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또는 짐 14

크리스마스

by 새 날

12월이 시작되자 벌써 하나 둘, 집 앞에 크리스마스 장식을 하는 집들이 생겨 난다. 어린 시절 크리스마스는 일 년에 단 하루, 선물이란 걸 받는 날이었다. 추석이나 설엔 설빔이라 하는 새 옷을 얻어 입는 날이었고, 생일날에는 아침에 불고기와 소고기 미역국을 먹는 걸로 끝나지 않았나 싶다. 한국의 전통에서 가장 중요한 식사는 언제나 아침식사였다. 설날도 추석도 아침식사는 웃어른부터 어린 아이까지 모두 모여야 시작했고, 저녁 식사는 찾아온 손님들과 뒤섞이고 내집에서도 다른 친지 친척집에 간 가족도 있고, 누가 먼저 먹거나 늦게 먹거나 신경쓰지 않았다. 생일도 마찬가지로, 아침밥만 잘차려 먹으면 그걸로 행사는 끝났다. 선물이란 걸 받는 날은 일 년에 한 번 크리스마스 날이었다. 자고 깨면 머리맡에 놓여 있었던 학용품이나 과자 따위가 들어 있던 선물 꾸러미들. 그나마 선물은 국민학교 고학년부터는 사라졌다. 크리스마스 선물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착한 아이들에게 주는 상이란 걸 믿는 나이까지였다.


다시 크리스마스가 신나는 날이 된 건 대학에 간 다음이었다. 그때는 크리스마스이브가 일 년에 단 한 번 통행금지가 없는 밤이었다. 평소 교회를 다니건 안 다니건 상관없이 24일 밤에 집에 있는다는 건 젊은이로서는 수치스러운 일이어서 어떻게든 약속을 만들고 친구들과 무리 지어 돌아다녔다. 지금도 기억나는 일은 종로와 명동 인근에 다방이며 술집이며 모두 좌석이 없어 추위에 꽁꽁 얼어 헤매고 다니다 간신히 자리 잡고 앉았는데 주민등록증을 내놓으란다. 나는 생일이 1월이어서 신입생이지만 아직 미성년자였고 나 때문에 모두 쫓겨날 판이었다. 하는 수 없이 주민등록증은 안 가져왔다고 하고 학생증만 내놓고 성인이라고 우기다가 결국 나는 절대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사정 사정하여 간신히 자리를 지킨 일이 있었다. 1979년인지 1980년이었는지는 기억나지 확실하지 않으나 천주교 신자도 아니면서 명동성당에서 하는 크리스마스 자정미사에 가기도 했다. 내 기억이 맞다면 그때는 많은 대학생들이 자정미사를 핑계 삼아 모인 후 군사 독재 반대 거리 시위를 했다. 아마 미사를 본 건 1979년이고 1980년엔 아예 성당 진입로를 경찰들이 차단해서 들어가지도 못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 시절 크리스마스이브에 우린 반군사독재 시위를 하며 최루탄 속에 있었다.


이방인인 내가 보기에, 미국인들의 크리스마스는 11월 마지막 주 금요일, 블랙 프라이데이부터 시작되는 것 같았다. 추수감사절에 미국 사람들은 한국에서 추석 때 고향 집에 가듯이 다들 부모님의 집에 모인다. 추수감사절 휴일은 수, 목, 금요일 3일간인데 주말을 붙이면 5일간의 휴가가 생긴다. 대부분의 학교들은 추수감사절 주일에 한주일 내내 쉰다. 수요일은 고향에 간 젊은이들이 친구들과 만나는 날이어서 시내 레스토랑들이 가장 손님이 많은 날이라고 한다. 목요일은 추수감사절 당일이니 집에서 칠면조를 요리하고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시내 모든 마켓이나 식당은 문을 닫는다. 금요일이 되면 새벽부터 점찍어 둔 상점에 가서 블랙프라이데이 할인을 이용하여 평소 구매하고 싶었던 가전제품뿐 아니라 가족들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미리미리 마련하는 날이기도 하다. 이런 건 일종의 전통적인 명절의 예이고 , 요즘엔 다들 온라인으로 구매하므로 블랙프라이데이에 몰려가는 사람들도 줄었고 그로 인한 부작용도 줄었다. 부작용이란 사건, 사고 말하는데 내가 미국에 온 이래 매년 블랙프라이데이마다 다툼과 살인이 있던 새크라멘토의 E쇼핑몰이 올해는 조용했다. 장사꾼들이 경쟁회사보다 블랙프라이데이 손님을 더 끌고 싶은 마음에 조금씩 빨라지던 블랙프라이데이 세일이 이제는 대부분의 상점에서 일주일이나 열흘씩 빨리 시작하고 심지어 온라인의 블랙 먼데이 세일도 있다 보니 이제 블랙프라이데이는 특정일이 아니라 그저 시즌을 일컫는 용어가 된 것 같기도 하다.

추수감사절 주말이 지나면 일제히 집집마다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걸린다. 타지에서 온 젊은이들이 일터로 돌아가기 전, 부모님 집 외부에 크리스마스 장식들을 하고 가나 하고 추측해 본다. 아니면 추수감사절 주말에 크리스마스 장식을 하는 전통이 있는지도 모른다. 조금은 쇠락해 가는 노인들이 살고 있는 우리 골목의 집들도 소박한 장식들을 내걸었다. 내가 이사 왔던 이십여 년 전과 똑같은 장식을 변함없이 매년 하는 이웃도 있고 작년 핼러윈 때 걸은 전기 장식을 떼지 않고 해를 넘기며 그대로 달고 있는 집은 바로 우리 앞집이다.

새크라멘토의 크리스마스는 한국에서처럼 길거리에 젊은이들이 넘치는 날이 아니다. 화려한 장식 조명들과는 반대로 쥐 죽은 듯 고요하다. 크리스마스만큼은 다들 가족들과 집에서 시간을 보내기 때문이다. 문 열은 가게도 없고 식당도 없다. 크리스마스이브에, 혹은 당일에 공항이나 호텔에서 외식을 한다면 팁을 평소의 두 배는 주어야 한다. 맨 처음 미국에서 맞았던 크리스마스에 나는 샌프란시스코의 학원에 다니고 있었고 2003년 12월 24일 저녁 6시에 학원에서 나와 지하철역 앞에 있는 제과점에 들어갔다. 제과점은 막 문을 닫으려 하고 있었고 운 좋게 마지막 케이크가 남아 있었다. 케이크를 사며 나는 팁을 주지 않았다. 한국인의 상식으로 여기서 먹는 것도 아닌데 무슨 팁이냐 싶었던 거다. 지금도 그 종업원의 뾰로통한 얼굴이 생각난다. 내가 한국인의 평판을 한 50점은 깎아 먹지 않았을까, ㅎㅎㅎ


오늘은 힘을 내어 나도 내 집 앞에 전기 장식들을 내 걸었다. 12월이면 이걸 해야 비로소 숙제 안 한 초등학생 같은 마음 한구석의 찝찝함을 벗는다. 엉성하기 짝이 없어 차라리 걸지 않는 게 더 나았으려나 싶기도 하고, 사다리를 옮겨 가며 간신히 걸은 게 겨우 나무 제일 아랫가지들이지만 새삼 이 불빛들에 위안을 받는다. 크리스마스에 집에 올 나의 아이들에게 주는 나의 환영 인사이기도 하다. (우리집 사진은 너무 부끄러워 삭제했습니다.)

큰길 건너편에 있는 집인데 우리 동네에서 가장 많은 장식을 한듯.
keyword
작가의 이전글내가 경험한 미국병원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