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의 등장
라이터
로버트 호크(Robert Hocq, 1917 -1979)는 2차 대전 때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일원이었고 나치에 체포되어 투옥되기도 했으며 전쟁이 끝난 후에는 레종 도뇌르 훈장도 받았으나 14세에 아버지가 죽은 후 어려운 가정환경 탓에 고등교육은 받지 못했다.
1953년 로버트 호크는 가솔린을 사용하는 얇은 라이터를 발명하고, 1959년에는 가솔린 대신에 부탄가스를 사용하는 라이터를 개발하여 실버 매치(Silver Match)라는 라이터 제조 회사를 설립하게 된다. 이후 연간 백만 개 이상의 라이터를 판매할 정도로 성공을 거두었다.
로버트 호크는 자기가 만드는 라이터가 품질은 최고인데도 최고급 제품이 아니라는 것이 불만이었다. 로버트 호크는 1968년 골드 라이터를 만들어 당시 가장 고급 라이터였던 던힐과 S. T. 듀퐁을 넘어서는 고급 라이터를 출시할 생각이었다. 로버트 호크는 자신의 라이터를 고급 제품으로 판매하려면 실버 매치의 브랜드로는 어렵다는 생각에서 반 클립 & 어펠스의 상표를 사용하려고 협상했으나 거절당한다. 얼마 후 호크는 카르티에를 찾아가게 된다.
로버트 호크가 찾아간 카르티에는 피에르의 딸인 마리온이 1966년 매각한 이후였으므로 카르티에 가문과는 무관한 사람이었다. 1968년 로버트 호크가 반 클립 & 어펠스를 먼저 찾아가게 된 것도 1947년 피에르가 은퇴한 이후 하향세를 겪고 있던 카르티에의 프레스티지가 1896년에 창업한 반 클립 & 어펠스에 비해 밀리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라이터에 대해 카르티에의 상표 사용권을 얻은 호크는 1968년에 브리케트 카르티에 S. A.라는 회사를 설립하고, 1년 후 파리의 비즈니스 스쿨을 졸업한 28살의 알렝-도미니크 페랭(1942~)이 입사하게 된다. 카르티에 라이터로 큰 성공을 거둔 호크와 매니저로 승진한 페랭은 Cartier의 상표가 가진 판매력을 확인하고는 카르티에의 이름으로 가방, 스카프, 펜, 향수, 선글라스는 물론 저렴한 카르티에의 시계를 만들어 판다면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하게 된다. 이때 직원들과 회의를 하면서 한 직원이 'Cartier. It's must!'라고 한 말에서 착안하여 등장한 것이 'les must de Cartier'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로버트 호크는 친구이자 은행가인 조셉 카로우이(1937 -2000)를 통해 카르티에를 인수할 컨소시엄을 구성하여 1972년 파리, 뮌헨, 제네바, 홍콩에 상점을 가진 파리 카르티에를 인수하는 데 성공한다.
호크는 파리 카르티에를 인수한 후 1973년 '머스트 카르티에'를 만들어 사장으로 취임한다. 이어 단기간에 카르티에의 판매 상품을 늘리기 위해 카르티에의 브랜드로 발매해도 될 수준의 제품을 만드는 회사를 골라 선글라스, 스카프, 향수, 가방과 피혁 제품 등 다양한 카르티에 제품들을 출시한다. 유럽과 미국에 가족이 운영하는 체인점을 가진 보석 상점이었던 카르티에가 피혁, 스카프, 향수 등 다양한 제품군을 거느리게 된 것이다. 머스트 카르티에의 제품들은 호크가 처음 시작한 라이터 이상으로 모두 대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러자, 호크는 뉴욕과 런던의 카르티에를 모두 인수하기로 결정하고 카노우이의 주도 하에 추가로 컨소시엄을 구성하게 된다. 이때 호크의 컨소시엄에 남아프리카 담배 재벌인 안톤 루퍼트(Anton Rupert, 1916~2006)의 담배 그룹인 로스만이 참여하게 된다. 안톤 루퍼트는 카르티에 미국 지사의 지분 20%에 투자하여 미국 시장에 카르티에 담배를 출시하게 된다. 이것이 리치몬트와 카르티에의 첫 인연이었다.
