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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아리 May 10. 2023

5. 아름다운 가게에 가보셨나요

아름다운 가게에 옷 기부하기


이사준비나 미니멀라이프라고 포장하고 있긴 하지만, 그동안 미루고 미뤄왔던 일들을 해내면서 게으른 나 자신을 조금은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과 기대를 품은 하루를 보내는 것이 사실은 더 좋았다. 입지 않는 옷 두 무더기를 버린 일도 그게 별거냐 싶겠지만은 집-회사-집-회사를 반복하는 일상을 살아내는 나에게는, 그게 별거였다! 엄청나게 생산적인 활동이었다! 미니멀라이프를 시작하면서 무언가 결심하고 무언가 해내는 경험을 하는 것에 스스로 들떴었다. 퇴근 후엔 뭐 하냐, 주말에는 뭐 했냐는 물음에 '그냥 쉬었죠'라고 말하고 괜히 움츠러드는 나라서, 옷 두 무더기를 버린 일을 신나게 자랑을 했다.




언니, 그거 아름다운 가게에 기부하면 연말정산 혜택도 받을 수 있어.




역시 세상은 나보다 야무지고 열심히 사는 사람들 투성이구나 싶다. 비슷한 시기에 이사준비를 하던 회사동생이 꿀정보를 알려줬다. 상태가 좋은 옷들은 기부가 가능하고 기부금 영수증도 발행해 주기 때문에 연말정산 세액공제 혜택도 받을 수 있다고 하는데, 심지어 영수증을 제출하거나 해야 되는 번거로움도 없이 그냥 연말정산 기부금 항목에 자동 반영된다고 하니 귀차니즘 딱 싫어하는 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동생은 이사준비를 하며 8만 원 정도의 기부금 영수증을 받았다고 했다.



그거 8만 원이 진짜 8만 원이야?!



공돈을 믿을 수가 없어서 의심부터 했다. 연말정산은 1년에 한 번 돌아오는 기억력 테스트다 보니 설마 나라가 내 돈 잘못 뜯어가겠어 하는 마음이라 아직도 헤맨다. 찾아본 바에 의하면, 근로소득금액의 30%의 한도 내에서 20% 상당액을 세액공제 한다고 하는데 읽어도 뭔 말인지 모르겠고 아묻따 가보자고!






일단 첫 번째로, 기부할 옷들을 정리해야 했다. 저번에는 냉장고 위 수납장 안에 방치돼 있던 입지 않는 오래된 옷을 정리했지만, 이번이 진짜 본게임이다. 나는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4 분할짜리 2단 행거를 지닌 몸이었다. 행거 옷걸이에는 내가 입지 않는 원피스와 블라우스, 치마, 청바지 가릴 것 없이 여러 종류의 옷들이 다 있었다.


백화점 쇼핑 나온 사람처럼 옷걸이 하나하나를 넘겨보며 옷을 골라냈다. 저번 옷 버리기에서는 입지 않던 옷들도 어떻게든 미련을 붙여 떠나보내지 못하는 망극을 벌였는데, 이번에는 내 옷들이 누군가에게 다시 잘 쓰인다고 생각하니 어떻게든 가장 깨끗하고 예쁜 옷들을 찾아내고 있었다. 여행할 때 입고 평소에는 입지도 않은 거의 새거나 다름없는 원피스들을 찾아냈을 때는 이거 완전 멀쩡하잖아! 하고 기쁘기까지 했는데 정말 기뻐해야 되는 게 맞나 싶긴 했지만.


두 번째로는 진짜 실천하는 일이 남았다. 가까운 아름다운 가게를 찾아보니 버스로 가기에는 여러 번 갈아타야 했고, 지하철로 가는 게 가장 무난했지만 집에서 지하철역까지는 도보로 십분 이상이 걸리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옷짐을 들고 이동하는 것이 망설여졌다. 역시 생각대로 '무언가를 하는 것'은 만만치가 않았다. 그러나 나는 해내고 싶었다. 대형 장바구니에 넘치도록 담긴, 이제는 입지 않는 나의 옷들을 보면서 쓸모없어진 물건이 주는 그 무기력함에 지고 싶지 않았다. 나라는 사람이라도 조금이나마 이 세상에 쓸모 있는 사람이고 싶어서 나는 또 결심하고, 또 실천하기로 마음먹었다.



나 주말에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옷을 기부하러 가고 싶어. 같이 가줘. 그 대신 택시 타고 갈게.



가장 만만한 남자친구를 소환했다. 물론 호락호락하게 같이 해줄까 싶긴 해서, 택시라는 가장 효율적인 교통수단을 선택한 후 통보를 했다. 일본 책을 읽고 이상한 도인이 됐다고 돌아오라고 난리를 치더니 그래도 내심 나의 결심과 변화가 맘에 들었는지 선뜻 그러겠다고 해주었다. 너 더 버려야 돼 ~라는 잔소리가 덤으로 오긴 했지만 택시 트렁크에 무거운 옷짐을 싣는 거까지 해주었으니 나에게는 훨 수월했다. 가는 길에 택시가 막혀 올라가는 미터기를 보며 질끈 눈을 감았고, 이렇게나 한가득 옷을 가져와서 기부가 아니라 처분하는 사람처럼 보일까 마음이 쓰였다.




떨리는 마음으로 가게에 들어섰다. 생각과 다르게, 가게는 기부하러 온 사람들과 물건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로 시장통이었다. 넘치는 사람들을 보자 마음이 편해졌다. 나에겐 특별한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일상이었구나 싶은 마음이 들자 용기가 생겼다.



그날 나는 32개의 물건을 기부했고, 58,560원의 기부금 영수증을 받았다. 택시비는 12,000원이 나왔다. 이날 하루가 남는 장사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눔을 굳이 값으로 매길 필요는 없었다. 실천함에 뿌듯하고 나눌 수 있음에 감사했다.(빠꾸 먹은 옷이 없어서 기뻤다.)






기부를 마치고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일산 호수공원을 산책했다. 어렸을 때부터 나고 자란 동네라 늘 이곳에 오면 초중고 졸업앨범을 찍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서른이 훌쩍 넘은 나이가 되어서야 집도 회사도 이 동네를 떠나게 됐다. 이제야 이 동네를 진짜 졸업하게 됐다. 다른 곳보다 늦게 피는 벚꽃이라 아직 흐드러지게 피어있을 줄 알았지만, 이곳의 벚꽃도 벌써 새싹이 났다. 벌써 져버린 벚꽃이 아쉬운지 아직 열심히 피어있는 벚꽃나무 몇 그루 앞에서 사람들이 몰려 사진을 찍는다. 모두가 피어있을 때 함께 피지 못해 초조해했을 벚꽃나무였을 라나. 함께 걸으며 공원을 눈으로 담고 사진으로 담았다. 기분 좋음을 느끼는 순간으로도 충분했는데, 오늘은 뜻밖에 그게 넘치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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