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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밥 Sep 24. 2024

사랑의 스잔나? 사랑의 추하!

중학교 시절의 추억, <사랑의 스잔나>

영화 한 편으로 여배우를 좋아했던 적이야 많지만, 그 한 편만으로 끝까지 좋아해야 할 것처럼 의리를 지킨 경험은 단 한 번뿐이다. 그 한 편 영화의 제목은 <사랑의 스잔나>였고, 그 여배우의 이름은 진추하였다. 사춘기 소년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는 여배우가 한 둘이었겠는가만은 단 한 편의 영화로 꽤 오랜 기간을 최고로 좋아하는 여배우라는 생각을 지켜내기는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특히나 그 영화 자체는 그다지 좋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건 오직 본인의 이름이기도 하면서 영화에서의 이름으로도 사용되었던 추하(秋霞)라는 이름의 캐릭터 때문이었다.






사랑의 스잔나 (秋霞 / Chelsia My Love, 1976)


1976년에는 우리나라 영화에 한 획을 긋는 여배우 두 사람이 등장했다. 한 사람은 지금도 드라마나 영화에서 얼굴을 볼 수 있는 임예진이 소위 하이틴 영화라는 장르의 붐을 일으키며 등장한 것이고, 또 한 사람은 한국과 홍콩의 합작 형태 영화로 그해 우리나라 영화 흥행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등장한 진추하였다. 두 사람 다 그전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었는데 각자의 주연 영화 한 편이 엄청난 히트를 날린 것이었다. 임예진의 <진짜 진짜 잊지마>와 진추하의 <사랑의 스잔나>가 바로 그 히트작이다. 두 영화의 공통점이라면 여주인공이 마지막에 세상을 떠난다는 점과 주연 여배우의 매력이 영화 성공에 제일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었다. 임예진이란 하이틴 배우의 인기는 다른 영화도 여러 편 찍으면서 어느 정도 지속되었지만, 가수이기도 했던 진추하는 후속작이 제대로 없어서 배우로서의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기간은 정말 잠깐이었고 대부분의 관객이 <사랑의 스잔나>로만 기억하는 배우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사춘기를 거의 이소룡에게 갖다 바치게 됨으로써 로맨틱한 영화에는 오히려 악영향을 받은 점이 없지 않았다. 연애에 관심 없는 사춘기 소년이 있을 리 없는데도 애정 영화에는 관심 없다는 오만한 생각을 가졌다. 그래서 로맨틱 코미디라면 몰라도 사랑과 증오로 밀당하는 얘기라면 질겁을 했고, 애틋한 사랑 이야기는 오글거린다며 관심 없는 척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남들이 다 본다니 그냥 지나칠 수 없다는 걸 핑계로 보는 영화도 있었는데, 그렇게 보게 된 영화가 <사랑의 스잔나>였다.


<사랑의 스잔나>는 척하면 착이라고 할 만큼 예상이 가능한 영화였다. 광고를 보더라도 선하게 예쁘게 생긴 소녀의 얼굴이 걸려 있고, 제목에는 이미 알고 있었던 ‘스잔나’라는 이름이 들어 있고, 선전 문구에는 “비록 죽음이 너와 나를 갈라놓는다 해도... 하늘도 흐느낀 연인들의 애정...”라고 되어 있으니 너무나 뻔하다고 생각했다. 광고부터 오글거리는 문구에 짠한 느낌으로 도배한 영화다 보니 처음부터 보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제대로 이야기나 갖추고 찍은 건지 알지도 못하는 배우들이 얼마나 그럴듯하게 연기를 할지 등등이 걱정될 만큼 당시 주로 방화(邦畫)라고 불렀던 우리나라 영화에 믿음을 갖지 못한 탓이기도 했다. 홍콩과의 합작영화라고는 하지만 그렇게 포장된 영화를 봐도 소위 도긴개긴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거기다가 영화 수준이야 어떻든 옆에 앉은 여성분들이 노소를 불문하고 엉엉 울어댈 게 뻔하니 그런 분위기에 멀뚱하게 앉아있기도 그렇고. 온갖 핑계를 생각하며 보러 가지 않고 버텼던 영화였다는 얘기다. 하지만 굉장히 많이 보러 갔다는 얘길 들었고, 홍콩 여배우와 그녀의 노래에 대한 얘기도 무성하니 그 유혹에 버틸 재간은 없었다. 이유도 안 되는 이유로 버티다가 2류 극장에서 보았지만 결국은 소문의 여배우와 소문의 노래에 완전히 빠져 감탄하며 나왔다.


