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또는 짐 13

하늘 이야기

by 새 날

오늘 무지개를 보았다. 하늘은 두꺼운 구름으로 회색빛이고 가을비는 오후 내내 오락가락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하늘에 선명한 무지개가 아주 잠깐 나타났다. 마침 차들이 가다 서다 하는 중이어서 잽싸게 사진을 찍고 서쪽을 보니 회색 구름 사이로 강렬한 주황빛 노을이 이미 사라진 태양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었다. 떨어지는 해가 마지막 온 힘을 다해 만든 무지개였다.


내가 버클리에서 새크라멘토로 이사오던 날도 비가 내렸다. 이삿짐트럭에 조촐한 짐을 싣고 우린 자동차로 먼저 새크라멘토를 향해 달렸다. 그날 고속도로를 달리는 내내 나의 왼쪽 벌판에 쌍무지개가 떠서 우리를 따라왔다. 영어 공부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이제 병원에서 일까지 해야 한다는 압박과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에 가득 찬 내게 위로와 격려를 주는 것 같았다. 모든 게 이 쌍무지개처럼 축복일 거야 하며 나 스스로 마음을 다졌다.


그날 우리가 이사했던 집은 넓은 뒷마당이 서쪽을 향해 길게 뻗어 있는 아담한 단층집이었다. 겨울 저녁이면 부엌 창문 너머로 뒷마당 끝에서부터 짙어지는 황홀한 노을을 매일 볼 수 있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서쪽 뒷집에 커다란 참나무가 있고 뒷집이 우리 집보다 약간 올라간 땅 위에 있어 저녁이면 그냥 어두워진다. 내가 만약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한다면 서쪽이 뻥 뚫려 매일 저녁노을을 볼 수 있는 그런 집에 살고 싶다.


캘리포니아는 태평양을 서쪽에 두고 있다. 그러나 캘리포니아 해변에서 노을을 본 적은 없다. 너무 넓은 바다여서인지 해지기 두어 시간 전이면 맑았던 하늘이 구름으로 뒤덮인다. 수평선 끝에서부터 밀려든 안개는 바다를 뒤덮고 수평선 위에서 하루의 마지막을 불태워야 할 태양은 흔적도 없이 구름 속으로 사라진다. 해가 졌는지 떴는지도 알 수 없는 채 시간이 지나면 안개는 바다 분 아니라 육지도 점령해 버리고 달도 별도 볼 수 없는 밤들이 이어진다. 안개는 다음날 해가 뜨고 더워진 대지가 습기를 모두 제거할 때에서야 사라진다. 운이 좋으면 오전 10-12시 사이에 안개가 걷히고 오후 4-5시가 되면 다시 안개에 잠겨버리는 게 태평양 연안이다. 맨 처음 캘리포니아에서 바닷가에 갔을 땐 노을을 못 봐서 무척 서운했고 그저 그날 날씨가 그래서인 줄 알았다. 몇 번의 실망 끝에 이젠 이게 항상 있는 일인 줄 알아서 그러려니 한다.


미국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환자와 잡담을 하다가 내가 바닷가에서 노을 보는 걸 좋아한다고 했더니 그 사람 말이 이랬다.

"바닷가? 아니 아니, 노을은 벌판에서 봐야지. 나는 벌판에서 캠핑하는 걸 좋아해요."

지금은 그의 말을 정말 이해한다. 캘리포니아의 동쪽에 남북으로 뻗어 있는 시에라네바다 산맥을 넘어가면 네바다 벌판이 끝없이 펼쳐지며 유타주로 이어진다. 온 사방에 이어진 지평선이 지구가 둥근 걸 보여주는 벌판에서 노을은 서쪽에 머무르지 않는다. 동서남북 할 것 없이 그야말로 온 하늘을 온갖 신비로운 빛깔로 가득 채운다. 물론 그날의 습기가 햇빛을 반사할 만큼 적당하다면 말이다.


어릴 적 여름방학이면 한 달 내내 변산해수욕장에서 살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본 노을과 하늘 가득 반짝였던 별들은 지금도 내 기억 속에 있다. 몇 달 전 그랜드캐년에서 별 보기를 했다. 몇 년 전엔 요세미티에서도 별 보기를 했는데 별들이 선명하지도, 많지도 않았다. 대기가 깨끗하지 않은 탓인 줄 알았다. 캐나다의 프린스에드워드 섬에서 별을 봤을 때도 별이 별로 없었다. 아주 밝은 별 몇 개만 보였다. 주변에 가로등이 있어서인 줄 알았다. 그러다 갑자기 깨달음이 왔다. 내 시력 탓이었다. 열 살 때 총총한 눈으로 보던 밤하늘과 지금 근시와 원시가 앞다투며 심화된 눈으로 보는 밤하늘이 같을 리가 없는 것을.... 나는 왜 이리 별이 적나? 하고 있었으니....


나이 들며 감각이 둔해지는 건 축복이다. 시력처럼 청력도 둔해지고 혀끝의 감각도 둔해지고 기억도 둔해진다. 뇌의 신경 세포들이 차츰 소멸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육체의 세포들이 죽어 가며 느껴야 할 통증도 그만큼 둔해진다.


나는 아직 벌판에서 캠핑해 본 적은 없다. 늘 단단한 벽이 외부로부터 올지도 모르는 위험을 막아주고 편리한 화장실과 푹신한 침대가 있는 호텔을 선호했다. 더 늦기 전에 노을이 멋질 날에 벌판에서 캠핑을 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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