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케아, 나의 치욕
2003년 5월 23일이 우리가 미국에 첫걸음을 내디딘 날이다. 나는 7살 12 살의 두 아이를 데리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후 5일 만에 버클리에 방 두 개 있는 아파트를 빌려 이사했다. 그 아파트가 있었던 곳은 조용한 주택가였다. 앞에 몇 개의 계단이 있고 올라가면 현관이 있는 이층짜리 낡고 작은 집들이 빼곡하게 붙어 있는 거리에 달랑 내가 살게 된 아파트만 공동주택이었다. 1층에는 공용세탁기에 동전을 넣어 사용할 수 있는 작고 어두컴컴한 세탁실과 세 집이 있었다. 이층에 네 가구, 삼층에도 네 가구가 있는,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연립주택 같은 건물에 우리 아파트는 이층 동쪽 끝에 자리 잡았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는 재스민 줄기가 타고 올라와 우리가 이사하던 그 무렵엔 하얀 작은 꽃이 아주 향기로웠다. 나는 재스민 향기도, 집이 이층에 있는 것도, 유닛이 한쪽 끝에 있는 것도, 침실마다 주차장이 내려다보이는 넓은 창문이 있던 것도, 한국에서 내가 사용하던 것보다 넓은 부엌이 있던 것도 다 좋았다. 그 집 문을 열쇠로 열고 들어가던 순간 첫째 아이는 "와~, 이렇게 넓은 집에 살게 되다니" 하고 소리쳤다. 우리가 그 집 주차장에 주차하고 가방을 나르려는데 바싹 마르고 왜소한 은발머리 백인남자가 나타났다. 날 보고 "여기엔 주차할 수 없다"라고 했다. 나는 오늘 이사 왔다고 설명했다. 그는 으스대며 다시 말했다. " 여기 살아도 이 주차장엔 주차할 수 없어. 아파트 관리자에게 돈을 내고 계약한 사람만이 주차할 수 있어" " 이미 주차장 사용계약 다 하고 왔는데?" 그는 아무런 환영 인사 없이 돌아섰다. 그래도 좋았다.
우리는 침대며 의자며 식탁이 필요했다. 이불과 베개, 주방기구도 필요했다. 한국에서 이사업체에 알선해 부친 짐은 한 달 후에나 도착할 예정이었고 우린 많은 걸 사야 했다. 옆집에 살던 흑인 할머니는 친절했다. 나에게 이케아에 가보라고 했다. 그 무렵엔 집에서 Mapquest 에서 가야 할 곳을 찾아, 가는 길을 종이에 적고 돌아다녔다. 교통 표지판은 너무 작았고 밤엔 가로등이 없이 깜깜해서 눈 나쁜 나는 잘못 가기 일쑤였다. 선진국 미국의 주택가는 가로등이 없다.
이케아는 미국이 우리에게 신세계였던 것 이상으로 신세계였다. 너무 넓었고 너무 사람이 많았고 너무 물건이 많았고 더욱이 모든 것이 영어로 쓰여 있었다. 한국의 가구점처럼 나를 따라다니며 설명해 주는 사람 같은 건 없었을 뿐 아니라 직원처럼 보이는 사람도 없었다. 우린 먼저 침대가 있는 쪽에 갔다. 다양한 크기의 침대들이 많은 방에 진열되어 있었다. 나는 나와 아이들 둘을 위해 각자 한 개씩 세 개의 싱글 침대를 살 계획이었는데 어디에도 '싱글'침대는 없었다. 침대마다 붙어 있는 상품 설명서를 읽어보고 내가 찾는 건 미국에서는 twin침대라 부른다는 걸 깨달았다. 메모지와 잘 깎은 노랗고 짧은 연필들이 쌓여 있는 곳에서 침대를 사려면 메모지에 원하는 상품코드를 적어 창고로 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날 우리는 필요한 많은 것들의 코드를 빼곡히 적었다. 세 개의 침대와 메트리스, 식탁과 의자, 소파 등등. 하루 종일 걸렸고 그 많은 걸 창고 직원이 카트에 실어 주었을 때 비로소 내가 무얼 사고 있는지 실감이 났다. 난 이걸 운반도 조립도 할 수 없다는 깨달음이었다. 창고 직원은 배달과 조립은 돈을 더 내면 해준다고 날 안심시켰다. 우린 힘을 모아 카트를 밀고 계산대로 갔다. 긴 줄에 많은 사람들이 서 있었고 우리의 산더미 카트는 모두의 시선을 끌었다.
그날 우리는 가구를 고르는 힘든 하루의 노동을 아무 소득 없이 빈 손으로 어두운 밤거리를 돌아오는 걸로 마무리해야 했다. 돈을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가진 모든 돈을 미국에서 은행계좌를 만들자마자 이체했었다. '미국에서는 현금을 들고 다니면 금방 뺏긴다. 100달러는 너무 큰돈이다. 20달러짜리만 들고 다녀라' 등등 내가 들은 헛소리들과 본 적도 없는 총을 든 강도에 대한 두려움으로 내 지갑엔 정말 20달러짜리 몇 개 밖에 없었다. 계산대에서 나는 당당하게 은행에서 받은 수표를 내밀었다. 미국의 개인 수표는 쓸 때마다 금액과 받는 사람의 이름을 적고 내 사인을 하면 되는 것인데 내 수표를 직원은 거부했다. 그 수표는 내가 아직 영구주소가 없어 내 이름과 주소가 인쇄되지 않은 것이었고 미국 내 어느 가게에서도 그 수표는 받지 않았다. 은행에서는 왜 그걸 내게 주었는지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하나은행 비자카드를 내밀었다. 직원은 내 신분증을 보자고 했다. 내 한국여권을 본 직원은 그 여권은 자기네가 인정하는 신분증이 아니므로 내 카드로 결제할 수 없다고 했다. 산더미카트를 뒤로 하고 물러나며 고생한 아이들을 또 하루 카펫 바닥에서 재워야 한다는 게 미안하고 슬펐다. 어떻게 해야 필요한 것들을 살 수 있는지 막막했고 눈물이 났다. 내 카드로 결제해주지 않은 직원이 원망스러웠다. 나중에 나는 돈을 선결제하고 그 한도 내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크레딧카드를 미국 은행에서 만들었다. 미국에서 나의 크레디트 역사가 그렇게 시작되었다.
한국에서 한 번도 침대를 사본적이 없어 침대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혀 없던 나는 다음날 신문 광고지를 뒤져 당일 배송이 가능하다는 가구점에 전화해 내 카드도 받는다는 걸 확인하고 가서 하나은행 비자카드로 세 개의 철제 day bed를 샀다. 가게 주인은 내가 day bed를 세 개나 산다고 의아해했지만 바로 결제하고 당일 배송하고 조립까지 해 주었다. Day bed는 침실용이 아니라 거실 용이라는 걸 알기까지는 다시 긴 시간이 필요했다. 이 침대들은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는, 버려야 할 내 짐 중 하나다. 아니 둘인가? 침대 하나는 오래 전에 새로 이사 온 동료 간호사에게 주었다. 캘리포니아는 침대를 살 때 낡은 침대는 판매자가 수거해서 버리도록 법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몇 년 후 새 침대를 샀을 때 나는 그걸 몰랐고 아무도 고객이 요청하지 않은 서비스를 나서서 해 주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