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시절의 영화관람기
초등학교를 거쳐 중학교 시절을 지나기까지는 닥치는 대로 물불 가리지 않고 영화를 보려고 애를 썼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좀 더 많은 영화를 보고 싶다는 욕심만 잔뜩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봤자 다 볼 수도 없었으니까. 그래서 어떤 영화든 친구들과 쫓아다니며 보기를 우선했지만, 신문이나 잡지에서 영화 기사가 보이면 빠지지 않고 읽어가면서 좋은 영화란 무엇인지도 은근히는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 도움을 준 것은 주말마다 빠지지 않고 보았던 소위 ‘주말의 영화’였다. 그 영화들이야말로 극장에 가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영화의 허기를 채워주기도 했고, 좋은 영화의 기준을 잡아가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던 참 고마운 영화들이었다.
고교 시절이란 어리지도 않고 성인도 아닌 애매한 시기였던 만큼 이것저것 생각이 많던 시절이었다. 사춘기의 절정을 맞아서 어른 흉내를 내고 싶어 하던 때라서 드디어 인생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도 시작되었다. 초등의 유치함이야 극복했겠지만 중등의 미숙함은 여전히 남아있는 시기에 의젓함이랄까 나름 성숙함을 어떻게 표현할지를 고민했던 시기였다. 그렇다 보니 전에 극장에서 보았던 영화는 물론 집에서 TV로 봤던 주말의 영화까지 제법 챙겨 봤다는 이력을 내밀며 은근히 영화를 가리기 시작하는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영화도 세월 따라 시절 따라 달라지니 그걸 따라가기도 힘든데 그런 걸 보면서 아는 척 가려내고 싶어 진다는 게 참... 고교 시절이야말로 인생 고민에 영화 고민까지 더했던 폼생폼사 고민의 계절이었다.
고등학교 입학 후 처음으로 본 영화가 무엇일지 궁금해서 신문 광고를 찾아보니 생각보다 쉽게 답이 나왔다. 예전부터 고전 영화 <모정(Love Is a Many-Splendored Thing, 1955)>을 부산 시민회관에서 봤다는 사실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게 언제인지 아리송했었는데 그 답을 찾은 것이다. 그해 3월 6일부터 시민회관에서 새 필름으로 <모정>의 한국 고별 상영이 시작된다는 신문광고를 발견한 것이다. 3월 초 즈음에 개봉관에서 상영이 시작된 영화를 살펴보니 머릿속에 남은 영화는 하나도 보이질 않았다. 그렇다면 이 기회에 고교 입학 후 처음으로 극장 가서 본 영화는 <모정>이었던 것으로 공식적인 기억에 새겨두어도 되겠다.
고교 시절이 시작되자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을 축하라도 해주듯 제목까지 딱 어울리는 영화가 나타났다. 조흔파 원작의 <고교 얄개>라는 영화다. 이 영화가 등장하여 인기를 얻게 되자 임예진의 하이틴 영화가 붐이 일었듯 '고교'나 '얄개'가 붙은 비슷한 영화들이 새로운 장르처럼 퍼져 나갔다. 임예진 시리즈에 이어 얄개 시리즈 즉 이승현 시리즈가 등장한 셈이다. 임예진 시리즈가 동력을 잃어갈 즈음 다시 힘을 보탤 국산 영화 돈벌이 장르가 개발(?)된 것이다. 유치한 데서 벗어나겠다고 눈에 힘을 줘봐도 동년배 배우들이 주연하는 얄개 영화의 유혹에서 벗어나긴 힘들었다. 그 속에는 예쁜 동년배 여학생 배우들이 속속 등장하여 더욱더 보고 싶게 만들기도 했다. 그 중심에 있는 인물은 야무지게 생긴 강주희였다. 하지만 강주희 영화를 따로 볼 필요는 없었다. 대부분의 이승현 영화가 곧 강주희 영화였으니까. 이승현이 인터뷰에서 자신이 주연한 얄개 어쩌고 고교 어쩌고 하는 영화만 하더라도 24편이나 만들어졌다고 했으니 그 시절이 고교 시절이었던 우리는 미우나 고우나 그런 영화 간판을 항상 보고 다녔던 셈이다.
