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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밥 Sep 10. 2024

누가 할 수 있는 말인가?  <이것이 법이다>

중학교 시절의 추억, <이것이 법이다>

  

중학교 입학 후 첫 여름 방학을 맞았다. 그리고 광복절을 맞았는데 그때 개봉된 영화가 있었다. 말로만 듣던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더티 해리> 속편이란다. 제목조차 엄청난 <이것이 법이다>. 문제는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요금에는 ‘일반’ 밖에 보이질 않는 것이었다. 소위 “미성년자 관람 불가” 영화인 것이다. 너무나 궁금하고 보고 싶지만 고민해 봤자 개봉관에서 볼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세상일이란 게 거의 그렇다시피 시간이 나름의 답이었다. 그 영화가 재개봉관으로 넘어오게 되면 중딩에게도 기회는 주어지니까. 그런 인내와 기다림을 통해서 겨우 보게 된 영화가 <이것이 법이다>였다.      

 





이것이 법이다 (Magnum Force, 1973)


<이것이 법이다>라는 용감한 제목의 영화가 개봉되었을 때 영화에 넋이 나간 신출내기 중학생의 눈을 가장 현혹한 문구는 “<황야의 무법자>와 <더티 해리>의 「이스트우드」가 돌아왔다”는 신문광고 카피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황야의 무법자>도 <더티 해리>도 그때까지 보지를 못했으니까.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건 플레이와 액션이 기가 막힌다는 얘기를 엄청 들어서 이미 전설이 되어 있었던 영화였다. 초등학교 시절 <벤허>를 보러 갔을 때 건너편 극장에서 상영하고 있었던 <더티 해리>를 보러 가자고 꼬셨던 누나 친구의 말이 새삼 정답이었나 싶었을 정도로 사춘기 소년의 마음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무언가를 향해 달리고 있었던 때였다.      



<이것이 법이다>의 원제는 <매그넘 포스(Magnum Force)>. ‘매그넘’은 영화에서 소개도 하듯 강력한 권총의 이름이고, 그 뒤에 ‘포스’라는 단어가 붙었으니 매그넘 권총같이 강력한 힘이란 의미로 보인다. <이것이 법이다>는 “미친개에는 몽둥이가 약”이라는 속담을 모토로 생각하는 경찰 즉 더티 해리의 말일 거라고 생각했다. 법정까지 갈 것도 없이 잘못한 놈에겐 “이것부터가 법”이라는 개념으로 몽둥이를 휘두르는 그런. 영화를 보기 전에는 그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했다. 생각이 제대로 박힌 경찰이라면 그렇게 법을 집행할 수도 있겠거니 하고 말이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부터 헷갈리기 시작했다. “이것이 법이다!”는 도대체 누구의 주장인가?


악을 응징하는 경찰 히어로 액션물이라고 생각하고 <이것이 법이다>를 상영하는 재개봉관을 부리나케 찾아서 보러 갔던 소년에겐 속시원한 해결이 아니라 고난도의 의문이 일었던 영화였다. ‘더티’ 해리 캘러핸(클린트 이스트우드)이 용감무쌍한 마음으로 뱉은 말이라고 생각했던 제목이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이것저것 귀찮게 구는 건 모두 싫은 해리지만 그 무엇보다 제일 싫은 것이 ‘악(惡‘)’ 즉 ‘나쁜 놈’이다. 그래서 “이것이 법이다!”라며 마구 나쁜 놈을 물리치는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문제는 상대가 해리와 같은 ‘경찰’ 신분이란 것이다. 물론 경찰이 나쁜 놈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런대로 어렵지는 않을 텐데 웬걸, 아주 나쁜 놈이면서 벌을 피해 가는 놈을 처단하고자 하는 경찰이 더티 해리의 적이라는 것이다. 이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운 상황인가. “권선징악”이란 주제를 대놓고 걸어놓은 영화나 만화에만 익숙했던 중학 초년생에게는 초난감 상황이 닥친 셈이었다.

 

따지자면 <이것이 법이다>는 “경찰 VS. 경찰”이란 구도임에는 틀림없다. 경찰의 철학이나 범죄자에 대한 인식 문제였다면 상황이 조금 복잡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불법적 인명 손실이 따르는 문제였기에 더티 해리를 등반시켜 처리할 수 있는 액션 영화로 복잡 수위를 낮출 수 있었다. 브릭스 경위(할 홀브룩)가 주도한 암살단 팀은 모두 경찰이지만 인정사정없는 킬러로 보일 만큼 무자비했고, 그들의 앞길을 막을 듯 보이는 대상은 모두 죽이려 들었다. 같이 소속되어 있는 경찰까지도. 그런 식으로 구도를 잡았기에 그들에게 빌런의 역할을 지우기는 쉬웠다. 새파랗게 젊고 잘생긴 그들이 왜 그런 무자비한 킬러 경찰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말이 없었다. 글쎄, 그들에게 변명할 기회를 주지 않았던 것은 액션 범죄 장르로서 뚜렷한 각을 잡고 시작한 탓이었을까. 영화에서 처음에는 경찰 복장을 한 의혹의 인물이라는 인상을 주다가 결국 경찰과 경찰의 대결이라는 상황이라는 암시를 한다. 사격 시합에서 해리가 경찰이 그려진 과녁을 쏘는 장면에서 그것을 느꼈다. 처음 볼 때는 해리의 실수라고 생각했지만 다음에 보니 해리의 경고 내지는 복선과 같은 느낌이었다.



