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토중래를 기다리며
세이코의 비극이 시작되는 지점이 세이코가 시계 회사 출신이었다는 점이다. 그 결과 오메가와 론진이 빠진 깊은 수렁에 세이코도 함께 빠지게 되었다. 휴대용 시계의 역사는 그 탄생부터 수백 년간 정확한 만큼 비싸지는 것이 원칙이었다. 롤렉스의 윌즈도프가 손목시계를 회중시계와 동급의 크로노미터로 만든 것이 성공의 시작이었다. 오메가와 론진이 오랫동안 고급 시계였던 것도 회중시계 시절부터 정확한 시계를 만들어 다른 업체들보다 고가로 팔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세이코가 최종적으로 개발한 트윈 쿼츠(Twin Quartz)는 연 오차 2초로 기계식 시계보다 100배, 어큐트론보다도 10배는 정확한 시계였고 당연히 그 정도의 가격으로 팔려야 하는 시계였다. 또한 세이코가 개발한 슬림 쿼츠 시계인 크레도르(Credor)는 데릴리움 정도의 고가에 팔려야 하는 시계들이었다. 세이코는 쿼츠 기술을 통해 오메가와 롤렉스 보다 정확한 시계를 만들고, 데릴리움 수준의 슬림한 쿼츠도 만들었다. 20세기 시계의 역사 내내 이 두 가지 규칙에 예외는 없었다. 그런데 세이코에서 그 기술들로 만든 시계들의 판매가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지지부진했던 것이다.
쿼츠 기술은 조립도 자동으로 가능하여 숙련된 기술자가 필요 없으므로, 공장에서 대량생산이 가능한 기술이었다. 이 때문에 1974년 LCD 시계를 처음으로 출시하고 1983년에 G-Shock를 발표한 Casio에게도 밀리게 된 시티즌은 일본의 ETA가 되어 홍콩 등 동남아 시계업체들에 저렴한 쿼츠 무브먼트를 공급하기 시작했다. 문자판에 'Japan move'라고 표기된 홍콩의 시계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홍콩은 1960년대에 스위스 업체들에 저렴한 가죽줄과 시계 케이스, 문자판 등을 공급하는 부품업체들이 난립해 있었다. 무브먼트만 있으면 시계를 만들 준비가 된 상태였다. 홍콩의 시계 업체들은 내구성이 필요 없는 저렴한 무브먼트를 원했고, 시티즌은 그들이 원하는 무브먼트를 공급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조 설비를 구입하고 중국의 저렴한 인건비를 활용하여 싸구려 쿼츠 무브먼트를 대량으로 자체 생산하게 된다.
홍콩제 시계들은 1980년대에 유행하던 얇은 아날로그시계 생산에 주력했다. 1980년대에 스위스 대부분의 브랜드들이 만들던 타임 온리 혹은 데이트의 얇은 시계들이었다. 1990년대에 스위스의 고급 시계를 상징하던 얇은 시계들이 몰락하게 된 이유이다. 한때 스위스 고가 시계의 특징이었던 얇고 슬림한 시계들이 홍콩에서 대량으로 저렴하게 생산되면서 기계식의 슬림한 시계에 대한 수요가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슬림한 시계가 홍콩제 싸구려 시계와 외관상 차이가 없어지면서 프로페셔널 시계의 유행이 큰 시계의 인기에 불을 붙이게 된다. 1990년대 이후 기계식 시계에 섭마리너 카피 제품들이 무수히 등장하게 된다. 섭마리너가 직경 40 밀리의 시계인 것처럼 이 시계들도 대부분 40밀리는 넘는 시계들이다. 1993년 카시오는 G-Shock의 프로페셔널 버전인 'Frogman'(다이버 시계)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직경 50 밀리에 두께 15밀리의 엄청나게 큰 시계가 젊은 소비자들을 열광시켰다.
한편, 1968년 블로바의 시계들에서 디오르 브랜드로 판매할 시계를 고르며 디자인만 보던 Dior의 디자이너처럼 1980년대의 소비자들은 시계의 정확성에는 관심이 없었다. 소비자들은 머스트 카르티에서 시작된 '프레스티지'와 디오르와 구찌에서 시작된 패션 디자인에 끌려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결국 시대의 흐름은 1980년대에 시계의 정확성에서 패션으로 완전히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 시계 브랜드들에게는 쿼츠 혁명이었지만 소비자들에게는 패션혁명이었다.
패션 시계에서 가격을 결정하는 것은 디자인과 함께 브랜드의 프레스티지였다. 카르티에, 디오르, 구찌처럼 소비자들에게 고급 브랜드로 인식된 프레스티지가 가격 경쟁력을 만드는 요인이었다. 쿼츠혁명기에 3% 정도 남게 된 최상위의 소비자들은 스포츠 시계로 로열 오크나 노틸러스, 정장용 시계로는 브레게와 랑에의 시계들을 구입했다. 롤렉스는 오메가와 론진이라는 강력한 경쟁자가 사라진 대중적인 고급 시계 시장에서 유일한 강자로 살아남게 되었다.