호크와 카노우이가 중심이 된 컨소시엄은 1974년 런던의 카르티에를 인수하고, 1976년에는 로부터 뉴욕 카르티에를 인수하여 '카르티에 몽드'가 설립된다. 파리에서 시작하여 런던과 뉴욕에 지점을 만들면서 독립적으로 운영되던 카르티에가 하나로 통합된 것이다.
호크와 페렝이 생각해 낸 가장 파격적인 'Must Cartier'는 '머스트 탱크'였다. 시계를 제외한 다른 제품들은 머스트 카르티에로부터 시작되었지만 시계는 카르티에 가문 시절부터 카르티에의 주요 제품들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탱크는 머스트 카르티에의 마지막 상품이자 가장 매력적인 상품으로 재등장하게 된다. 카르티에 가문 시절의 솔리드 골드나 보석으로 장식된 시계들을 대량으로 판매하기 어려웠으므로 가격을 낮추기 위해 도금 제품을 생각하게 된다.
1977년 스털링 실버에 금도금을 한 '베르메이' 혹은 '버메일(vermeil: gold coating)'이라는 명칭으로 '머스트 카르티에'의 시계를 처음으로 출시하게 된다. 금도금이라는 말이 보편적인 용어였으나 싼 티가 나는 용어라 프랑스어를 사용한 것이다.
이 무렵은 미국의 카르티에가 1962년에 매각된 후 카르티에 브랜드로 염가의 시계들이 등장하고 한편으로는 짝퉁들이 무수히 등장하던 시절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카르티에 파리를 인수한 로버트 호크와 페랭의 입장에서는 소비자들이 원하는 저렴한 카르티에 시계들이 필요한 시점이기도 했다.
1977년은 얇고 슬림한 시계가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호크와 페랭이 머스트 카르티에의 대표 상품으로 탱크를 고르게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1977년은 일본과 스위스의 얇은 시계 경쟁을 통해 얇고 슬림한 쿼츠 무브먼트들이 개발되어 구찌 2000보다 얇은 시계를 대량으로 제조하는 것이 가능해진 시기이다.
이어 1978년에는 산토스 골드-스테인리스 스틸의 콤비 모델이 처음 출시된다. 카르티에의 브라슬렛 시계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루이 카르티에가 1904년 산토스 듀몽에게 만들어 준 후 일반에게도 판매했다는 역사가 남아 있지만 1978년 현재와 같은 브라슬렛 모델로 재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버메일 탱크와 달리 산토스는 'Cartier' 브랜드로 출시된 점이 다르다. 이런 이유로 카르티에의 제품 중 버메일 제품은 'Must Cartier'로, 스테인리스 제품은 Cartier로 분류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스테인리스 스틸 제품도 로버트 호크 시대의 유산인 것이다.
카르티에 형제들이 죽거나 은퇴한 1960년대 카르티에의 선전물들을 보면 현재의 카르티에를 대표하는 산토스, 탱크 같은 시계들을 찾아보기 어렵다. 도리어 '야거 르 쿨트르(Jaeger Le Coultre)'의 시계들을 납품받아 판매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Cariter는 Tiffany와 같은 보석 상점으로 파텍 필립, 오데마 피게, 롤렉스 등과 더블 네임의 시계도 적지 않게 판매했었다. 탱크와 같은 자체 디자인 모델도 판매했었지만 스위스의 다른 브랜드에서 제조한 고급 시계들도 판매했던 것이다. 카르티에의 역사에 등장하는 매력적인 시계들을 발굴하여 이를 카르티에의 시계 컬렉션으로 만든 것은 카르티에 형제가 아닌 토마스 호크와 알렝의 작업이었던 것이다.