임예진의 ‘하이틴 영화’가 대세였던 때로부터 이승현의 ‘얄개 영화’ 시대가 열렸듯 이소룡 영화 덕분에 불게 된 무술영화의 바람을 어떻게든 살려보려는 노력도 계속된 시절이었다. 그 바람의 한쪽 방향은 소위 ‘이소룡의 클론 영화’였다. 제작사 측은 이소룡과 닮았다고 주장하는 배우들을 내세워 이소룡의 어느 한 부분이라도 되새김질할 수 있는 영화를 주야장천(晝夜長川) 만들어 내놓은 것이다. 볼만한 영화는 많지 않았지만 이소룡의 팬이라면 얼마만큼 닮게 그렸는지가 궁금해서 계속 고개를 들이밀게 만들었으니 나름 성공한 기획이었다. 이소룡의 태풍을 클론들의 약하지만 무더기 바람으로 대체해 보려는 발버둥이었다. 그 바람과는 다른 쪽 방향의 바람은 ‘소림사 시리즈’였다. 이소룡의 유작 <용쟁호투>에서 그가 맡았던 역할 리(Lee)가 소림사의 제자였다는 걸 리마인드시키며 이소룡 바람을 이어가겠다는 전략이 성공한 건지 그 바람도 참 꾸준히도 불었다. ‘소림사’라는 단어가 붙은 영화가 눈에 보이기만 해도 끔찍할 정도로 많이 등장했으니 말이다. 그 정도로 많이 만들어졌기에 허접한 영화들이 많았지만 그중에는 제법 재미있는 영화들도 있었고 <소림 36방>처럼 꽤 잘 만들어졌다고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영화도 있었다.
재난영화와 공포영화를 제법 많이 볼 수 있었던 것도 그 시절의 큰 특징이었다. <죠스> 같은 영화는 너무 유명해서 들어오기까지 시간이 걸렸는데 그러다 보니 소위 짜가 영화까지 출현했을 정도였다. 리메이크작이지만 <킹콩>도 성공한 영화였고, <오멘>이나 <캐리>도 대단한 성공작이었다. <써스페리아> 같은 경우는 저렇게 무서운 영화는 처음이라는 생각을 서슴없이 할 수 있을 정도였고, 그 주제곡 테마도 전파를 많이 탔을 정도로 유명했다. <타워링>은 주연 배우들만 봐도 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의 호화 캐스팅에 단단한 스토리로 짠한 감동까지 전해준 영화였고, <카산드라 크로스>와 <실버스트릭>도 당시에 꽤 화제를 모았던 영화들이다. 기본적으로 장르적인 재미도 있었지만 사회적으로 시사하는 바도 있었기에 이모저모로 인기를 끌었던 영화들이었다.