기계식 그랜드 세이코의 부활은 1986년이 기점이다. 1917 년에 스위스 종합 박람회로 출발한 바젤 페어는 1986년에야 처음으로 유럽 밖의 나라들에게도 개방되어 일본이 처음으로 참가하게 된다.
이때 세이코에서 발표한 시계가 쿼츠 그랜드 세이코와 키네틱(Kinetic)이었다. 당시 바젤 페어에 참여하였던 세이코의 직원 '준 다나카'는 스위스의 시계 브랜드들에서 주로 기계식 시계들을 발표하는 데 세이코는 쿼츠 시계들만 발표하는 것이 답답했다. 다나카는 바젤 페어에서 돌아와 기계식 시계의 재생산을 상사들에게 제안해 보지만 실패하고 만다.
1991년은 세이코 창립 110 주년 기념이었다. 세이코의 역사를 상징할 이런저런 시계들을 준비하던 세이코 간부들이 다나카의 제안이 받아들이자 다나카는 세이코의 창고에 쌓여있던 기계식 무브먼트들을 찾아 보게 된다. 그 중 세이코가 아스트론을 발표하던 해인 1969년에 처음으로 개발된 세이코의 가장 얇은 수동 무브먼트인 6810가 상당량 남아 있었다. 스위스에서도 프레드릭 피게나 르 쿨트르에서나 제조하던 1.9 밀리의 슬림 무브먼트를 사용하여 UTD(Ultra Thin Dress) 시계를 만들어 110 주년 기념시계의 하나로 100 개 한정판으로 발매하게 되었다. 이 시계들이 고가의 시계임에도 불구하고 쿼츠 그랜드 세이코보다 일본 시장에서 인기를 끌게 된다.
한편, 기계식 시계가 완전히 부활한 1996년 미국의 리테일러들로부터 기계식 시계를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받자, 동남아시아에서 생산되던 무브먼트(7S26)로 1960년대 세이코의 가장 대중적인 시계였던 '세이코 5'를 만들어 납품하게 된다. 이 무렵 쿼츠 시계에 흥미를 잃고 저렴한 기계식 시계를 찾던 젊은 소비자들에게 '입문용 시계'로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된다. 2000년에는 세이코의 유명한 다이버 시계인 '몬스터(Monster)'가 등장한다. 쿼츠에서 세계 최고의 기술을 보유하고 있던 세이코가 저렴한 입문용 시계의 대명사로 변질되는 순간이었다.
결국 일본 국내 소비자들의 바람에 따라 1998년에 그랜드 세이코를 재판매하기 위해 칼리버 9S를 개발하여 기계식 그랜드 세이코를 다시 만들게 된다. 고급 기계식 시계의 생산을 완전히 중단한 지 20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CAD/CAM 기술을 이용하여 과거의 역사와 무관하게 새롭게 설계된 그랜드 세이코였다.
2004 년 모리오카의 세이코 인스트루먼트 소속으로 시즈쿠이시 시계 스튜디오가 설립된다. 본격적으로 스위스 방식의 공방에서 그랜드 세이코, 크레도르 등 세이코의 고급 시계들을 만들게 된다. 시계의 조립은 CAD/CAM으로는 불가능한 숙련된 조립이 필요한 부분이므로 1970년대 말부터 세이코에서 해고되었던 기술자들이 재취업하여 젊은 기술자들에게 조립 기술을 전수하고 있다.
키네틱에 이어 쿼츠 기술 개발 시기에 마지막으로 개발한 것이 배터리를 사용하지 않고 스프링의 힘으로 전력을 생산하는 '스프링 드라이브(Spring Drive)'이다. 쿼츠 무브먼트이면서도 배터리를 사용하지 않고 기계식 시계처럼 수동으로 스프링을 감거나 오토매틱처럼 로터로 스프링을 감아 작동하는 방식이다. 기계식 시계와 쿼츠의 장점을 통합한 세이코만의 기술이다. 혁명적인 아이디어였지만 소비자들의 호기심만 자극했을 뿐 제품의 성공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세이코는 9F 쿼츠, 스프링 드라이브 등 현재 세계 최고의 쿼츠 기술을 가진 회사이다. 소비자들의 관심이 쿼츠로 돌아오게 된다면 세이코가 꿈꾸던 세계 최고의 시계는 세이코만이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그랜드 세이코가 재판매되면서 세이코의 역사에 매력을 느끼는 서양의 세이코 컬렉터들이 점차 증가하는 추세이다.
일본은 1979년 소니의 워크맨, 1989년 닌텐도의 게임 보이로 10년 간격으로 세계적인 제품들을 개발해 왔다. 그 처음이 1969년의 세이코일 것이다. 1964년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세이코는 전 세계의 시계 시장을 변혁시켜온 선두주자였다. 그러나 세이코의 그랜드 세이코나 아스트론은 소니 워크맨이나 닌텐도 게임 보이 정도로 기억되지 못하고 있다. 세이코에게는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