고백하지만 <사랑의 스잔나>는 큰 틀에서는 예상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리칭 주연 <스잔나>라는 영화의 중국어 제목이 주인공 이름 <샨샨(珊珊)>으로 붙여진 것처럼 <사랑의 스잔나>의 중국어 제목도 극 중 주인공 이름이기도 한 <추하(秋霞)>로 붙여져 있고, 예전의 히트작 <스잔나>와 비슷한 스토리 구성에 아버지 역할도 같은 배우 관산이 맡았고, 여주인공이 노래를 부른다는 면에서도 닮았으니 리메이크라고 해도 될 정도로 <스잔나>를 베끼듯 찍은 영화로 보였다. 그런데 <스잔나>에 비하면 줄거리도 빈약해 보이는 데다 합작영화라서 그런지 뭔가 어색하게 느껴지는 구석도 많았다. 한마디로 잘 만들어진 영화라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오로지 여주인공과 노래만 우뚝 서 있지 다른 도움은 별로 받지 못했다는 느낌이랄까. 사실 정확히 그때 그 버전의 <사랑의 스잔나>는 그 이후에는 본 적이 없다. 뒤에 출시된 비디오테이프 버전이나 지금 OTT에서 볼 수 있는 버전은 홍콩판으로 우리말로 더빙된 합작 버전이 아니라서다. 극장에서 본 합작 버전 영화의 어디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홍콩과 합작했다는 영화를 보면 어떤 영화든 우리나라 상영 버전이 거의 모든 면에서 허술해 보였기에 막연하게나마 그런 느낌 때문에 곱게만은 기억하지 못한 게 아닐까 싶다.



<사랑의 스잔나>는 그해 최고의 관객(171,239명)이 든 국산 영화로 기록되어 있다. 그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도 여주인공 진추하의 외모와 음악적 퍼포먼스에 있었는 생각이다. 우선 그녀의 얼굴이 독특하게(?) 청순하고 앳되어서 순정파 여주인공 캐릭터에 잘 어울렸고, 그녀가 불렀던 노래들이 서정적인 가사에 우리 정서에 잘 맞는 풍의 멜로디였기 때문이다. <사랑의 스잔나>가 우리나라에 개봉된 이후, 영화에 삽입되었던 노래 ‘Graduation Tears’‘One Summer Night’은 하루라도 안 듣고 지나간 날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엄청난 히트를 기록했다. 그 노래들은 라디오는 물론이고 거리에 숱하게 있었던 레코드점 스피커에서도 날이면 날마다 흘러나왔다. 그해 겨울의 졸업식은 ‘Graduation Tears’로 물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목 그대로 졸업의 노래였기 때문이다. “이제 책과 이별할 시간입니다.”로 시작해서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감사드립니다.”로 끝나는 가사이니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해 겨울에 졸업했던 학생들은 이 노래를 들으며 눈물깨나 뺐을 것이다. 그해 졸업한 당사자로서 눈물까지 흘리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센티멘털한 분위기에 젖었던 기억은 있다.


<사랑의 스잔나>의 OST 음반 발매에는 당시의 인기를 가늠할 수 있는 사연도 남겼다. 당시 우리나라는 소위 ‘빽판’이라고 일컫던 불법복제 음반이 성행하던 시절이어서 영화 삽입곡들이 인기를 얻자 가장 먼저 쏟아져 나온 음반은 무수한 버전의 빽판들이었다. 그러다가 정식 음반이 발매된 것은 오아시스 레코드사에 의해서였는데, 홍콩에서는 음반의 판권이 폴리도르(Polydor)란 회사에 있었고 폴리도르와 계약 맺고 있었던 우리나라 회사는 성음사였던 것이 문제였다. 결국 처음에 판매된 OST 음반들은 모조리 회수하고 성음사에서 진추하의 음반을 다시 발매하는 해프닝을 벌였던 것이다. 덕분에 용돈을 아끼고 아껴 처음 발매된 음반을 샀음에도 다시 활짝 웃는 진추하의 사진 재킷으로 무장한 또 한 장의 음반이 발매되어 버렸으니 어쩌겠는가. 한 번 더 용돈을 아끼고 아껴서 재발매된 음반을 사야 하는 즐거움(?)을 감수해야만 했다. 두 음반은 표지도 다르고 수록곡도 다른 데다 ‘One Summer Night’의 가사도 살짝 달라져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처음 발매된 오아시스 레코드 음반에는 영화에 나오는 노래 그대로의 버전이었는데, 새로 발매된 음반에는 조금 다른 가사로 부른 곡이 수록되어 있었다. 영화에서는 이 곡을 추하(진추하)가 자신의 부모님을 위해 쓴 곡이라고 소개했고, 중국어 제목은 ‘친정(親情)’ 즉 ‘부모님의 정’이었다.