70년대 후반에도 스타는 여럿 있었지만 이때 극장 간판에 가장 많이 걸린 배우의 한 사람으로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꼽을 수 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더티 해리’와 ‘무법자’ 이미지로 이미 유명했지만 자신이 감독한 작품으로도 꾸준히 볼 수 있었던 할리우드 스타였다. 궁금했던 <황야의 무법자>를 이때 재개봉하였고, 감독 주연을 겸했던 <아우트로>, <황야의 스트레인저>, <원웨이 티켓> 그리고 <더티 화이터> 등이 당시 극장에 걸렸던 작품이다. 재미있다는 생각도 했지만 하나같이 뚜렷한 인상을 남겼던 영화들이어서 서서히 감독의 역량을 드러내기 시작한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와는 다른 경우지만 그때 많이 볼 수 있었던 또 한 사람의 배우로는 성룡을 꼽을 수 있다. 무술영화의 붐에 따라 무수한 배우들이 등장했지만 이때의 성룡은 이소룡의 클론도 소림사도 아닌 다른 방향의 바람을 만들고 있었다. 날렵한 몸으로 아크로배틱을 연상시키는 무술 동작으로 서서히 성룡의 존재가 부상하기 시작했던 시기가 이때였다. 한국과 홍콩이 합작했다는 광고와 함께 성룡을 주연배우로 내세웠던 영화들이 <신 당산대형>, <사학비권>, <당산비권>등이었는데 꽤 볼만한 무술 장면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 영화들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때 성룡은 전혀 유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연이어도 광고에서 그의 이름을 내세우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사학비권> 같은 영화 광고에서는 주연 배우 사진 세 장이 떠있는데 거기에 성룡은 끼어있지도 않았다. 곡예 같은 무술 동작에 코믹함을 섞은 코믹 쿵푸 영화 <취권>으로 대박을 날리며 결국은 슈퍼스타 타이틀을 거머쥐게 되지만, 성룡이 그렇게 될 조짐을 보이고 있었던 때가 그때였다. 엄청난 히트를 기록한 <취권>은 1979년에 개봉되었고, 그 이후에는 그전에 찍었던 그렇고 그런 영화도 수입하여 개봉하면서 성룡이라는 이름을 크게 걸기 시작했다.
고교 시절의 영화를 생각하자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영화들이 있다. 성인이 되어가는 고교생으로서 삶이란 걸 진지하게 생각하게 해 주면서 재미와 감동도 같이 준 영화들이었다. 이미 작품적으로 인정받고 들어온 영화들이기도 했다.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록키>, <속 대부>, <디어 헌터>가 대표적으로 그런 영화들이었다. 그 외에도 <스타탄생>, <챔프>, <슈퍼맨>, <스타워즈>, <토요일 밤의 열기> 같은 영화들도 이런저런 부문에서 아카데미상을 수상하거나 노미네이트 되기도 했었고, 다른 면으로도 시선을 받았던 화제작들이었다. <스타 탄생>과 <토요일 밤의 열기>는 영화도 영화지만 음악적인 면으로 대단한 인기를 모았었고, SF영화의 진수를 보이기 시작한 영화 <스타 워스>와 <슈퍼맨>도 이때 개봉되었다.
예전보다 편수가 줄었다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때가 되면 재상영되는 추억의 고전 영화들은 여전히 있었다. 그때 처음 본 영화들도 여러 편이었는데 그중 고교생들에게 가장 화제작은 <로미오와 줄리엣>이었다. 당연히 올리비아 허시의 미모 덕분이었다. <25시>를 보면서는 안소니 퀸이라는 배우가 왜 연기를 잘한다고 난리들인지 알 것 같았다. <내 모든 것을 다 주어도>는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오래된 영화인지조차 몰랐다. 1957년에 만들어진 영화지만 늦게 개봉된 경우라서 우리나라에서 첫 상영이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새 영화인 셈이다. 전형적인 우리나라 관객의 정서 맞춤용 영화로 많이들 보고 울었다. <전쟁과 평화>는 배우 ‘오드리 헵번’ 그리고 마르고 닳도록 들었던 주제곡 ‘나타샤의 왈츠’만 생각하더라도 기필코 봐야 할 영화였다. 개인적으로는 <닥터 지바고>가 당시에 본 고전 영화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다. 거기서 들리는 음악과 거기서 보이는 영상만으로도 인상적이었다.
