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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아리 May 07. 2023

4. 미드나잇 패션쇼

입지않는 옷 미련없이 버리는 법



사무실에서 분명 하루종일 앉아있었는데도 이 놈의 저질체력 때문에 퇴근길 지하철에서도 어찌나 궁둥이를 붙이고 싶은지, 자리 사냥을 하느라 아주 그냥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사냥에 성공한 날이든 실패한 날이든, 어쨌든 모르는 사람들과 보이지 않는 경쟁에 참가한 것만으로 남은 체력이 또 줄어든다. 집까지 터벅터벅 걸어 오늘의 걸음수까지 채워내야 하루 일과가 끝이다. 이제 좀 쉴까 하고 잠깐 누워있다보면 꼭 잠에 들었다. 그 잠이 어찌나 맛있는지. 잠깐 눈을 붙인 후 9-10시쯤 다시 일어나, 아침보다 더 상쾌하고 말짱한 그 정신상태로 진짜 내 할일을 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날도 집에 돌아와 눈을 잠깐 붙이고 배도 좀 채우다보니 열두시가 되어버린 시각이었다. 이제 자야 하는데 자기 싫었다. 출근싫어병 말기라서, 지금 잠에 들면 내일이 와버리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밤을 좀 더 즐겨볼까. 가만히 누워 천장만 보며 취침시간만 삐대는 대신 내가 이 집에서 무엇을 해야하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냉장고 앞에 의자를 턱 가져다두고 두발로 딛고 올라섰다. 그리고는 냉장고 위 수납장을 열었다. 언제 채워넣었는지도 모를 겨울 니트들이 잔뜩 잠들어있었다. 너네도 일어나라! 수년 수개월동안 잠들어있던 그 옷들을 깨웠다.


손을 뻗어 한 두벌씩 집히는 대로 끄집어내 바닥에 내동댕이 쳤다. 저 깊은 안쪽까지 옷이 채워져있었다. 의자까지 딛고 올라서야 손이 닿는 공간이라, 자주 입지 않는 니트들만이 이 곳에 남아있었다. 이런 옷도 내가 가지고 있었구나. 얼굴을 마주해야 기억이 떠오르는 옷들도 있었고 한때는 애정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느새 멀어져버린 옷들도 있었다.


내팽겨친 옷들이 바닥에 금방 수북이 쌓였다. 그 모습이 옷 무덤 같았다. 그동안 설마 너네 죽은거니..?


수년 수개월동안 맑은 공기 한번 들이마시지 못한 채 수납장 안에 포개져 있던 옷들은 말라붙은 것처럼 볼품이 없었다. 한눈에봐도 더 이상 나를 예쁘게 치장해 줄 옷들이 못 되었다. 때가 되었구나. 집을 줄여야 하니 입지 않는 옷은 버려야할 물건 1순위였다. 소중히 잘 가지고 있다가 이삿짐으로까지 고이 싸갈 이유가 없으니, 미련없이 버려야 했다.






마음을 굳게 먹었다고 해서, 모든 옷들에 미련없이 쌩하고 돌아설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가슴팍에 토끼 스티치가 둥글게 있는 니트는 귀여운 걸 좋아하는 나의 취향이었고, 뒷등에 리본이 있는 검정 니트는 앞모습은 단정한데 뒷모습은 포인트가 되는 옷이라 좋아했다. 갈색 크롭 니트는 교토여행 때 입었던 추억과 애정이 있는 옷이었다. 나의 손때가 묻은 옷들을 보자, 옷에 남아있는 좋은 기억이 떠올랐다. 이 옷들을 예쁘다 하며 입었던 그때의 내가 떠올라 잠시 망설여졌다.



옷을 버려버리면 이마저도 기억이나 하려나..?



그게 미련이라, 한밤중 패션쇼를 열었다. 형광등 조명 ok. 자정이 넘은 시간이니 음악은 없다. 서둘러 옷을 입어보았다.




근데 잠깐.. 뭐가 좀 잘못된 것 같은데?



한껏 구겨진 옷을 입은 터질 듯한 내가 등장했다. 지나가버린 옷을 입은 거울 속 내 꼴이 아주 우스웠다. 육성으로 와.. 하고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탄사가 나왔다. 정말 내 모습에 놀랬다. 더 이상 토끼 스티치가 있는 니트를 입을 나이가 아니었고, 애정하는 니트를 입은 나는 양팔뚝이 터질 듯 했다. 무릎 위로 올라오는 치마들은 이제는 나의 취향이 아니었고, 그때는 예쁘게 입었던 것 같은 옷들도 지금 보니 엥? 이런 옷을 입었다고? (목에 이상한 털이 달림) 싶을 정도로 아주 요상했다. 그때의 옷들에 ”지금”을 입히자 바로 정뚝떨이 되버렸다. 아니어도 한참 아닌 모습이었다.



그때의 나까지 요상하게 만들기 전에, 지금의 나는 다시 옷을 고이 개어, 버렸다. 마지막까지 구질구질하게 매달려봐야 뒤돌아 후회없는 건 사랑이나 물건이나 마찬가지인걸까.





그날 밤 옷 두무더기를 버렸다. 그때의 좋았던 나는 마음에 채우고, 지금의 나는 수납장을 비웠다. 관객은 나 혼자라서 그나마 다행. 웃음은 나누면 좋은거니 친구들과 우스운 내 꼴을 나누었다. 나는 버렸으니 됐다.


비웠더니 역시나 즐겁고 기쁘다.




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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