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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밥 Aug 27. 2024

<인생>이란 영화에서의 역할

중학교 시절의 추억, <암흑가의 두 사람>

    

중학교 1학년 때 국어 선생님이 추천한 영화가 <암흑가의 두 사람>이었다. 여성이고 미혼이었던 선생님의 정말 감동적이니까 꼭 봤으면 좋겠다는 말씀은 애원에 가까웠다. 그래서 보게 된 <암흑가의 두 사람>에 대한 평가는 그때 할 수 있었던 말로는 “억울하고 안타깝다.” 였다. 영화 보고 이런 마음 처음이라는 느낌이 들었을 만큼 그때까지의 경험과는 다른 울림을 경험했다. 초등학교 졸업하고 사춘기에 접어드는 시기에 본 영화라서 그런지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준 영화였다.      

  



<암흑가의 두 사람>을 보기 전에는 제목으로 미루어 총싸움 장면이 제법 나올 걸로 생각했다. ‘암흑가’라면 범죄를 떠올리고, ‘두 사람’이라면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사이로 생각하기 쉽지 않은가. 따라서 ‘암흑가’와 ‘두 사람’을 붙여 놓으면 범죄에 이어진 분노나 원망이 끼어들 것이 분명하니 둘이 한 판 붙기 쉽다고 여겼던 것이다. 보고 나서의 결론은 이랬다. ‘암흑가’란 단어를 쓸 구석도 있고 ‘두 사람’ 얘기라고 해도 되지만, 둘을 붙여 놓은 ‘암흑가의 두 사람’의 어감은 좀 다르지 않나 하는. 원제목을 번역하면 도시나 도회지(ville)의 두 사람(deux hommes)이다. 지금 와서 제목 탓을 하는 건 아니고 당시를 생각하면 다른 기대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제목 같기도 해서. 알고 보니 일본 제목이 ‘暗黑街のふたり(암흑가의 두 사람)’이었다.     



 

암흑가의 두 사람 (Deux hommes dans la ville, 1973)     


 

<암흑가의 두 사람>이 시작되면 내레이터인 제르맹(장 가방)이 거리를 걸어가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시작한다. 높다란 담 옆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보며 제법 두툼하게 생긴 할아버지가 참 왜소해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것은 교도소의 담이었다. 그 높다란 담 이편과 저편은 다른 세계라는 의도였을까. 경찰 출신의 보호 감찰관 제르맹은 계속 전과자의 편에서 얘기해 보지만 전과자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그들에게 찍힌 낙인만을 주시하려 든다는 것이 전편에 깔린 분위기였다. 



제목의 ‘두 사람’은 지노와 제르맹을 가리킨다. 범죄자 출신의 ‘한 사람’ 지노는 새로운 자신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경찰 출신의 ‘한 사람’ 제르맹은 그를 돕는 역할을 맡고 있다. 이 ‘두 사람’은 주인공인 만큼 공감할 수 있는 정서를 지닌 캐릭터다. 그런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또 ‘한 사람’이 있다. 이 한 사람의 역할을 조금 다르게 뒀더라면 ‘암흑가의 세 사람’이라는 제목이 탄생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이 캐릭터가 관객이 보기에 ‘사람’이 아니라 ‘놈’이나 뭐 그런 종류의 호칭으로 부르고 싶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이다. 두 사람 사이를 헤집고 들어가서 기어이 파투를 내고야 마는 현직 경찰 그와트로(미셸 부케)의 캐릭터다. 좋은 ‘두 사람’의 브로맨스에 끼어든 나쁜 ‘한 놈’의 원치 않는 활약(?)이 기가 막힌 비극을 만들어내고 만다는 것이 <암흑가의 두 사람>의 기본 뼈대다.


<암흑가의 두 사람>을 보며 안타까웠던 첫 번째 이유는 지노의 부인 소피에 있었다. 소피는 남편 지노의 출소를 10년이나 기다리며 지노가 좋아하는 곡을 음반으로 틀고 있었던 순애보적 여인이다. 그럼에도 남편의 출소로 행복이 보이려는 순간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되니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겨우 재회하여 사랑스러운 장면을 연출하는 소피와 지노를 보며 행복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던 관객에게 소피의 죽음은 그야말로 날벼락이었다. 그로부터 서서히 시작되는 지노의 불행은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다.



