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아리 Apr 27. 2023

1. 초현실주의 출근길

서울 출퇴근 지하철 후기




우다다다다-



오늘도 제대로 말리지 못한 머리를 날리며 뛰쳐나간다.

엘리베이터가 4개나 되는데, 그중에 3개를 잡는 초초초 이기적인 17층 사람 누구니 정말!!

아침부터 얼굴을 찌푸리게 하는 일이 시작돼도 그것에 몰두할 겨를이 없다.

당장 내 앞에 놓인 출근만이 중요할 뿐!



무조건 7시 29분 지하철을 타야 해!



종종걸음으로 걷다가 앞서가는 사람을 빠른 걸음으로 역전해 본다.

횡단보도 빨간불에 멈춰 잠시 숨을 고른다.

평소에도 차가 잘 다니지 않는 횡단보도라 몇몇 사람이 빨간불에도 신호등을 건너버린다.



아, 나도 따라 건널걸..(이것이 현실)



특별히 양심이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용기가 없는 나다.





7년여 동안 일하던 곳에서 서울로 근무지를 옮기게 되었다.

오랜 기간 동안 편하게 출퇴근을 했으니 이제부터는 조금은 고생을 해도 된다고 나조차도 생각했다.

부모님과 함께 산 5년 동안에, 나는 아빠의 출근소리에 잠을 깨 일어나 씻기 시작했다.

퇴근 후에는 소파에 누워있다가 아빠가 오시면 몸을 일으켜  "다녀오셨어요" 하고 인사를 건네던 생활이었다.

대체 출근을 한 건지 안 한 건지 알 수 없다던 아빠는 고생 좀 해보라며 나의 서울출퇴근을 격하게 환영하셨다.

이제 집에서 회사까지 1시간 30분이 걸렸다.



새로운 환경에서 일하게 되는 설렘과 긴장이 있었다.

아침을 일찍 시작하니 뭔가 부지런한 사람이 된 것 같기도 했고, 이른 아침에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을 보며 안주하며 살아온 나 자신을 반성하기도 했다. 힘들지 않냐는 주변 동료들의 물음에는 '이제 좀 열심히 살아보려고요' 라며 나는야 긍정왕인 냥 웃었다. 그땐 정말 그랬다.

난 늘 내 삶에 진심이었다. 최선이 아니었을 뿐.



사람도 일도 적응이 되자 긴장이 점점 풀려갔다.

7시 5분에 타던 지하철은 출근시간 마지노선인 7시 29분 열차로까지 늦어졌다!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루는 나의 특기가 되살아났다.

환경이 바뀌어도 나는 나였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인사를 전하고픈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가 서초역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분들입니다.



무릎 위에 투미 백팩을 올려두신 어머님

다리사이에 백팩을 내려두고 앞으로 몸을 숙인 채 아이패드로 영상을 보는 선생님

머리가 반쯤 없으시지만 단정히 무스를 발린 정장차림의 선생님

다정히 팔짱을 끼고 깊은 잠에 빠져있는 사내커플로 추정되는 신혼부부님 등등..



29분 열차에 올라타 이들을 만난다면 나는 한줄기 희망이 있다.

이분들이 내리는 역까지만 버티면! 나는 그들이 앉았던 자리를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새 사람들이 빽빽이 들어선 출근길 지하철 열차칸에서 궁둥이를 붙였느냐 못 붙였느냐의 여부는 내가 세상에 대한 감사를 품을 것인지 세상에 대한 저주를 품을 것인지의 고뇌로까지 이어지며,

정말 진지하게 목욕탕의자나 낚시의자를 휴대하고 다닐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까지의 고찰의 시간이 주어진다.



이런 출퇴근이 일 년 반 넘게 계속되자, 나는 정말 지쳐버렸다.

퇴근해서는 일단 눕기 바빴다. 잠깐 쉰다는 것이 꼭 잠에 들어, 늦은 시각에 다시 일어나 밥을 챙겨 먹었다.

그리고는 내일이 오는 것이 싫어서 늦게까지 다시 잠들지 않았다.

내일은 부지런히 일어나 차분히 준비해 볼까. 늘 결심은 했지만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단정해 보이지 않는 차림이 괜히 신경 쓰이고, 늘어가는 체중에 자신감이 떨어지는 나날이었다.

나도 집도 내 하루도 엉망인 나날들이 쌓여갔다.






오며 가며 얼굴만 알고 지내던 동기가 다른 곳으로 가게 되어서 그 김에 점심 한 끼를 같이 하기로 했다.

옮긴 직장에서는 거의가 모르는 사람들이라 마음 편히 이야기할 사람도 몇 없었는데,

오래간만에 편한 사람을 만나 일은 이래서 힘들고 사람들은 이래서 힘들고 출퇴근은 이래서 힘들다 터놓고 이야기를 했다.



"서울에 이런 아파트가 있는데 혼자살 수 있는 평수도 있는 것 같더라고, 신청해 보는 게 어때?"



사무실에 올라가 공고문을 찾아봤다. 모집마감일이 일요일까지였다. 어떻게든 가진 돈을 끌어모으면 될 것 같았다. 서둘러 제출서류들을 발급받아 접수를 한 게 금요일 오후였다.



이때가 작년 크리스마스 즈음이었다. 당첨자 발표일은 12월 30일.

나름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낸다고 달아놨던 크리스마스 오너먼트에 혼자 소원을 빌었다.



"이사가게 해주세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