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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HMRH Aug 23. 2022

사랑하지 않았던 너에게

널 만나기 전 날 사랑했더라면

안녕.

요즘은 뭐하고 지내는지 모르겠다.

여전히 소화기관이 말썽인지, 일에 허덕이고 있는 건 아닌지... 너랑 어영부영 헤어지고 나서 한동안은 꿈에 네가 나왔는데, 언제부턴가 네가 더 이상 꿈에 나오지 않더라. 너와 함께한 시간을 슬슬 잊어가고 있나 봐. 잘된 일이지. 그냥 가끔 그땐 그랬지.... 라며 넘어가는 정도가 딱 좋은 거 같아. 


우리의 만남은 다 엉망이었지. 처음부터 끝까지 카오스 그 자체였어. 그건 우리 스스로를 너무 몰랐던 탓일 거야. 적어도 난 그랬거든. 한창 정체화 하던 시기여서 늘 불안했고. 어딘가에 속해야만 한다는 강박이 있어서 너랑 함께 있는 시간도, 함께 있지 않은 시간도 고통이었어. 널 만나기 전 날 사랑했더라면 널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었을까. 널 사랑했더라면 난 재정체화했을까? 가지 않은 길을 알 순 없겠지만.


처음엔 너의 기타 치는 손을 좋아했던 것 같아. 조금 지나고선 너의 손을 잡는 걸 좋아했던 것 같고.  너와 약간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산책하는 것도 좋았고 밤늦게 동아리실에서 합주하는 것도 좋았고 어느 순간 너와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했어. 너는 나의 짜증과 우울을 유일하게 이해해주는 사람이었고 나는 그런 너를 믿었어. 


그때 당시 나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어. 같은 동네에서 자라왔던 소꿉친구였지. 나는 그 애의 얘기를 많이 했어. 어느 날 그 애가 남자 친구가 생겼다며 세상 기쁜 목소리로 말하던 날, 난 아마 내 세상을 빼앗겼을 거야. 얼굴도 모르는 남자한테 말이지. 그날 펑펑 울었어. 내가 여자인 게 싫었던 날은 무수히 많았지만 그날은 유독 원통한 느낌이었어. 난 내 사랑을 잃었는데 너와는 아무렇지 않게 손을 잡고 걸을 수 있고 그 애와는 절대 해보지 못할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게 화가 났어. 씁쓸하기도 했지. 그때부터 난 미쳤던 것 같아. 내가 누군지 알 수 없어졌어. 난 내가 동성애자라고 믿기 싫었지만 결국 받아들였는데, 이젠 내가 양성애자 일지도 모른다는 고민을 해야 한다니. 


  난 네게 털어놨어. 내가 동성애자인지 양성애자인지 모르겠다고. 그때 이미 우리 사이는 틀어질 대로 틀어져있었지. 네가 어느 순간 내 손을 놓아버린 것도 난 알아. 그리고 이해해. 한없이 우울하고 불안한 나와의 일상에 넌 지쳤을 거야. 스스로도 누구인지 확신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과 일상을 공유할 수 있겠어. 그렇게 우린 헤어졌지. 


  너에게 연애감정이 들었냐고 묻는다면, 글쎄. 잘 모르겠어. 그냥 네가 편했던 건지, 너와 함께한 시간이 가지지 못한 시간이라 부러웠던 건지, 그냥 남들처럼 살아보고 싶었던 건지. 널 사랑했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글쎄. 사랑이란 상대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인데, 난 네 손을 잡으면서 다른 사람을 생각했으니까.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생각하느라, 너를 대안책처럼 썼으니까. 아마도 난 널 사랑하지 않았을 거야. 날 사랑하지 않아서 널 사랑하지 못했을 거야. 


  넌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 궁금해. 나처럼 너도 성정체성이나 성적지향성을 고민해봤던 적이 있을까. 

혹은 그 어떤 고민도 해보지 않았을까.

그 어떤 삶이든 난 너의 삶을 존중해. 네가 내 삶을 존중해 줬던 것처럼. 그리고 난 그때의 내가 말하지 못했던 말을 하고 싶어.

너무 미안해. 너를 있는 그대로 보지 않아서.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그리고 너무 고마워. 마지막까지 나의 친구로 남아줘서.

잘 살아, 친애하는 내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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