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경험한 미국 병원 16

나의 첫 직장

by 새 날

학교를 졸업했던 1983년에 나는 멀고 먼 외국 대신, 가깝지만 멀고 먼 외지 농어촌 간호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1981년부터 시작된 보건진료원 제도는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으나 의사와 병원이 없는 교통 취약 지역에 훈련받은 간호사를 배치해서 만성 질환과 일차 응급진료를 담당할 수 있게 한 제도였다. 그때만 해도 자가용은 흔치 않았고, 하루 한 두번 오는 버스나 똑딱선을 타야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주민들이 사는 섬마을이나 산골마을들이 있었다. 졸업 후 취업이 확정된 3차 진료 병원에서 발령이 나려면 두세 달을 기다려야 했으므로 나는 그 기간 동안 서울의 2차 진료기관에서 응급실 간호사로 일 해 경험을 쌓고 싶었다. 해 보고 괜찮으면 그곳에 2년간 머물 생각도 있었다. 보건진료원 교육에 요구되는 임상경력 2년을 희귀 질환과 중증 환자가 몰리는 3차 진료기관보다 현장의 흔한 질병과 사고에 더 가까이 접할 수 있는 2차 진료기관에서 쌓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신문에 나온 채용공고를 보고 서울의 서쪽 지역에 있던 약 300 병상 규모의 C 병원을 찾아갔다. 간호과장 면담을 하고, "4년제 대학 출신들은 임금이 낮은 C병원보다는 대학병원을 선호하기 때문에 채용이 꺼려진다"는 말을 들으며 채용이 되었다. 응급실은 경력이 쌓여야 갈 수 있다고 했다. 내가 일 할 병동은 말이 정형외과지 여러과가 섞인 병동이었다. 총무과에 가서 원장의 친척인 총무과장에게 인사를 하자, " 4년제 출신이니 다른 신규 간호사들보다 월 2만 원을 더 주겠다"는 말과 함께 술자리 초대를 받았다. 내가 "술은 못 마시니 가지 않겠다"라고 했더니 "4년제 출신이라고 튕기냐"는 소리까지 들으며 나의 생애 첫 직장은 시작되었다. (지금은 한국의 모든 간호대학이 4년제라니 다행이다.)


첫 직장, 처음 해보는 교대 근무에, 책임간호사가 앉는 의자 한 개 이외에는 의자도 없는 간호사실에 우선 기가 질렸다. 말이 8시간 교대근무지 실은 보통 낮번은 10시간, 밤번은 12시간 근무가 기본이었다. 당시는 쉬는 날은 일주일에 하루 일요일뿐이었고, 토요일은 반만 쉬는 시대였으나 간호사에게 토요일은 어느 병원에서도 인정되지 않았다. 한달에 4번, 6일 일하면 하루 쉬었다. 밤 번 근무 7일 후에는 이틀을 쉬어야 다음에 낮번 근무를 나갔으므로 낮번 5일 근무 후 초 번 5일 정도의 열흘 연속 근무는 불가피했다. 표면적으로는 주당 48시간 근무였으나 실은 밤번 근무시에는 주당 84시간 연속 근무였다. 한 병동에 60-70여 명의 환자가 있고 모든 환자를 3명의 간호사들이 역할을 분담하여 돌본다. 책임간호사는 간호사실에 앉아 의사의 오더를 받고 의무기록에 챠팅하는 업무를 도맡았고, 둘째 간호사는 혈관주사등 기술이 필요한 일을 주로 했고, 신규인 나는 뭐든 선배 간호사들이 시키는 일을 해야 했다. 교대 시간은 앞뒤로 한두 시간이 겹쳤다. 예를 들어 밤번으로 근무하면 9시에 출근하여 밤새 쓸 약물들을 미리 챙겨 놓은 후 10시에 인계를 시작한다. 아침 7시에 출근한 낮번들에게 인계를 하고, 인계를 끝낸 낮번들이 식당에 가서 아침식사를 하고 돌아오면 9시쯤 퇴근할 수 있었다. 휴게시간 같은 건 전혀 없고 아예 의자가 없으므로 너무 다리가 아프면 빈 계단 참에 가서 잠깐 앉았다. 거기 숨어 앉아 있는 걸 누가 볼까 두근두근 가슴 조렸다. 3일을 일한 후 퉁퉁 부은 종아리에 얼음찜질을 하며 울었다.


