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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tory of
Future Writers

by 정아리 May 14. 2023

6. 아무 냄새도 안 나

무취의 인간이 되기로 했다




내 남자친구는 향수광이다. 내가 얘를 만나지 않았으면 그 많은 향수 브랜드를 알려나 했을 정도로 이곳저곳을 따라다니며 향수 시향을 하러 다녔다.


만나면 매일 다른 향수를 뿌리고 오는지 자기한테 좋은 냄새가 나지 않냐며 늘 물었다. 내 코는 남들에게서 나는 향을 잘 캐치해 내는 코가 아니었다. 나는 막코이기도 했고 걔를 놀리는 게 재밌었기 때문에 늘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별로. 아무 냄새도 안 나. 뿌린 지도 몰랐어.


관심 없다는 듯이 대충 대답하면 남자친구의 손목이 바로 내 막코에 날아온다. 뒤통수 머리채를 잡고는 자기 귓볼에 얼굴을 박기도 한다.


잘 맡으라고.


갑자기 날아든 공격에 나는 어쩔 새도 없이 숨을 들이쉰다. 좋은 냄새가 날 때도 있고 머리 아픈 냄새가 날 때도 있었던 것 같은데 결론은 매번 향이 다르니 딱히 기억나는 향은 없다는 것이다.






백화점 1층에 수개의 향수매장을 둘러보면서 인기가 있는 브랜드는 시향을 위해 줄을 서 기다리기도 했다. 한껏 멋을 낸 사람들이 차례를 기다렸다. 순서가 되면 모두가 인터넷에서 미리 공부해 온 듯한 향 이름을 말했다. 그러면 은은한 미소를 띤 직원분께서 백화점의 모든 물건이 그렇듯 존재만으로 반짝반짝 빛이 나는 수십여 가지의 향수들 중에서 하나를 골라 손목이나 시향지에 향수를 두어 번 뿌려주었다. 귀로는 잘 들어오지는 않지만 그럴듯한 향에 대한 설명을 듣고, 코로는 잘 만들어낸 향을 맡았다.


그러다 보면 내 취향에 딱 들어맞는 향수를 찾기도 했다. 백화점 1층의 수십 수백 가지의 향수들 중에서 내 마음에 쏙 드는 향수를 찾았으니 마치 대단한 운명의 향수를 만났다는 생각에 휩싸였다. 자신의 향수를 찾기 위해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있는데, 나는 기어코 만난 이 운명의 향수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그 생각은 가지고 싶다, 가져야 한다!라는 생각으로 금새 번졌다.



그러나 고급향수들은 향이 강하고 지속력이 좋았다. 잠깐 향기를 맡았을 땐 그 향이 좋았더라도, 하루종일 나에게서 그 향이 나는 건 또 달랐다. 나는 막코였지만 왠지 두통이 있는 듯한 날이면 고급향수를 뿌린 날이었다. 선뜻 손이 가지 않는 날들이 늘었고, 출근하는 아침엔 바빠서 잘 뿌리지도 못했으니 운명의 향수는 줄어들 일이 없었다. 그래도 비싼 값을 지불한 터라 화장대 위에 예쁘게 놓았다. 향수의 제 역할 대신 고급져 보이는 인테리어 소품 역할을 했다. 백화점 출신이니 존재만으로도 진짜 예쁘기는 했다. 하지만 내가 인테리어 소품으로 쓰기 위해 그 가격을 지불했을까? 그건 절대 아니었다.




그렇게 단지 향이 좋아서, 좋아 보여서, 왠지 있어야 할 것 같아서 구매한 물건들이 늘어갔다. 향수, 디퓨저, 바디와 헤어제품들처럼 제 기능에 향기를 한 겹 더해주는 물건들이 그랬다. 좋은 향기도 나는데 병이나 패키지가 예쁜 제품들이 많아 구매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고 말았다.


자취인이라면 집안 구석구석 향기제품이 있어야 했다. 유튜브 브이로그들을 보면 누구나 그렇게 살았다. 나도 집이 습할 때나 분위기 전환용으로 피우는 향초를 여러 개 가지고 있었다. 일정 시간 이상 피우면 향기가 나지 않기 때문에 녹은 향촛물은 따로 부어 버려야 한다(절대 배수구에 버리면 안 됨). 가끔 일회용 커피컵에 부어 버렸는데 늘 커피컵이 집에 있는 게 아니니 향촛물을 버리는 것은 아주 귀찮은 일이었고 좋아 보여서 샀는데 쓰다 보니 자리만 차지하게 된 물건이 되어버렸다.


