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식
한국에서는 졸업식이 참 자주 있었다. 유치원,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교까지.
미국에서는 졸업은 고등학교를 마쳐야 비로소 졸업이라 부른다. 학교를 분류하는 데 있어 한국은 6-3-3이 확실하지만 미국에서는 이런 분류가 불확실하다. 사립학교들은 특히 K-12 인 곳이 많다. K-12란 유치원부터 12학년까지 한 학교에서 교육이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지아가 다녔던 초등학교는 5학년까지는 한 학년이 세 학급이었는데, 6학년은 한 학급으로 줄었다. 많은 아이들이 6학년을 중학교에 가서 다니는 걸 선택한 탓이다. 지아의 초등학교 선생님은 가능한 한 많은 학생을 6학년에 보유하기 위해 6학년 교육 과정을 어떻게 구성하는지 학부모들에게 긴 시간을 들여 설명했었다. 6학년 과정을 중학교에서 배우면 교과 과목별로 다른 선생님께 배우지만 초등학교에서 할 경우는 여러 과목을 한 명의 선생님으로부터 배우게 된다. 우리 뒷 집, 커다란 나무가 우리 집을 굽어보는, 의 둘째 아이는 우수한 학생이었고 GATE에도 뽑힌 학생이어서 6학년을 중학교로 가면 중학교에서부터 우수한 학생들을 모아 놓은 AP 학급에 갈 수 있었으나 그대로 초등학교에 남았다. 내가 테레사, 뒷집 엄마, 에게 왜 아이를 그대로 초등학교에 남겼냐고 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다니던 초등학교가 더 가까운데 뭐 하러 멀리 있는 학교를 가요?"
아무튼 이렇게 6학년을 초등학교에서 다니기도 하고 중학교에서 다니기도 하니 초등학교 졸업이란 개념 자체가 미국에서는 없다.
중학교는 우리 지역에서는 졸업식이 없었으나 지역, 혹은 학교에 따라서 하기도 한다. 지은이의 중학교 졸업식은 졸업식이 아니라 상을 받는 학생과 가족들만 불러서 학교 체육관에 접이식 의자를 놓고 하는 소규모의 시상식이었다. 이때 나는 처음 보는 졸업식이어서 상 받는 아이들만 참석하는 게 정말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지아네 학교에는 IB 중학교 과정이 있어서 주변 사립학교에서 이 과정만 하고 다시 사립학교로 돌아가는 아이들이 많았다. 학교에서 공식적인 졸업식이란 명칭은 사용하지 않았으나 IB 학생들만 모인 기념식 비슷한 걸 했다. 내 기억에 남았던 일은 이때 한국에서 UC 데이비스로 교환교수를 하는 아빠를 따라왔던 학생이 있었는데 이 아이가 소위 다재다능 천재였던 모양이다. 피아노, 바이올린 연주로 학교 합주단을 이끌었고, 성적도 최우수였다고 했다. 모든 선생님들이 이 아이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매우 서운해했고 그 아이를 환송하는 파티가 있었는데, 지아와 잘 아는 아이가 아니어서 우린 가지 않았다. 아빠가 데이비스에서 일하는데 아이가 새크라멘토의 중학을 온 걸 보면 그 부모도 아이의 교육에 모든 걸 바치는 타입이 아니었나 싶다. 새크라멘토와 데이비스는 차로 약 한 시간 거리이다.
고등학생들의 졸업은 주로 5월 마지막 주에서 6월 첫째 주 사이에 이루어진다. 나의 두 아이들의 졸업식은 새크라멘토 시내에 있는 메모리얼 빌딩을 빌려 진행되었다. 새크라멘토의 여러 다른 고등학교들도 그 빌딩에서 졸업식을 하는 것 같았다. 졸업생들은 졸업식 며칠 전부터 많은 준비들을 한다. 졸업 앨범을 받으면 아이들은 서로서로에게 작별 인사들을 남긴다. 졸업 앨범의 마지막 몇 장은 공백으로 남겨져 있어 서로서로 인사말과 이름들을 쓰는데 써진다. 인기가 많은 아이들은 몇 장의 여백이 모자라기도 하고 사교적이지 않은 아이들은 한 두 페이지로 충분하기도 한다. 내성적인 지은이보다 외향적인 지아는 좀 더 많은 페이지를 빽빽하게 채웠다.
