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시절의 추억, <저 하늘에 태양이>
<저 하늘에 태양이>는 중학교 시절 단체 관람으로 본 영화였다. 어린 소녀의 불행과 용기 그리고 아름다운 사랑, 포근하고 감미로운 주제가로 감성이 엄청 무딘 이도 자극받을 만하다고 느껴지는 영화였다. 그것과 관계없이 내게는 저절로 따라붙는 기억 한 조각이 있는 영화기도 하다. 영화를 보며 감상에 젖고 싶어 죽겠는데 옆에 앉아서 쓸데없는 소리로 방해하는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꽤 웃기는 친구였는데 그런 자신의 특기를 극장에 앉아서도 발휘하겠다는 악수를 둔 것이다. 몇 마디 듣다 보니 도저히 참기 힘들어서 엄청 화난 표정으로 위협(?)을 가했고 영화 끝나고 나와서도 성질부리고야 말았다. 결국 <저 하늘에 태양이>라는 영화에 부록처럼 붙은 상흔의 기억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미안했던 감정도 흐릿해질 정도로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저 하늘에 태양이>라는 영화를 잊을 수 없는 이유로 가끔 작용하는 듯하다.
<저 하늘에 태양이>는 제목이 이야깃거리가 되는 경우가 많다. 이 영화의 원래 제목인 영어 제목은 <The Other Side of the Mountain (산 너머 저쪽)>인데, 우리나라 광고에서는 ‘A Window to the Sky (하늘을 향한 창)’로 씌어 있었기 때문에 지금도 그렇게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올리비아 뉴튼 존이 불렀던 주제곡의 제목도 ‘A Window to the Sky’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냥 그렇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엔딩 크레딧이나 미국에서 발매된 OST 음반에는 주제가의 제목이 ‘Richard’s Window’라고 되어 있으니 헷갈릴만하다. 알고 보니 영국에서는 ‘A Window to the Sky’라는 제목으로 상영했고, 유럽과 일본에서도 그런 영어 제목을 사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 엄격히 말하자면 제작국이기도 하고 상영일이 제일 빠른 미국에서의 제목(The Other Side of the Mountain)이 맞다고 할 수 있겠지만 다르게 붙여진 제목(A Window to the Sky)으로 공식 상영한 나라들이 많았기 때문에 우리나라 역시 그 제목을 사용했다고 해도 이상하진 않을 것 같다. 지금은 노래 제목도 ‘Richard’s Window’와 ‘A Window to the Sky’를 같이 사용하고 있다.
이 영화의 실제 주인공 질 킨먼트(Jill Kinmont)를 처음 본 것은 초등학교 때였다. 누군지 알고 본 것이 아니라 한 장의 사진을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두꺼운 책이 있어서 보니 전부 사진으로 되어 있었는데, 사진 잡지 <라이프>의 모음집 같은 것이었다. 그 속에 휠체어를 타고 머리를 뒤로 젖힌 사람의 흑백사진이 꽤 인상적이라고 생각했기에 기억에 남았는데 그 사람이 바로 질 킨먼트였다.
<저 하늘에 태양이>는 우리나라에서 서울 개봉관에서만 20만에 가까운 관객이 들었다고 하니 제법 흥행에 성공한 작품이다. 슬픈 사랑에 약한 우리나라 정서에 맞는 작품이라서 어느 정도 예상되는 결과이지 않았을까. 그런데 주인공이 너무 시련의 연속이라서 꾸며낸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었다. 그래서 실화라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는 이야기도 많이 돌았던 영화였다. 당시 신문 칼럼이나 광고에 실린 내용을 보면 그런 분위기도 엿볼 수 있고, 영화에 대한 평가가 꽤 좋았다고 느껴진다.