<암흑가의 두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저 인간 없었으면 싶은 캐릭터 얘기를 꺼내지 않을 수가 없다. 당연히 그 인물은 앞서 말한 ‘한 놈’에 해당되는 경찰 그와트로다. 지금 용어로 정의하자면 갑질의 대가 또는 꼰대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을 인간형이다. 공권력의 상징이랄 수 있는 경찰 공무원이니까 더욱더. 한마디로 지노가 그를 죽이고 싶은 마음에 대부분 공감할 거라는 생각을 충족시키고도 남는 캐릭터다. 역설적으로 보자면 그와트로 덕분에 <암흑가의 두 사람>의 안타까움에 힘이 실렸다고 볼 수 있다. 요즘 영화의 빌런처럼 너무도 정교하게 악랄한 모습이 아니라 자신의 권한을 이용하여 사람 함부로 대하는데 이력이 붙어 있는 보통 인간이다. 자기 사랑에 여념이 없고 자기 역할에 대한 자부심으로 꽉 차 있는 동시에 남의 얘기는 귓등으로도 안 듣는 그런 인간. 정말 리얼한 캐릭터였기에 그 미움이 극에 달하는 느낌을 경험할 수 있었다.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아서 혹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죽자고 해서 미움 사는 인간의 표본이다. 

 

출소 후 처음 만난 지노와 그와트로
제르맹과도 접축하는 그와트로
지노의 연인 루시에게 지분거리며 협박하는 그와트로




지금은 모르겠지만 프랑스라고 하면 흔히 ‘톨레랑스(Tolerance)’라는 단어를 떠올리던 시절이 있었다. "관용"이란 번역어를 사용하며 의견이 달라도 차별하지 않고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그렇게 관대한 문화를 가진 나라인데도 사형에 단두대를 사용한다는 사실에 놀랐다. 목을 친다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도 사극에서나 들리는 얘긴데 단두대에서 목을 치는 방법으로 사형을 집행하다니, 라는 생각에. 어쨌든 단두대는 같은 죄에 같은 벌을 준다는 취지로 생겼다고 하니 그것도 나름 공정으로부터 비롯된 셈이다. 


<암흑가의 두 사람>의 감독이자 각본을 쓴 조세 조반니는 프랑스의 사형수였던 적이 있었다. 살인 용의자로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1949년 대통령령에 의해 사면되었다고 한다. 사형수 입장이 되어보기도 했던 조세 조반니 감독은 그런 사형제도에 반대한다는 의도로 각본을 쓴 것이다. 영화에서 지노가 느닷없는 부름에 깜짝 놀라 일어나면서부터 사형이 집행되기까지의 과정을 자세히 보여준 것이 바로 그런 의도였다. 죽는다고 하더라도 묵직한 칼날에 의해 목이 떨어져서 죽고 싶을 리는 없으니까. 관객들은 지노의 모습을 지켜보며 아주 짧은 시간이나마 그런 입장이 되어보았으리라. 삶이란 게 허망하다고들 하지만 목이 떨어져 나간 주검을 수습해야 하는 가족들의 심정은 어떻겠는가. 이 영화가 영향을 주었는지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프랑스에서의 단두대 사용은 1977년이 마지막이었고, 1981년에는 사형제도도 폐지되었다고 한다. 


제르맹이 고민하는 표정으로 앉아 있다가 지노의 사형집행을 참관하겠다고 마음먹고 일어나는 장면이 있다. 지켜보고 싶지는 않지만 마지막으로 얼굴이라도 보겠다는 생각에 나섰을 것이다. 지노와 제르맹이 집행장에서 만났을 때 지노가 건넨 마지막 말은 “무서워요.”였다. 믿을 수 있는 이에게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드러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대단히 히트했던 드라마 <모래시계>에서 사형을 기다리던 박태수(최민수)가 절친 강우석(박상원)에게 건넨 말이 있었다. “나 떨고 있냐?”라는. 그 대사도 히트를 날렸었다. 그걸 보며 떠올랐던 영화가 바로 <암흑가의 두 사람>이었다. 영화나 드라마의 주인공이라면 죽음을 앞두고서라도 대범하고 장렬한 말을 남기는 게 일반적이다. 좀팽이가 아닌 멋진 주인공의 입에서 무섭다는 말이 나오기는 쉽지 않은데, <암흑가의 두 사람>에서는 그랬다. 지금 봤다면 더 짠한 마음이 들었겠지만 그때는 농담한 걸로 오해할 정도로 이색적인 대사라고 생각했다.