카르티에 파리를 인수한 호크는 1973년 크리스티 경매에 참여했다가 1923년 루이 카르티에가 만든 미스터리 클럭을 발견하고는 이를 낙찰받고, 회사의 직원이었던 에릭 누스바움(1940-2003)에게 중요 경매를 찾아다니며 역사적인 가치를 가진 카르티에의 제품들을 수집하도록 시킨다. 이 무렵 크리스티의 카르티에 전문가인 한스 나이델 호퍼(1940-1988)가 3년간의 조사를 거쳐 Cartier에 대한 책이 처음 출간된 시기였다. 이 책을 바탕으로 누스바움은 1,500 점에 이르는 카르티에의 보석, 시계, 클럭들을 수집하게 된다.
그 후 누스바움은 1983년 카르티에 컬렉션의 총책임자로 근무하게 된다. 그가 수집한 카르티에의 제품들로 1989년 파리에서 'Art of Cartier'가 개최되며 시계, 클럭과 보석 제품들에 대한 첫 번째 전시회로 기억되고 있다. 1980년대에 시계가 럭셔리 사업의 일부로 발전하면서 프레스티지에 대한 근거를 확보하기 위한 마케팅의 일부로 브랜드의 역사가 중요해졌으며 시계 브랜드들에서 전시회를 열고 박물관을 만드는 일이 보편적이 되었다. 로버트 호크와 페랭은 럭셔리 브랜드들이 프레스티지의 근거로 역사를 이용하는 트렌드를 만드는 데도 크게 기여한 것이다.
피에르 카르티에가 죽기 전 연 3,000개 미만의 시계만 판매하며 파텍 필립 이상의 고가의 시계였던 카르티에를 대량 생산하여 판매하자, 카르티에의 고객이었던 부유층에서는
'사장이나 살 수 있었던 시계를 비서의 손목으로 옮겨버렸다.'라고 비난했다.
카르티에의 '이것만은 꼭 사야 해'라는 의미를 가지는 '머스트 탱크'는 디오르와 구찌에 이어 부호들이나 구입하던 고가의 제품들을 직장인들도 구입할 수 있는 가격대로 판매하여 럭셔리의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했던 것이다. 디오르와 구찌가 유행을 상징하는 패션의 개념으로 등장했던 유명 브랜드의 시계는 머스트 카르티에를 통해 럭셔리의 개념으로 확장되게 된다. 20세기 말 '명품'의 시대를 연 것은 영국 왕실과 미국의 록펠러에게 보석과 시계를 팔았던 피에르 카르티에가 아니라 1970년대에 로버트 호크가 창안한 '머스트 카르티에'였다.
담배와 리치몬트
카르티에를 인수하여 사업 확장을 확장하던 로버트 호크는 1979년 벤돔 광장에서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게 된다. 로버트 호크가 사망한 후 그의 부인이 사장이 되고, 그의 딸이 카르티에 보석 디자인의 책임자로 취임한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카르티에 몽드를 운영한 것은 카르티에의 부사장이자 자금을 담당하던 카노우이와 로버트 호크와 함께 머스트 카르티에를 기획하며 1976년 머스트 카르티에의 사장으로 진급한 페랭이었다.
1974년과 1976년 로버트 호크가 영국과 미국의 카르티에를 인수할 때 미국 카르티에의 지분 20%를 투자한 것이 리치몬트와의 인연이었다. 안톤 루퍼트는 1988년 스위스에 리치몬트를 설립한 후 여러 번의 통합과 분할을 거쳐 담배 사업과 럭셔리 사업을 분리하게 된다. 그 결과 1993년 리치몬트 내의 럭셔리 사업을 통합하는 벤돔 그룹을 설립하면서 로버트 호크가 시작한 카르티에 몽드는 벤돔 그룹의 일부가 된다.
안톤 루퍼트는 남아프리카의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의과대학을 다니던 안톤 루퍼트는 학자금이 부족하자 화학 학위를 받아 졸업한 후 잠시 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그리고 드라이클리닝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그 무렵은 1929년 미국의 증시 폭락으로 시작된 세계적인 공황으로 모든 사업이 어렵던 시절이었다. 안톤 루퍼트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담배와 술의 판매는 줄어들지 않는 것을 보고는 주변의 투자를 받아 그의 집 창고에서 담배를 제조하여 판매하게 된다. 1939년 23살에 '부르브랜드 담배 회사'를 설립하게 된다. 이것이 담배 사업과의 인연이었다. 1941년에는 친구이자 반아파르트헤이트(anti-apartheid) 운동가인 친구의 도움을 받아 도산한 담배 회사를 인수하게 되고, 그 친구가 인도의 리테일러들을 소개해 주게 된다.