고교생이 되면서 영화를 볼 수 있는 자격도 좀 더 얻었고, 그러다 보니 영화를 볼 수 있는 폭도 넓어진 것 같아서 뿌듯했다. 그때를 생각할 때 잊을 수 없는 기억 하나는 <디어 헌터>의 상영과 맞물린 일이다.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영화도 화제를 몰고 다닌 영화도 우리나라에서는 보기가 쉽지 않았다. 비싸서 그랬는지 수입이 늦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우리나라 수준을 스스로 낮게 보았는지 아예 수입을 못하게 해서 상영되지 않는 영화들도 많았다. 외국 서적 골목에서 ‘스크린’이나 ‘로드쇼’ 같은 일본 영화 잡지를 뒤적거릴 때면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는 영화들의 일본 포스터를 보며 많이 부러워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수입도 하지 않았는데 일본 텔레비전에서 방영 프로그램에 끼어있는 영화를 보면 더더욱. 그런 시절이었는데 우리나라에서 상영 중이던 <디어 헌터>가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으니 화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재미있었던 일은 아카데미상을 받기 전에는 그다지 관객이 몰리지 않았는데 아카데미 작품상 발표가 되자 관객 수가 늘기 시작하여 결국 흥행에 성공했다는 사실이다. 우리 관객은 상에 약하다는 비판적인 기사가 실리기도 했지만 우리나라 상영이 그만큼 빨라졌다는 사실에 기뻐했던 기억이 난다. 이제 우리도 제때 영화를 볼 수 있게 되었구나 싶어서.
고교 시절을 생각하면 잊을 수 없는 우리나라 영화 두 편이 있다. 그 한 편은 <코메리칸의 낮과 밤>이라는 영화다. 뭔가 있을 것 같아서 혼자 개봉관에 가서 봤던 영화였다. 재미교포 홍의봉 감독의 영화로 우리나라 유학생 부부의 미국 생활을 그린 것이었다. 자세히 기억나진 않지만 '아메리칸드림'이란 것이 말 같지만은 않다는 내용이었다. 주제가를 조영남이 불렀는데 멜로디도 마음에 들었고 가사도 영화 주제에 어울린다는 생각에 좋아했었는데, 지금은 영화도 노래도 보이질 않아서 아쉽다. 살짝 남은 기억으로는 우리나라가 변변치 않다고 생각하던 시절 미국으로 떠났던 젊은이들의 아픔을 그렸던 꽤 인상적인 영화였다. 나머지 한 편의 영화는 지금도 볼 수 있는 하길종 감독의 유작 <병태와 영자>다. 뭣도 모르면서 중학생 때 본 <바보들의 행진>을 인생의 영화로 생각하고 살았는데, 금지곡이니 뭐니 하면서 그 이후에는 볼 방법이 없던 차에 그 속편이 만들어져 상영된다니 얼마나 기뻤던지. 하지만 그 영화 <병태와 영자>가 상영되고 있는 중에 하길종 감독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것도 38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멍 때리고 있었던 기억도 새롭다. 세상에 태어나서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는데도 허전함을 느끼긴 처음이 아니었나 싶다.
고교 시절 마지막으로 본 영화가 무엇인지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병태와 영자>가 그런 느낌으로 남아있다. 분명히 사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마 <병태와 영자>를 보았을 때가 겨울이기도 했고, 하길종 감독의 별세 기사로부터 받은 허전한 느낌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그리던 성인 인증이 코앞에 보이니 역설적으로 이제 다시 못 올 소년 시절이 다 지나가는 것인가 하는 느낌도 한몫했을 것 같기도 하고.
그 시절이었기에 뜰 수 있었는지도 모를 그 시절의 영화는 항상 존재한다. 이 시절에도 그 시절 영화는 있었다. 개인적으로 꼽는 영화는 <죠이>가 최고, 그다음이 <라스트 콘서트>였다. <휠링 러브>와 <사랑이 머무는 곳에>는 주제가로도 사랑받은 영화들이었다. 이 영화들이 그 시절 영화가 된 가장 큰 이유는 하나같이 안타까운 사연을 지닌 영화들이기 때문이었다. 쉽게 얘기하자면 우리 관객 정서에 딱 맞는 플롯 덕분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뻔히 아는 그런 전략의 영화가 한두 편이었겠는가. 그 외에도 흥행에 방점을 찍을 수 있었던 요소가 더 있었기 때문에 그 시절의 영화가 된 것이다. 그래서 다소 안정감이 떨어지더라도 추억의 영화 구실을 해내는 영화들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