이 영화는 각본을 쓴 존 밀리어스가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아이디어를 제시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마음이 동했던 것은 이 영화의 전편에 속하는 <더티 해리>에서 일었던 논란을 바로잡고 싶은 마음에서였다고 한다. <더티 해리>는 유명한 영화평론가로부터도 노골적인 파시스트 영화라는 비난을 받는 등 경찰이 제 생각만으로 폭력을 마구 휘두른다는 데서 비롯된 논란이었다. <이것이 법이다>의 플롯은 상대적으로 그 반대편에 있다. 악이라면서 무자비하게 무력을 휘두르는 불법적 경찰 집단을 상대로 법은 지켜져야 한다는 기본적인 틀을 지키려는 더티 해리의 활약을 그린 것이니까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이것이 법이다’라는 제목이 어떻게 심의를 통과했는지 신기하다. 원래의 제목과도 다르고 베낀 것인지 협정을 맺는 것인지 거의 같은 제목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던 일본 제목 - <ダーティハリー 2 (더티 해리 2)> - 과도 다르다. 누가 보더라도 더티 해리의 빈번한 무력 사용을 빗대서 지은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 제목이다. 조그만 기관에서도 공권력을 다소 남용했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 아이러니가 느껴지기도 한다. 제 발이 저릴 정도의 도둑이 아니라면 의미 없는 얘기긴 하지만. 어쨌든 '더티 해리'는 문제 삼을 구석은 있지만 사회악의 처단자로서 대중들의 환호를 받은 히어로였다. 당시로서는 그 환호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액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지만, 날이 갈수록 그 믿음과는 다른 면이 눈에 들어왔는데 그 단초를 던져주었던 영화가 바로 <이것이 법이다>였다.





<이것이 법이다>의 아이디어는 브라질의 암살단(Esquadrão da Morte, 죽음의 부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1960년대 중후반 브라질 군사 독재정권 시기에 특수부대원과 경찰을 대상으로 모집해서 활동했던 단체였다. 법적인 제재 없이 인명 살상이 가능하도록 결성된, 음성적이긴 했지만 공적인 지원을 받았던 암살단이었다. 처음에는 법적으로 처벌할 수 없는 범죄자 척결에 목적을 두었다지만 갈수록 정치적 암살과 정권에 맞서는 세력을 대상으로 그 성격이 변질되었다고 한다. 결국 독재정권의 앞잡이 역할이었던 셈이다. 아무리 좋은 목적인들 과정이 그릇 되어서야,라는 말이 떠올려지는 대목이다. 권력을 등에 업은 세력이 좋은 역할을 하기에 힘든 꼴이야 우리도 많이 경험한 터라 저런 상황이 낯설지는 않다.


공권력이란 남용되어서도 안 되지만 상실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평화도 유지해야 하고 질서도 유지해야 하니까 말이다. <이것이 법이다>는 그것을 이슈로 삼은 영화는 아니었어도 그것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메시지는 느껴지는 영화였다. 주인공은 해리 캘러핸이지만 메시지의 키를 잡고 있는 쪽은 경찰 암살단 조직이었다. 만인이 악이라고 생각하는 쪽을 처단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본다면 단순 빌런과는 좀 다른 성격이다. 이 경찰 암살단 조직은 흔히 말하는 자경단(비질란테) 같은 역할을 했다고도 할 수 있다. 자경단이란 공권력이 하지 못한 혹은 하지 않은 일을 하겠다는 단체니까.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더티 해리가 좀 무작하긴 해도 결코 자경단이 아니란 점을 얘기하고 싶었단다. 법치를 훼손하는 자경단을 해치우는 역할을 하니 자경단이 아니라는 논리를 적용하고 싶었나 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보통 자경단이 아니라 별난 자경단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보이고 싶었던 것 같다. 인종주의로 유명한 미국의 KKK단도 자경단에서 시작된 단체라고 하니까 말이다.



<이것이 법이다>에서 경찰 암살단의 등장에 개연성이 부족한 면이 세월이 갈수록 아쉽게 느껴진다. 그들이 좀 더 사회에 대한 의식을 드러내 보이고 자신들의 역할에 대한 고민을 조금이나마 보였더라면 덩달아 더티 해리도 고민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배트맨을 엄청나게 고민하게 만듦으로써 <다크 나이트>가 명화로 등극했듯, 악이라고 생각하는 상대에 대해서만은 극단적으로 단순해 보이는 더티 해리의 고민이 들어갔더라면 <이것이 법이다>가 어떤 영화로 재탄생했을지 궁금하다. 영화란 애초에 생각했던 방향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불이 지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느낀 영화가 <이것이 법이다>였다.


이것이 법이다! 이것이 법이다? 이것이 법이다.




보태는 말

개봉해인 1974년 신문칼럼에 <이것이 법이다>의 비평이 실렸다. 거기서는 영화에 큰 점수는 주지 않고 있지만 미국의 법에 대해서 '정당한 법절차'와 '증거주의'가 근간을 이룬다고 보며, 더티 해리는 그런 것에 신경질적 반발을 보이는 캐릭터라고 해석하고 있다.




더티 해리의 다정한 표정이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해리의 과거를 상상하게 만드는 장면이다. 전편인 <더티 해리>에서 해리를 치료하던 의사가 부인 얘기를 조심하는 장면 또한 관객을 상상하게 만드는 장면인데 그 답을 은근히 보여주는 장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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