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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밥 Jun 04. 2024

영화가 절실했던 시절이 그립다

초등학교 시절의 영화 관람기


<영화를 찾아서 추억을 찾아서>라는 간판을 걸어놓고 나자마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호기롭게 영화도 찾고 추억도 찾아보겠다고 나서긴 했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좀 막막한 느낌. 예전에 본 영화 중에 좀 더 분명하게 남아있는 게 있으니 그런 영화들이 기준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당시로는 인상에 남았었지만 기억이 흐려진 영화들도 있을 텐데 그런 게 더 궁금한 마음이다. 고민한 끝에 가능한 연대기적 순서로 기억을 더듬기로 마음먹었다. 순차적인 것이 흐릿한 기억을 필터링하는데 도움이 될까 하는 마음에서다. 비슷한 시절에 본 영화가 비슷한 시절의 기억 속에서 이 기억은 저 기억을, 저 기억은 그 기억을, 그 기억은 또 다른 데 숨어있는 기억을 데려오기를 바라면서.




유년기에 본 영화는 공식적 기억으로 두 편이 있다. <소령 강재구>와 만화영화 <홍길동>이다. 두 영화에 대한 기억은 흐릿하지만, 극장에 데려간 사람이 누구인지는 기억한다. 초등학교 시절에 봤던 영화에 대한 기억은 대체로 선명하다. 그래서 예전 신문의 영화 광고를 찾아보았다. 1968년부터 1973년까지 어떤 영화들을 봤는지 살펴보고 싶어서였다. 그 시절에 본 영화들 중에서 어떤 이유로든 그때 남긴 인상이 짙었던 영화들을 추려 보았다.



사운드 오브 뮤직 (1965)

부모님 그리고 여동생과 함께 본 처음이자 마지막 영화.

이 영화를 싫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자신했던 영화.


7인의 신부 (1954)

7인의 신랑이 춤추는 장면이 너무 흥겨웠던 영화.

너구리 잡기 좋은 밤이란 대사에 너무 많이 웃었던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1939)

비비안 리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는 동네 친구의 말에 혹해서 본 영화.

미국의 역사 속에 서부만 있는 게 아니란 걸 알게 된 영화.


스잔나 (1967)

비련의 여주인공이 어떤 의미인지 처음으로 알려 준 영화.


피터 팬 (1953)

너무 보고 싶어서 담임 선생님을 졸라서 간 영화.

보고 나오면서 한 번은 더 봐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만든 영화.



벤허 (1959)

유명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어서 무조건 봐야겠다는 생각만으로 기다렸던 영화.

인터미션 시간에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했던 영화.


십계 (1956)

누나의 배신 때문에 혼자 봐야 한다는 두려움까지 안고 봤던 첫 번째 영화.


잠자는 숲 속의 공주 (1959)

공주 영화라는 생각에도 디즈니 영화에 대한 의리를 생각해서 본 영화.

혼자서 버스 타고 시내까지 나가서 본 첫 번째 영화.


80일간 세계일주 (1956)

초등학교 때 단체 관람으로 보게 된 영화.

마지막의 상황 반전, 그것이 최고였던 영화.



흑기사 (1952)

흑기사 로버트 테일러보다 흑발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더 인상적이었던 영화.


엘시드 (1961)

찰턴 헤스턴이 죽어서도 말 타고 달리는 마지막 장면에 감동했던 영화.


섬머타임 킬러 (1972)

동네 형들의 강렬한 꼬드김에 보기를 감행한 영화.

오토바이와 선글라스의 상징성을 처음 알려 준 영화.


007 소련에서 탈출 (1963)

처음으로 본 007 제임스 본드 영화.


아디오스 사바타 (1971)

서부극이 다 같은 서부극이 아니란 느낌을 처음으로 가지게 해 준 영화.



정의의 건 벨트 (1967)

총을 등 뒤로 돌려 쏘는 장면이 정말 인상적이었던 영화.


남대남 (1969)

재미있다고 추천했다가 같은 극장 가서 한 번 더 보게 된 영화.


열화문 (1971)

역사적 실존 인물이란 사실과 장렬한 최후 덕분에 기대하지 않았던 감동을 받은 영화.


용쟁호투 (1973)

인생의 배우 이소룡이자 브루스 리를 처음으로 봤던 영화.  




어릴 때 마음으로는 사람들은 영화 이야기 하는 걸 참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제목부터 시작해서 영화 속 인물, 장면, 대사, 주제가, 배우들의 사생활... 듣다 보면 별의별 얘기를 다 하는 것 같았다. 그걸 옆에서 듣다 보면, 영화로 시작은 하지만 영화가 빠져도 사람들 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지더란 것이다. 영화를 봐야 어른이 된다고 믿었던 시절의 기억 한 조각이다. 영화는 사람의 것이고, 사람은 영화의 것이라는 생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영화를 보고 싶으면 조르기부터 했다. 조른다고 볼 수 없는 영화가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그런 영화를 보는 방법도 터득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영화를 좋아하면 세상 사는데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도 했다. 타인과 의견을 맞추어야 하고, 혼자만의 방법을 찾기도 하고, 여의치 않으면 다음을 기약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도 영화 때문에 알게 된 것이다. 어릴 때 영화 보면서 허벅지를 꼬집을 때도 있었다. 졸려 죽겠어도 영화는 봐야 하니까. 이번에 못 보면 다시 볼 기회가 없을까 봐. 참으로 절실하게 영화를 부여잡던 시절이었다. 영화 한 편 한 편을 귀하게 여기던 그 시절의 절실함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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