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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로 Moreau May 06. 2024

거꾸로 말하기

오늘 아침 시댁으로 출발하려는데, 시어머니한테 전화가 왔다.


"비가 많이 오는데 어떻게 오겠냐, 날 좋을 때 나중에 와라."


이럴 땐 발걸음을 더욱 재촉해야 한다. 어머니의 이 말을 해석하면, "비 와서 차가 막히니 어서 빨리 출발해서 오너라~"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시댁으로 가는 차 안에서 남편과, 어머니의 '거꾸로 말하기'에 대한 이야기 꽃을 피웠다. 가끔 안부전화를 드리면, 어머니는 이모님들과 함께 어딘가로 즐겁게 나들이를 가고 계신다. 내가 "재밌게 잘 다녀오세요~"하고 인사하면 어머니는,


"오냐~ 이모들이 자식들 노릇을 해준다~"


이 말을 해석하면 '너희들은 나 데리고 나들이를 왜 좀 안 가느냐'라는 뜻이다. 그러나 나는 당황하지 않고 "아우, 이모님들 너무 고마우시네요~"라며 재빨리 전화를 끊는다. 어떤 날에는 통화를 하다가 내가 "어머니 뭐 해 드셨어요?"하고 인사치레로 물으면 어머니는,

          

"큰 딸이 반찬을 맨날 해서 갖다 줘서 먹을 거 많으니, 걱정 마라~"


이 말 뜻인즉, "너는 나한테 아무것도 안 해오더라"다. 그러나 나는 역시 당황하지 않고 "아이고, 아가씨가 정말 효녀예요~"하고 은근슬쩍 다른 주제로 말을 돌린다.


*


처음엔 어머니의 이런 화법이 참 이상하고 기분이 살짝 나쁘기도 했다. 원하는 걸 왜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으시고, 빙빙 돌려서 저러시나? 그래서 어머니의 말을 내가 직설법으로 바꿔서, 이거 아니냐고 확인한 적도 있다. 그런데 어머니는 펄쩍 뛰면서, 그런 거 절대 아니라고 부정하셨다.  


시간이 흘러 내가 어머니 화법에 적응하고 나니, 이제는 오히려 확실한 직설법보다 저런 식의 은근한 반어법이 굉장히 세련되고 재미난 화법처럼 느껴진다. 어머니와 같은 화법을 구사하려면 상대방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 말에 '거꾸로 말하며' 대응해야 하기에, 직설법보다 훨씬 더 빠른 생각의 속도, 재기와 순발력이 필요하다.


또 그게 아무리 형식적이라 해도 어머니의 화법은 상대방에게, 선택의 '여지'를 남겨둔다. 만약 어머니가 내가 해석한 대로 직설법으로 말하셨다면, 그건 모두 잔소리이자 확실한 '명령'이 되어버린다. 그러면 나는 명령에 따르는 착한 며느리거나 혹은 거역하는 나쁜 며느리가 된다. (물론 게으른 나는 언제나 후자일 것이다.ㅠㅠ) 어머니의 화법은 듣는 상대방을 그런 이분법 속으로 떨어뜨리지 않으면서도, 자기 마음을 다 시원하게 표현할 수 있는 기술인 것이다.


*


그러니 어머니의 화법을, 내 식대로 직설법으로 바꾸는 게 다 맞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해석한 건 그저 내가 스스로 만들어 낸 질문, '어머니가 뭘 원하지?'에 대한 답일 뿐이다. 그런데 우리가 말을 하는 이유가, 항상 상대방에게 무엇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아니다. 그저 내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서, 누군가 내 마음을 이해해 주길 바라서,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기도 하지 않는가.


찾아갈 때마다 어머니는 매번 이런저런 음식을 준비하신다. 우리는 항상 "힘드시게 뭐 하러 하셨냐"고 말하고, 어머니는 또 항상 "이까짓 거, 하나도 안 힘들다"라고 하신다. 재주 없는 내가 뭐 맛있는 것 좀 사드리려고 하면, "너희들이 좋은 거면, 아무거나 다 좋다"라고 하신다. 그 모든 말들은, 그저 "사랑한다"는 뜻일 게다. 나도 가끔 내 아이들에게 어머니 말투를 흉내내보고 싶은데, 잘 되지 않는다. 아직 재기와 순발력과 세련됨이 뒤떨어지고, 무엇보다도 사랑의 차원과 깊이가 매우 부족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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