 

"무서워요."




<암흑가의 두 사람>이 나온 지 반백 년도 더 지났으니 세월이 많이도 흘렀다. 당시의 프랑스와 한국은 여러 면으로 차이가 컸었는데. 프랑스와 상대가 안 되던 한국 중학생의 어린 시선으로 보기에는 은행강도 두목까지 했던 사람을 저렇게 믿는 사람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저러니 선진국이라는 말을 듣나 보다 싶기도 했고. 제르맹 외에도 그의 가족들 그리고 지노가 취업한 공장 사장 그리고 마지막에 지노를 변호한 여성 법조인 등 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지금은 한국 영화에 그런 캐릭터들이 등장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우리도 달라졌다. 그렇지만 선진국이든 후진국이든 그때든 지금이든 혹은 다가올 언제가 되었든 저런 경우에 무슨 뾰족한 방법이 있을까 싶다. 다른 입장에 있는 이들의 생각이 어우러지지 않을 게 뻔하니까 말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영원한 숙제일지도 모를 일이다.


인간관계란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다. 굳이 전과자의 입장만 얘기할 일도 아니다. 멀쩡한 사람들 간에 터무니없는 이유로 분쟁이 발생하고 그로 인한 사건 사고가 날마다 벌어지고 있다. 그런 일들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는 사회적 시스템이란 게 존재하기나 할까? 우선적으로 필요한 건 사회 구성원들의 노력이 아닐까? 아무리 이리저리 물어보아도 명쾌한 답이 나올 리 없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먼저 그와트로처럼 본인만이 해답을 가진 듯 구는 사람이 줄어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선입견이나 편견으로 무장하고 시작되는 관계에서 무슨 해결책이 얻어지겠는가. 별로 사용되지 않다가 언젠가부터 떠오르기 시작한 단어가 있다. 그런 게 필요하니까 생긴 현상 아닐까 싶은데, ‘소통’ 말이다. 자신이 세운 벽을 낮추고 소통을 위한 노력을 한다면 지노와 제르맹 같은 관계가 만들어지겠지만, 불통으로 일관한다면 그와트로 역할밖에 더 맡겠는가.


"인생은 연극이다." 라는 말을 남긴 철학자 에픽테토스의 시대에는 영화가 없었다. 지금은 영화를 보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아졌으니 저 말을 응용하여 "인생은 영화다." 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암흑가의 두 사람>은 인생에서 맡고 싶은 역할보다는 맡으면 안 되겠다는 역할이 눈에 띄는 영화였다. 




보태는 말

2024년 8월 18일, <암흑가의 두 사람>을 제작도 하고 지노 역할을 맡아서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던 알랭 들롱이 별세하였다. <암흑가의 두 사람>은 개봉 당시에도 많은 관심을 받은 영화이고 흥행에 성공한 영화였다. 그때 작가, 배우, 영화평론가의 짧은 감상평을 영화 신문광고에 실어서 선전하기도 했었는데, 배우 박노식과 영화평론가 정영일의 것이 실려있다.


'들롱'과 '가방'의 마지막 공연 작품이 되어 아쉽다. 은퇴를 선언한 '장 가방'의 모습을 잊고 싶지 않아 몇 번이고 보고 또 보고 싶은 영화다. (배우 감독 박노식)


빅토르 위고의 “장발장”을 연상케 했다. 라스트 사형대로 끌려가는 지노의 최후! ‘들롱‘의 맑고 슬픈 표정... ’가방‘의 무언의 눈동자는 이 순간에도 잊을 수 없다. (영화평론가 정영일)



정영일과 박노식의 감상평이 실린 부산일보 신문광고



신문칼럼에서는 이렇게 영화의 평을 하였다. 


도입부에서 교도소 인쇄기의 구멍을 통해 등장했던 '알랭 들롱'의 얼굴이 마지막 시퀀스에서 단두대의 구멍을 통해 클로즈업됐다 사라지는 것은 감독의 치밀한 계산인듯하다. (동아일보 "영화단평")


알랭 들롱의 인간미와 연기미가 동시에 부각된다. (경향신문 "영화")



1974년 7월 13일 동아일보 "영화단평'


1974년 6월 29일 경향신문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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