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고원> 하루 네 쪽 읽기, p.129~132
표현의 형식이 기표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내용의 형식은 기의가 아니다.
Une forme de connu n'est pas du signifié, pas plus qu'une forme d'expression n'est du signifiant.
'개'라는 말을 들으면 바로, 어떤 개의 실물(?)이 떠오른다. 거기에서 끝나면 '기표-기의'로만 지어진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개'라는 말에서 네 발 달린 다른 동물들의 실물 이를테면 말, 소, 낙타, 사자, 코끼리, 심지어는 어떤 사람마저도 함께 떠오를 수 있다. 그러면 그들 간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생각하며, 과연 '개는 왜 개가 되었는가'와 같은 '개똥철학'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또, '개'라는 말에서 '들개', '사냥개', '애완견', '반려견' 등의 다른 '개들'이 생각날 수도 있다. 그러면 '동일해보이는 개는 어떻게, 어떤 과정을 거쳐, 이토록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되었는가'와 같은, 역사적 사유 같은 것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우리 집에도 '개'로 분류될 수 있는, '복돌이'가 산다. 복돌이는 때로 두 발로 서 있고, 더 많은 시간은 누워서 보낸다. 그는 때로 친정 엄마의 반려자 같다가도, 다음 순간 (장난감) 사냥감 앞에 서면 사납게(?) 으르렁대는 들개로 돌변한다. 이따금 뭔가 심사가 뒤틀리면 온 집안에 자기 변을 바르며 '개 심통'을 부리기도 한다. 하나처럼 보이는 '복돌이'는 매 순간 다른 존재로 변한다. 그러니 세상에 어떤 개도, 아마 동일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 '기표-기의'로 지어진 세계에만 산다는 건, 그가 경험이나 느낌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인간이 정의한) 말의 추상적 감옥에 갇혀서, 혹은 잠깐 멈춰서서 매일 쓰는 말과 사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할 시간도 없이, 살아간다는 뜻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