나는 이 영화가 실화였다는 것을 알고 더욱 놀랐다. 인간이란 어떤 역경에서도 집념과 의지와 그리고 밝은 마음을 버리지 않아야 한다는 고귀한 교훈을 남겨주는 영화였다. (유현종 작가, 경향신문)
이것이 만일 실화가 아니고 소설이었더라면 믿을 수 없으리만큼 어린 소녀에게 불행이 겹쳐오므로 작가가 좀 너무했다는 원망도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한 여성의 생생한 기록이어서 더욱 감동을 주는 것이었다. (박현영 시인, 경향신문)
한마디로 감동적인 양화(良畵). 진짜 용기는 무엇이며, 진짜 인간의 의지란 어떤 것인가를 강한 충격과 감동 속에 보여주는 올해 수입 외화 중의 1급 필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영일 평론가, 조선일보)
저는 영화가 끝났으나 눈물이 가득해 일어서지 못했어요. (배우 임예진, 신문광고)
소리 높여 추천하고 싶다. 오랜만의 우수영화라고. (정영일 평론가, 신문광고)
이랬던 우리나라에서의 평가하고 주인공 질 킨먼트의 나라 미국의 평가는 다소 달랐다. 이 영화는 블록버스터라고 할 수 있는 대작도 아니고, 아카데미상에 대거 후보 지명되거나 수상한 화제작도 아니었지만, 당시 제작사인 유니버설 영화사에 큰 도움을 줬을 만큼 흥행에는 나름 성공한 영화였다. 그것의 역효과였는지 작품성에 있어서는 냉랭하게 평가하는 언론들이 많았다. 영화의 포인트를 소위 신파조 최루물(催淚物)에 두었다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그래서 영화가 지나치게 감상적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LA타임스에서는 이 영화에 대해서 “확실한 공식으로 짜인 최루물 영화(a surefire formula tearjerker)”라고 표현했고, 뉴욕 타임스에서는 “손수건은 많이 챙겨 오고 이성은 집에 두고 오는 게 좋을 것”이라고도 했다. 그런 평가 중에서 좋은 평가라고 할 수는 없지만 개인적으로는 시카고 트리뷴지에서의 논평 일부분이 제일 귀에 들어왔다.
“실제 인물이 관련된 이야기가 아니었다면 영화가 동정이나 감탄을 지나치게 유도한다고 좀 더 편하게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4점 만점에 2.5점을 주었으니 영화 작품성에 높은 점수를 주진 않았다. 하지만 영화의 성향으로 작품의 모든 것을 판단할 문제는 아니란 사실이 반영된 코멘트란 생각에서다. 그놈의 눈물 때문에 작품에 대한 점수는 많이 주지 못했어도 이것이 질 킨먼트의 얘기이기 때문에 함부로 말하기 어렵다는 느낌으로 들렸다. 눈물 빼기 위한 공식에 맞추었다는 얘기는 영화에 대한 것이지 사람에 대한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울리는 데 치중함으로써 흥행에 성공한 것으로 보이니 작품에 대한 평가는 박하게 할 수 있지만 질 킨먼트의 끔찍한 불행과 불굴의 의지에서 느껴지는 감정에야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라는 속내가 포함된 얘기로 들리더란 것이다.
눈물의 영화에 대해서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우리나라는 그놈의 정(情) 때문에 막장 드라마라도 히트 날리는 면이 있다. 권선징악과 눈물 짜내기 공식에 휘둘리는 관객이 많다는 의미다. 하지만 그런 공식이 적용되는 관객이라고 해서 바보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관객들이 그만큼 감정이입의 대가라고 평가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지 않은 현실을 혹은 그런 현실을 살아왔기에 영화나 드라마에서라도 권선징악이 되었으면 좋겠고 너무 안타까운 상황을 보며 마음껏 울어라도 봤으면 좋겠다는 마음 가득하면 그럴 수 있는 일이니까.
<저 하늘에 태양이>를 당시 감상한 우리나라 시인은 소설이라도 저렇다면 작가가 원망을 들었을 만큼의 불행이라고 지적했다. 그런 지독한 불행과 그로 인한 슬픔 그리고 고통을 도대체 어떻게 더 냉정(冷靜)하게 표현하란 말인가? 그게 가능하다 한들 그래서 얻어지는 건 무엇인가? 냉정한 비평가들의 좋은 평가와 유수한 영화제의 상인가? 그런 것을 얻는 데만 박수를 보내고 싶지는 않다. 우리나라에서는 충분히 많은 최루물 영화가 만들어졌기에 제법 경험을 해보기도 했지만 <저 하늘에 태양이>가 욕먹을 만큼의 최루물 영화라면 기꺼이 욕먹을 영화 보며 우는 관객이 될 용의가 있다. 질 킨먼트에게 주어지는 불행이 너무 기가 막히고 그것으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극복하려는 그녀의 모습에 터진 눈물이었지 누군가 끝없이 징징거려서 만든 억지스러운 눈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장면을 냉정하게 연출했다고 하더라도 관객은 상황을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도 감지하기 때문에 저런 상황을 알고도 슬프지 않을 리는 없다. 우는 것은 스트레스 해소나 심리적인 안정감에도 좋다고 하는데 이런 정당한 과정에 의한 건전한 눈물이 무슨 문제일까.