디퓨저도 화장실에 한 개, 주방에 한 개 두었다. 처음에는 매장에서 맡았던 그 좋은 향기가 나는 것 같았지만 어느 새부터는 향에 익숙해져서 인지 냄새를 맡을 수 없었다. 그럴 때마다 디퓨저에 꽂아놓은 섬유막대를 거꾸로 돌려 향을 되살렸는데 그때 손에 묻는 기름은 매번 찝찝함 그 자체였다. 그런데도 나는 유튜브를 보며 남이 사용하거나 남이 좋다고 하는 다른 디퓨저 제품들을 호시탐탐 탐냈다.


욕실 수납장에는 헤어 바디제품들이 줄지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냥 놓여 있었을 땐 몰랐는데 정리하려고 바닥에 늘어나보니 정말 많았다. 이 물건들 중에서 내가 매일매일 사용하는 물건은 딱 하나, 가장 최근에 구매한 헤어에센스 한 개 제품이었다. 이것도 이미 사용하는 헤어에센스가 있는데도 친구가 쓰는 제품이 향이 너무 좋아서 따라서 사고 말았다. 그러니 나머지 물건들도 분명히 살 때는 좋아 보여서 샀을 텐데도 어느새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 물건들이 쌓이고 쌓여 어지럽게 늘어져있었다.


물건들을 다시 마주했을 때 내가 운명이라고 느껴지는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쓰지 않는 물건의 존재로 인해 나는 괴로웠다. 향이 좋았었는데, 그냥 좋아 보였는데, 왠지 있어야할 것 같았는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버리기 위해 ”남은 바디로션 버리는 법“을 검색했더니 그냥 물에 흘려보내면 물이 오염돼 땅까지 오염된다고 한다. 환경파괴범까지 되고 싶지는 않은 거보니 더 이상 나 자신에게 실망하고 싶은 일은 안 만들고 싶나 보다. 안 쓰는 수건 하나를 꺼내 사용기한이 훌쩍 지난 바디로션을 그 위에 탈탈 털었다. 바닥에 남은 로션까지 털어내려면 여러 번 내려쳐야 했다. 안 쓰는 헤어제품들도 털었다. 여러 번 하다 보니 버리는 게 더 귀찮았다. 끝까지 잘 쓰지 못해 이 귀찮음을 느끼고 있는 나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돈주고 산 물건인데 이 고생을 사서하니 그것도 한심스러웠다.


디퓨저 용액도 수건에 콸콸콸 부어 흡수시켰다. 병까지 깨끗하게 닦아버리고 싶은데 입구가 좁아 그렇게 할 수도 없을뿐더러 기름이라 그런지 여러 번 헹궈내도 말끔해지지 않았다. 기름으로 덜룩덜룩한 디퓨저 병을 보니 처음에 있어 보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누구 좋으라고 이걸 쓰나. 다시는 디퓨저를 사지 않겠다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이삿날 아침, 이사를 도와주러 온 남자친구에게 미션을 주었다.


이거 버리고 갈 거니까 너가 다 뿌려.


마지막 남은 향수 한 개를 건넸다. 분명 이사 전까지 다 뿌리리라 결심한 후로 열심히 뿌렸는데도 아직도 바닥에 조금이 남아있었다. 남자친구는 신나게 턴을 돌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뿌렸다. 그래도 네다섯 번 정도만 더 뿌리면 더 이상 안 나올 줄 알았는데 뿌리면 뿌리는 족족 나왔다. 결국 내 손목과 머리끝에도 몇 번 뿌려서야 향수는 제 몫을 다해 떠나갔다.




힘들게 떠나간 물건들의 자리를 다시 구태여 채우고 싶지 않았다. 똑같은 잘못과 후회를 되풀이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향기제품들을 더 이상 사지 않기로 했다. 무취의 인간이 되기로 했다. 이제는 순간의 향기가 주는 운명 같은 만남에 더 이상 취하지 않겠다 마음먹었다.


아무 냄새도 안 나.


그게 당연한 거니깐 뭔가를 잃었다거나 남들보다 가지지 못했다고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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