1976년 11월 18일 매일경제신문
처음으로 발매된 음반 (오아시스 레코드)


1977년 5월 14일 경향신문
재출반된 음반 (성음사)


<사랑의 스잔나>를 다시 보려고 홍콩판으로 보니 우리나라 상영 버전이 궁금하긴 했다. 영화를 처음 보고 진추하의 매력은 충분히 알게 되었지만 한 번만 더 보았을 뿐인 이유가 궁금해서다. 매력적인 배우나 작품이 나타났을 때 극장을 따라다니며 계속 보는 그런 일은 시도하지 않았던 이유가. 홍콩판을 보니 여주인공을 그렇게 좋아했던 중학생으로서는 보고 또 보고를 시도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어떤 익숙한 비호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라는 상상도 해보았다. 말하자면 당시 우리나라 영화에서도 성우들이 배우 목소리를 대신한 후시녹음이 많았는데 그게 거슬린다고 생각한 적이 많았다. 역할에 따라 판에 박힌 듯 나오는 그 목소리의 톤이나 분위기가 너무 작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상황을 생각해서 써본 소설이긴 하지만 이런 추정을 해보았다. 진추하의 매력에는 쏙 빠졌지만 그녀의 대사를 한국어로 더빙한 목소리가 그녀의 분위기와는 어울리 않는다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해서.



<사랑의 스잔나>를 다시 보니 새롭게 느껴지는 점들이 있었다. 우리나라 배우 이승용의 역할인 마국휘의 잔잔하면서 든든한 사랑 그리고 ‘One Summer Night’이 죽어가는 추하가 부모에게 바치는 노래였다는 점에서 예전에는 몰랐던 슬픔이 느껴졌다. 아울러 그런 면을 조금 더 단단한 각본이 받쳐주었더라면 진추하의 매력만으로 버틴 영화 이상이 될 수 있었을 텐데라는 아쉬움도 느껴졌다. 재미있었던 점은, 굳이 짜 맞춘 생각 같기도 하지만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역할 하나씩을 맡은 영화라는 생각도 들었다. 여름과 가을을 찾기는 너무 쉽다. ‘여름’은 엄청 히트한 삽입곡의 제목 ‘One Summer Night’에 들어있고, ‘가을’은 주인공의 이름이자 배우의 이름 추하의 추(秋)가 ‘가을’이니까. 사계절 생각의 단초를 제공한 장면은 영화가 마지막으로 달리는 즈음에 국휘가 우리나라 가곡 ‘봄처녀’를 신청하여 추하에게 들려주는 장면에서였다. 그 노래가 그 장면에 어울렸는지는 별개로 하더라도 죽어가는 연인에게 들려주는 봄노래란 이 영화의 삽입곡이기도 한 '생명지광'처럼 생명의 빛이란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해 선택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봄’은 그렇게 끼어들었고, 마지막에 ‘겨울’이 등장한다. 추하가 그렇게 보고 싶어 했던 것이 눈(snow)이었기에 눈이 펑펑 내린 한국의 겨울이 등장했고, 그것이 추하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 ‘겨울’이었다.



영화와의 만남은 이래서 좋다. 그때는 심드렁했던 것이 지금은 분명하게 느껴질 수도 있고, 그때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을 지금은 듣고 보게 만드는 면이 있다는 점에서. 세월은 흘러가도 영화는 남아 있어서 좋다. 흘러간 세월만큼 오래된 자신의 조각난 기억에 영화의 장면을 요모조모 맞춰가며 생각해 볼 수 있으니 말이다. 영화는 삶의 퍼즐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신이 본 영화에 자신의 삶을 여기저기 많이 묻혀 놓았다면 말이다.



보태는 말

진추하는 가수였다. 우리나라에 와서 TV에 출연했을 때에도 거의 음악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피아노를 연주하며 노래를 불렀다. <사랑의 스잔나>에서 추하의 방에는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유명한 포크 가수 '조운 바에즈 (Joan Baez)'의 사진이 걸려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추하의 방에 어울리는 소품이다.   

진추하 내한 기사 (1977년 5월 10일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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