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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아리 May 01. 2023

3. 침대 파레트를 들춰 올린 날에 나는

미뤄왔던 것을 해냈다



그냥 어지간히 할 일이 없던 어느 날, 시간을 때우기 위해 회사 컴퓨터로 몰래 책을 읽었다.



사사키 후미오의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



어쩌다 그 책을 선택하게 되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아무래도 유튜브 같은 데서 슬쩍 봤으려나.

책을 읽어 내려가며 A4 종이 한 장에 감명 깊게 읽은 구절들을 적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종이 한 장이 가득 채워졌다.



불만투성이에 불행하다고 느낀다면 물건을 줄여보라. 반드시 무언가 바뀔 것이다.



그 말을 왜 그렇게 철석같이 믿었을까?






첫 출근하는 사람이 이렇게 늦게 와서 놀랬어요.



서울로의 첫 출근이니 출근시간이 정확히 얼마나 걸릴지 몰랐고 돌발상황이 생길까 7시도 되지 않은 이른 아침에 지하철을 탔다. 아무 돌발 없이 서초역에 잘 도착했고, 주변 카페에서 커피 한잔을 마셨다. 배가 고파 함께 시킨 계란 샌드위치가 아주 맛있었고, 단정해 보이고자 새로 산 푸른 블라우스도 마음에 들었다.

출근시간이 다가오자 먼저 들어가는 직원들을 따라 회사로 들어갔다. 사무실에 도착했지만 아직 출근한 직원이 없는지 문이 잠겨있었고 출입권한도 등록되지 않은 상태라 먼저 들어갈 수 없었다. 화장실에 가 양치를 하고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러다 사무실 문이 열리는 인기척이 나자, 처음 만난 같이 일하게 된 동료에게 다가가 "안녕하세요"라고 첫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라는 답 인사가 아닌, 지각도 하지 않은 나에게 늦었다는 말이 왔다.



**씨는 무슨 꽃이 나오는지 찍어보자.



봄이 되어, 함께 일하는 직장동료들 여럿이서 점심 후에 회사 근처 공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공원 한켠에 누군가 관리해 놓은 듯한 예쁜 정원이 있었다. 잠시 멈춰 심어진 꽃들을 구경했다. 이건 무슨 꽃이지 하는 과장님의 물음에 스마트한 남자직원동료가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더니 바로 무슨 꽃인지 알아내 답을 했다. 다들 신기해하니 다른 꽃들도 찍어 계속해본다. 딱히 할 말도 없이 풍경만 보고 있던 참에 서로 몇 마디가 오가니 분위기가 올라간다. 그러다 저 말이 쑥 들어왔다. 작년 봄부터 같이 일하게 된 새로 온 남자 상사의 말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사람들을 미워했다. 내뱉는 것이 없으니 하루가 갈수록 미움이 계속 들어찼다. 마음에 미움이 가득 쌓여 빈 곳이 없었다. 좁아진 마음에 어떤 것도 좋게 생각되질 않았다.


불만투성이에 불행한 나라서, 물건을 줄이면 무언가 바뀔 거라는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침대 파레트부터 버려야 했다.

부피가 크고 그 무게가 엄청 나 이삿짐으로 싣고 가기도 힘들뿐더러 파레트 먼지 속에서 더 이상 자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버려야 할지 감도 안 오는 물건이라 일단 당근마켓에 올려 보기로 했다.



울리는 알림에 신기하고 얼떨떨한 마음이었다. 이걸 누가 사갈까 싶었는데 다행히 사겠다는 구매자분이 여럿 있었다. 내가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고 버려야만 하는 물건을 다시 잘 사용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니. 심지어 우리 동네 어딘가에, 나에게 적정한 가격까지 지불하면서까지 말이다. 정말 엎드려 절까지 하고픈 마음이었다.



거래를 성사시켰고 이제 진짜 침대 파레트를 문 앞에 내놓아야 했다. 3년간 들추지 않았던 침대 파레트를 들춰 올려, 그 안에 무수히 쌓인 먼지와 예뻐 보인다는 이유로 큰 고민 없이 들였던 침대 파레트와 드디어 이별할 시간이 왔다. 이 날을 위해 회사에서 꽁쳐온 장갑도 꼈다. 비장한 마음으로 파레트 끝을 잡고 양팔로 들춰 올리기 시작했다. 정말 개무거웠다. 이 순간 나는 역도선수 장미란이었다. 한 호흡 한 템포도 어긋나면 안 되었다. 순간 힘이 풀리면 나는 이 파레트에 깔려 중상을 당할 것 같은 무게였다. 정말 역도선수처럼 어깨높이까지 파레트를 들춰 올린 후 1차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한번 더 있는 힘껏 팔을 올려 힘을 실었지만 파레트는 그 이상 올라가지 않았다. 더 이상 팔의 힘으로는 버틸 수가 없었다. 그때, 살고자 하는 의지였는지 물건을 버리고자 하는 의지였는지, 두 팔 사이로 머리를 욱여넣었다. 정수리로 받쳐 올려 파레트를 거의 180도까지 들춰 올렸고 그제야 파레트가 반으로 접혔다.



물건버리기의 장대한 시작이었다.

두 손을 번쩍 들고 만세를 외쳤다.






기억에서 지우고 플 정도로 쌓인 먼지를 여러 번 닦아낸 후에야 침대 파레트가 있던 자리가 깨끗해졌다. 그동안 쌓이고 쌓인 먼지 덩어리들 속에 뭉쳐있던 나의 게으름이 드디어 눈앞에서 치워졌다. 텅 비어진 공간에 마음이 트이고 홀가분했다.

마침내 물건 한 가지를 줄였다. 한 가지를 해냈다. 뭔지 모를 해방감이 몰려왔다. 더 많은 것을 줄이고, 더 많은 것을 해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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