아이들은 졸업 가운과 모자를 준비해야 하고 (학교가 지정한 특정 업체로부터 구매한다), 남학생들은 턱시도 정장과 드레스 구두를, 여학생들은 프롬 드레스와 하이힐 등을 준비한다. 이런 파티복들은 살 수도 있고 빌릴 수도 있는데 빌려도 싸진 않다. 학부모회에서는 가난한 학생들을 위해 프롬 가운들을 기증받고 대여해 주기도 한다. 졸업식 당일에 학생들은 먼저 아침에 식장에 모여 예행연습을 하고 한정된 티켓을 (학생 당 다섯장) 가진 가족들은 두 시간 정도 후에 입장하였다.
모든 가족 친지들이 그 넓은 좌석을 채우면 앞쪽에 졸업생들을 위한 좌석만 비어 있는 채 마치 결혼식에 신랑 신부 입장하듯 하객들이 모두 일어서서 박수와 환호로 두줄로 입장하는 졸업생들을 맞이하며 졸업식은 시작되었다.
한국에서 내가 경험하지 못한 진기한 광경은 사백여 명의 졸업생들을 하나도 빼지 않고 한 명 한 명씩 호명하여 단 위에서 교장선생님이 졸업장을 주는 진행이었다. 졸업생과 그 가족까지 천 명이상이 모인 기념식장에서 한 명 한 명 올라가 졸업장을 받고 악수를 하고 하객들의 환호와 박수 속에 아마도 처음이자 마지막인 사진을 교장선생님과 둘이서 찍으면 다음 학생이 단 위로 올라갔다. 너무 오래전이라 잘 기억나진 않으나 한국에서는 교육감상이나 교장상을 받는 몇 명의 학생들 이외에 교장으로부터 직접 졸업장을 받는 걸 보진 못한 것 같다. 대부분은 나중에 담임에게 받거나, 대학의 경우 학생과 사무실에 가서 졸업장을 찾았던 것 같다. 졸업생 대표의 인삿말도 인상적이었다. 써 온 연설문을 읽는 게 아니라 청중과 화합하며 짧고 위트있는 인삿말들이었다.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졸업식에 나온 어느 연설자의 연설도 지루하거나 길지 않았다. 엄숙한 '식'이 아니라 끝없이 조크와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오는 축제였다.
졸업식 이후엔 한국에서 처럼 식장 주변에서 가족, 친구들과 기념사진을 찍는다. 그 후엔 주변 식당들로 흩어져 가족들과 늦은 점심 식사들을 하고 졸업생들은 다시 학생회에서 제3의 장소에 준비한 졸업생들만의 파티에 간다. 법적으로 아직 미성년자들이어서 술도 없고 몇 명의 부모들이 샤프롱 역할로 참여하기도 하므로 이 파티는 흔히 한국인들이 상상하듯 막 나가는 파티는 아니다. 하지만 이제 학교를 떠나는 젊은이들은 다시 언제 만날지 모르는 친구들과 드레스와 턱시도 차림으로 밤늦게까지 춤을 추며 화려한 마지막을 추억으로 남긴다.
가족마다 다르긴 하겠으나 많은 미국 가정에서는 가족, 친척들이 중심이 된 고교 졸업 파티를 수일 내에 가진다. 전통적으로, 미국 가정에서 고등학교 졸업은 아이가 부모와 살던 생활에 종지부를 의미한다. 대학을 간다면 대학 기숙사로, 취업을 한다면 다른 친구들과 방을 얻는 등 독립생활을 시작함을 의미한다. 졸업 파티는 이제 부모의 품을 떠나는 아이들을 환송하는 환송 파티의 의미도 있을 것이다. 혹은 그저 파티를 열 기회만 엿보던 늘 흥이 넘치는 사람들에겐 파티를 열 좋은 핑계임은 틀림없다.