<저 하늘에 태양이>를 보면서 울컥했다기보다 찡하게 다가오는 장면이 있었다. 그것은 질 킨먼트(마릴린 해셋)에 의한 것도 아니고 질의 사랑 딕 뷰익(보 브리지스)에 의한 것도 아니었다. 질이 장애를 입은 후 장애인들의 모임에 갔을 때 발생한 상황이었다. 거기 있는 장애인들이 무슨 대단한 장애인이 왔냐며 자조(自嘲)하듯 비웃는 모습을 보일 때 한 사람만은 질을 그렇게 대하지 않았다. 질과의 대화에서 보여준 그 사람의 의지는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그것은 “내일 죽어도 사과나무 한 그루 심겠다”는 요지의 유명한 말과 같은 맥락이었는데, 질이 이 사람과의 만남에서 뭔가 해내겠다는 불굴의 의지를 다지게 되었다는 맥락으로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질이 그에게 다른 장애인과는 생각이 달라 보이는데 이유가 있냐고 묻는다. 그의 대답은, 다른 이들은 영원히 장애를 안고 살아야 한다는 부담이 있지만 자신은 다르다고 한다. 1년 시한부 인생이라서 곧 죽을 것이라고, 그래서 낭비할 시간이 없다고. 지금 하는 일이 뭐냐고 물으니, UCLA 석사과정에 다니고 있다고 답한다. 그러면서 공부를 못해서 배우는 데 자신이 없다는 질에게 시력을 잃게 되면 청력이 좋아지는 법이라며 시작하라고 얘기한다. “오케이?”라고 부추겨 보는데 질이 대답을 주저하자 “오케이라고 해요!”라며 마무리짓는다. 한마디로 감동이었다. 대학을 졸업할 즈음 TV에서 이 영화를 다시 볼 기회가 있었다. 그때 이 장면을 보면서 자신이 마구 부끄럽게 느껴졌던 기억을 최근에 영화를 다시 보며 되찾았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다시 본 <저 하늘에 태양이> 역시 감동적이었다. 중학생이나 대학생 언저리가 아닌 시점에서 봐도 여전히 감동적이다. 흔히들 말하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나름의 해답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정상을 눈앞에 두고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험을 해본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절실한 사랑을 한순간에 잃어 본 경험을 해본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도 모른다. 그 둘을 합친 경험을 해본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는 전혀 모른다. 차라리 가지지 않았으면 잃을 것도 없을 터인데 코앞에 갖다 놓고 빼앗아 가는듯한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따지는 게 좋은지는 죽어도 모른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면서 울리고말고 어쩌고 저쩌고 따지고 싶은 생각은 지금까지도 없었고 지금부터도 없을 것이다.
이 영화 주인공의 실제 인물이었던 질 킨먼트는 암울함으로 뒤덮여 보였을 세상을 투정이 아니라 긍정하며 열심히 살다가 2012년에 떠났다. 그녀가 가장 어려웠을 때의 사랑이었던 딕 뷰익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그에게 들었다는 말도 씹을수록 진국이다.
“그런 사람을 알게 되었다는 게 얼마나 행운인가. 헤어질 때 인사로 하는 말조차 끔찍하게 하기 싫게 만드는 그런 사람 말이다.”
"How lucky I am to have found someone and something that saying goodbye to is so damned awful. “
질 킨먼트의 이야기를 E.G. Valens라는 사람이 쓴 <A Long Way Up>이라는 책을 한번 읽어 보고 싶다. 영화를 보고 냉랭했던 당시 미국 언론의 반응은 이 책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녀의 필사적인 노력과 진솔한 생각이 담긴 책일 것 같아서다. 그래서 영화는 불행한 이야기만으로 울리는데만 신경 썼다는 비판이 따르지 않았을까,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