낮번 간호사는 인계 한 시간 전에 출근해서 아침에 줄 모든 먹는 약과 링거들을 준비해 놓고 인계를 시작했다. 아침마다 모든 환자에게 링거 병을 달았고 항생제가 섞인 병들도 있었지만 환자들은 주-욱 틀어 몇 시간이 지나면 다시 라운딩을 돌며 바늘들을 제거해야 했다. 링거를 제거하고 자유가 된 환자들은 사복으로 갈아입고 외출도 했고, 일 년째 병원베드를 차지하고 있는, 잘 걸어 다니고 수시로 외출하는 교통사고 환자도 있었다. 잘 먹고 잘 걷는 사람들이 왜 매일 링거를 맞는지 모를 일이었다.


2주쯤 일했을 때 독감에 걸렸다. 목이 붓고 열도 나고 뜨거운 아랫목 솜이불 밑에서도 드는 오한에 바들바들 떨다 전화를 했다. 아파서 출근을 못한다고 하자 '어디가 아프냐, 정말 아프냐, 그렇게 아프면 병원 응급실로 와라' 하는 것이었다. 우리 집에서 C병원까지는 보통 버스로 45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고, 나는 꽁꽁 언 12월 밤에 거리에 나가 언제 올지 모르는 택시를 기다리며 서 있을 수도 없었고, 버스를 타기에는 너무 아팠다. '나는 어지러워 일어설 수도 없다, 갈 수 없다, 미안하다' 하고 전화를 끊었고 그 길로 해고되었다. 나중에 느물거리는 총무과장에게 반 달치 급여 8만 원을 받았다.


이후에는 감히 중소병원에 다시 취업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업무 강도를 견디지 못한 내 육체적 한계도 재취업의 큰 장애였지만 그보다 더 큰 장애는 극심한 정신적 갈등이었다. 간호사로서의 양심에 걸리는 행위를 매일 해야 했다.


왜 멀쩡한 환자들이 입원해 있나?

왜 잘 먹는 환자들이 매일 링거를 맞나?

위 질문은 그래도 이래서 병원이 돈을 버나 보다 하면 그만이었으나 더 심각한 문제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특정 주사용 약은 분말 형태로 만들어져 나오고 환자에게 투입하기 직전에 주사용 증류수와 섞어 주사해야 한다. 액체에 섞으면 약물의 효능이 급격히 반감 하기 때문이다. 그 병원 시스템에서는 몇 시간 전에 모든 약을 준비하므로 환자는 맞아봐야 별 소용없게 된 약물을 계속 맞는 셈이다. 특정 항생제는 일정한 혈액 농도를 유지해야 해서 24 시간 연속으로 천천히 주입하거나 그게 힘들면 3-4시간 간격으로 주사하거나 해야 하였는데 이 병원의 환자들은 하루치를 4-5 시간 동안 다 맞고 치웠다. 처음엔 깜짝 놀라서 환자에게 설명하였으나 환자는 그냥 웃었다. 그들은 최소한 몇 달째 그러고 있는 경험 쌓인 환자였고 나는 시험만 봤지 아직 면허증도 안 나온 애기간호사였다. 환자들은 나를 애기간호원이라 불렀었다. 그 약물에 관한 연구 자료까지 찾아 들고 선배 간호사에게도 얘기해 봤으나 "이렇게 해도 괜찮아" 란 답만 돌아왔다.

"나도 대학병원에서 몇년 일 해본 사람이야."

지금 생각하면 나의 몰상식과 당돌함에 부끄러워진다. 자료까지 찾아들고 와서 '너네 이렇게 하는 건 잘못이야' 하는 신규를 향해 웃음을 보였던 선배간호사는 성격이 부처님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졸업 후 대학병원에서 일 하다가 임신으로 인해 그만두었다. 아이들이 학령기가 된 후 C병원에 재취업했다. 대학병원들은 임신한 간호사들에게 사직을 종용하기 일쑤였고, 신규 졸업예정자들만 뽑던 시절이었다. 경력은 취업에 장애가 되고, 간호사는 젊을수록 선호되었다. 간호사의 평균 경력이 2.5년이던 시절이다.


