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고원>> 하루 네 쪽 읽기, p. 535~538
고른판 또는 내재성의 판 위에서는 모든 것이 바뀌는데, 이 판은 구성되는 동시에 그러한 자기 자신을 대가로 치르며 지각될 수밖에 없다. 즉 실험이 해석을 대신한다. 이때 무의식은 분자적, 비구상적이며 비상징적으로 변화하며 미시-지각 같은 것으로서 주어진다.
Tout change sur un plan de consistance ou d'immanence, qui se trouve nécessairement perçu pour son compte, en même temps qu'il est construit: l'expérimentation se substitue à l'interprétation; l'inconscient devenu moléculaire, non figuratif et non symbolique, est donné comme tel aux micro-perceptions;
어려운 요가 자세를 처음 시도할 때는, 그냥 힘들고 이곳저곳이 아파온다는 생각 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같은 자세를 거듭 반복하다 보면, 내 몸의 어디에 (불필요한) 힘이 들어가 있는지 또 어디에는 전혀 (필요한) 힘을 줄 수 없는지 조금씩 자각하게 된다.
세상에서 '무의식'이라고 이름 붙여진 것이 생겨난 이유는 아마도, 나의 생각(의식)과는 다른, 내가 자각하거나 조절할 수 없는, 내 신체의 움직임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도서관으로 가고 싶었으나, 내 발은 저절로 술집에 이른다!) 이런 자신의 신체-무의식을 자각할 수 없는 한, 새로운 변화-생성이 생겨날 수는 없다.
그런데 또한 이 자각은, (요가의 경험처럼) 우선은 고통스럽고 아픈 시도를 스스로 의도하는 ( 스스로 다른 사물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그들의 힘을 사용하고자 하는) 자기-수련을 통해서만 일어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