순간을, 뭐든 더 알아내고 싶은 마음에 어리석은 질문을 던져, 더 짧게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


요즘 둘째와 함께 걷다 보면 그냥 자연스럽게 이야기들이 흘러나온다. 아이에게서도 그렇지만, 나 자신에게서도 그렇다. 예전에는 내가 나 자신보다는 아이를 더 '알고자'했고, 그래서 말이 주로 상대를 향한 질문으로 나왔던 것 같다.요즘 나는 나 자신에게 관심이 많고, 그래서 내 이야기를 먼저 하게 된다. 그래서인가 둘째도 자연스럽게 여러가지 이야기를 내게 들려준다. 같이 산책하자해도 콧방귀만 뀌더니, 요즘엔 자기가 먼저 산책 시간을 챙긴다. 그리고 공원까지 가는 길에도, 친구들과 함께 걸어다녔다는 동네 샛길들을 내게 알려준다.


함께 트랙을 돌다가 더 많은 운동량이 필요하다며 둘째가 저만치 먼저 뛰어간다. 어떤 날에는 나도 따라 헉헉대며 뛰어가기도 하지만, 오늘은 그냥 나대로 천천히 걸었다. 우리 둘의 공전 속도가 달라도, 어느 순간 어느 지점에서는 다시 일치되어 또 만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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