약물을 개별 환자 앞에서 섞고 주사하는 건 C 병원의 인력 구조 상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원칙에 입각해서 제대로 한다는 건 그 병원 간호사 수로는 꿈도 꿀 수 없었다. (미국의 병원에서 좋았던 점 중 하나는 언제나 과학적으로 검증된 방법은 비용에 우선해서 선택되었거나 최소한 수정하려는 노력들을 했다. 내가 일했던 병원에서는 언제나 "Evidence- Based -Nursing Practice"를 강조했다. 만약 그러지 않는다면 병원은 누군가로부터 소송을 당하고 거액을 배상해야 할 게 틀림없다. )


C병원이 환자들을 장기입원시키고 링거주사 정도로 돈을 벌 수 있었던 건 간호사들의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환자 대 간호사 수 등으로 가능했던 거였다. 한국의 의료 보험이 병원들의 입원료를 환자 수 대 간호사 수의 비율로 차등지급 하기 시작한 건 아마 2000년도 전 후였을 것이다. 내가 일했던 미국의 병원에서는 환자들이 입원하면 입원하면서부터 퇴원계획이 수립되었고, 시간 단위로 환자 수 대 간호사 비율을 계산하면서 네 명의 환자가 퇴원하면 간호사 한 명도 퇴근시켰다. 간호사와 직원들의 높은 임금 수준은 급성 상태의 환자만 받아야 병원이 최대한의 이익을 낼 수 있게 한다. 급성 상태에서 집중된 검사와 치료가 끝났는데 단순히 거동이 힘들다는 이유로 병원에서 물리치료를 하며 환자를 머물게 하면 병원은 운영이 어려워진다. 그런 환자들은 요양원이나 재활병원으로 보낸다. 게다가 미국의 보험회사들은 환자의 입원기간을 질병별로 심사 기준을 정하고, 추가 기간에 대해 병원 측이 필요 근거를 입증하지 못하면 의료비를 지불하지 않는다. 출산은 무조건 1박2일이다. 흉부 통증은 24시간이다. 그 시간 내에 모든 치료나 검사를 마치고 퇴원시켜야 한다.

예를 들면 심장 수술을 한 환자의 퇴원은 수술 후 5일째이다. 입원시부터 퇴원 후 어디로 갈 것인가, 퇴원 후 누가 환자를 도울 것인가, 요양원은 어느 요양원으로 갈 것인가 등등이 조사되고 준비된다. 이 일을 하는 간호사가 Case Manager라는 직책으로 병동마다 1-2명씩 있었다. 만약 5일 이후에도 병원에 있을 경우, 의사와 Case manager는 하루 더 있어야 하는 의학적 근거를 매일 보험회사에 제시해야 한다. 물론 여기에도 실패하는 수술도 있고 장기 환자도 있다. 장기 환자는 Case Manager들의 회의에서 집중 연구되고 대책이 세워진다. 보험회사들은 질병별로 각 의사당, 의료기관당 재원일 수를 통계내고 공개한다. 한국의 의료 시스템은 의사의 이익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반면 미국의 의료 시스템은 보험회사의 이익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C병원 뒤에는 간호사들을 위한 기숙사가 있었고 나에게도 기숙사에 들어오기를 권했었다. 한 집에 7-10명, 한 방에 2-3명이 거주하던 기숙사는 병원 뒤의 몇 개의 연립 주택들에 흩어져 있었다. 병원 식당에서는 모든 직원들에게 하루 세끼를 무료로 제공했다. 지방에서 올라온 간호사들이 서울에서 따로 방을 구한다면 병원은 훨씬 많은 임금을 주어야 채용 가능했을 것이다. 숙식 제공은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가능케 한다. 병원에서 필요하면 언제든 근무하러 나오는 건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았지만 암묵적으로 당연한 걸로 받아들였다. 1983년 서울의 C병원 간호사들에게는 근로기준법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1990년 민주화의 물결 속에 전국의 병원들에 노동조합이 설립되고 있을 때, C병원에도 노동조합이 생겼다. 병원 측은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았고 온갖 테러를 조합원들에게 자행하여 병원노동조합 역사상 "가장 잔인했던 노조 탄압"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by Gemini). 이 병원은 아직 그 장소에서 건물도 더 세우고 몇배의 규모로 성업 중이다.


보건진료원이 되겠다던 꿈은 왜 현실화되지 않았을까?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다른 바쁜 현실에 잊혀져 갔던 것 같다.

경제적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빚쟁이에 시달리던 엄마가 전화에

"몇 월 몇 일이 우리 딸 월급날이야, 그때 줄게, 조금만 봐줘."

하는 소리를 자주 들을 수 있었고, 그렇게 나의 빈약한 간호사 월급은 들어오기도 전에 사라지곤 했다. 내가 보건진료원이 되기 위해 대학원에 갈 여유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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