아이들의 아빠는 아이들의 졸업식마다 참석하러 미국에 왔었다. 졸업식 후 어색한 부모들 틈에서 나의 아이들은 불편하기 짝이 없는 식사를 해야 했다. 웃음과 축하가 오가야 할 자리가 냉랭함과 눈치 보기와 억지로 끌어 가는 대화로 바뀌었다. 지아와 지은이의 고교 졸업과 지은이의 대학 졸업식 후 힘든 식사를 경험하고, 나는 더 이상의 졸업식에 불참하기를 선택했고, 지아의 대학 졸업식과 지은이의 박사 과정 졸업식은 가지 않았다. 나 없이 아빠와만 함께 있는 게 차라리 아이들도 눈치 보지 않고 편할 것 같았고 한국에서 온 아이들 아빠에게도 내가 그 자리에 없는 게 나을 것 같아서였다. 지은이의 대학원 졸업식은 한국과 달리 석, 박사과정이 끝난 후에 한 번만 졸업식이 있었는데 나는 여기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지은이는 나중에 내게 자기의 대학원 졸업 논문이 인쇄된 책을 주었는데, 그 책을 내게 바친다는 헌정사가 인쇄되어 있었다.
나는 원래 졸업식, 기념일, 생일, 새해 첫날 등등을 챙기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우린 그저 무언가를 하기 위한 핑곗거리를 삼는 것뿐이다. 고등학교를, 대학을 졸업하는 식은 기념할 만한 것임이 분명 하나 내가 그곳에 함께 해야만 기념하고 축하하는 건 아니다. 진정으로 기념하고 축하해야 하는 건 나의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었던 우리의 시간들이다. 나의 멋진 아이들에게 언제나 엄마라고 불릴 수 있는 나의 인생이야말로 축하할 일이다.
(이글로 '캘리포니아의 공립학교'는 마칩니다. 그동안 읽어주시고 좋아요와 댓글로 따뜻한 관심을 보여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P.S. 방금 뉴스에서 대박 소식을 들었네요. 캘리포니아에서는 2026부터 캘리포니아 주립대학(CSU)에서 자동입학제도를 실시한다고 합니다. 고등학교 성적을 기반으로 입학 자격을 갖춘 학생들에게 대학 측에서 먼저 '귀하는 우리 대학 합격 대상입니다.'라고 알림을 보냅니다. 복잡한 지원 절차와 비용 때문에 진학을 포기하는 저소득층 및 소수계 학생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학생은 제공된 리스트 중 가고 싶은 캠퍼스를 선택하고 복잡한 에세이나 추천서 없이 간단한 확인 절차로 입학이 확정된다고 합니다. 다만 6개 초인기 대학들은 지원자가 너무 많아 이전의 경쟁방식을 유지한다고 합니다.
캘리포니아는 새해에 최저 임금이 16.5달러로 인상됩니다. 지은이의 연구에 따르면 최저 임금이 높을수록 대학 진학률은 낮아진다고 하고, 주 고등학생 인구수의 감소 등으로 최근 CSU를 지원하는 학생 수가 감소 추세에 있는 것도 위의 입학과정 변화와 관련이 있을 것 같습니다.
한편, 트럼프의 외국인 차별 정책 때문에 급감한 유학생들의 숫자도 만만치 않고 이로 인한 대학들의 재정 적자는 심화되는 중이라 이런 정책까지 만들지 않았나 싶습니다. 결과적으로 더 많은 미국인들이 대학에 갈 수 있게 되었으니 트럼프의 정책이 성공하는 중일까요? 실은 트럼프의 여러 정책들 때문에 미국의 대학들은 학생수의 급감, 특히 외국인 학생 수의 급감으로 심각한 재정난을 겪고 있습니다. 위 정책의 변화도 학생 수를 늘리기 위한 자구책입니다.
처음 뉴스를 들었을 때는 '와 대박' 그러다가 하나하나 뜯어보니 조금 씁쓸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