1953년에는 런던에서 '폴 몰'을 제조하는 로스만의 사장인 시드니 로스만을 만나 75만 달러의 인수 제안을 받게 된다. 당시 5만 달러밖에 없었던 루퍼트는 즉시 남아프리카로 돌아가 보험회사로부터 70만 달러를 빌려 계약 만료 10분 전에야 대금을 지급하고 인수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한편, 영국의 로스만을 인수한 후 1958년에는 영국의 또 다른 담배 기업인 카레라를 인수하게 된다. 1958년 알프레드 던힐이 사망하자 그의 부인인 메리 던힐이 사장이 되는데, 1965년 던힐의 지분 50%를 카레라에 매각하게 되고 던힐이 리치몬트 그룹에 인수되는 시초가 되었다. 이 처럼 파이프 담배와 라이터 제조가 중심이었던 던힐은 로버트 호크와는 무관하게 영국에서 담배 관련 사업을 확장하던 안톤 루퍼트의 로스만에서 인수했던 것이다.
안톤 루퍼트의 장남인 요한 피터 루퍼트(1950~)는 남아프리카 대학에서 경제학과 회사법을 공부하다가 사업에 투신하기 위해 대학을 중퇴하고 뉴욕으로 가서 체이스 맨해튼 은행에서 2년, 라자르 페레레스에서 3년간 근무한 후 1979년 남아프리카로 돌아와 '랜드 상업 은행'을 설립하여 사장이 된다. 그리고 그 사이 해외 기업 인수 등으로 규모가 커진 그룹의 관리를 위해 1984년 아버지의 회사인 렘브란트 그룹에서 일하기 시작한다. 요한 루퍼트의 제안에 따라 1988년 스위스의 추크(Zug)에 리치몬트를 설립한 것이 리치몬트라는 이름의 시작이다. 요한은 1989년에는 렘브란트 그룹의 부회장으로 승진하고, 1991년에는 회장으로 승진하여 리치몬트의 사업을 이어받아 1993년 벤돔 그룹을 설립하게 된다.
던힐은 안톤 루퍼트가 회장이던 시절인 1977년에 몽블랑을 인수하고, 1985년에는 클레오, 1992년 라거펠트를 인수하며 리치몬트 럭셔리 사업의 한 축을 유지하다가, 1993년 요한 루퍼트의 지휘 하에 벤돔 그룹이 만들어지면서 카르티에 등과 럭셔리 사업으로 통합되었던 것이다.
1993년에 통합되는 벤돔 그룹은 로버트 호크가 인수한 카르티에와 이를 바탕으로 1988년에 인수한 피아제와 보메 마르시에, 그리고 루퍼트의 로스만 인터내셔널이 보유하던 던힐 그룹이 합쳐지면서 생겨나는 것이다. 럭셔리 기업들의 통합에 따라 로버트 호크의 가족과 카노우이가 30%의 지분을 보유하게 되었으나, 1998년 리치몬트가 남은 지분을 모두 인수하여 벤돔 그룹이 사라지고 리치몬트 그룹에 통합된다.
벤돔 그룹 시절이었던 1996년에는 불가리와 경쟁하여 바쉐론 콘스탄틴을 인수하게 되고, 1997년에는 이태리의 소규모 상점이었던 파네라이를 인수했다.
이 무렵부터 리치몬트는 담배사업의 비중을 줄이며 럭셔리 사업에 집중하게 된다. 2002년 리치몬트는 독일 만네스만 그룹에 속해 있던 LMH(Les Manufactures Horlogeres'를 30억 스위스 프랑에 인수하게 된다. LMH는 랑에 운트 조네, 야거 르 쿨트르와 IWC로 구성된 시계 회사로 당시 귄터 블륌레인이 사장으로 있었다. LMH를 인수함으로써 리치몬트는 현재 가장 많은 하이엔드 시계 브랜드를 거느린 시계 그룹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