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스트릭랜드
서머싯 몸의 소설 [달과 6펜스]의 주인공이다. 화가 '폴 고갱'을 모티브로 만든 인물이지만 많이 다르다.
소설 속 인물로서 그의 삶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아래에서는 '찰스'라고 줄여서 부르겠다.
찰스는 과묵하고 둔하며 삶에서 딱히 재미있는 일을 쫓아 사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따분한 직업으로 보이는 증권거래소의 주식 중개인이었다. 그의 아내는 품위 있는 생활과 교양 있는 사교모임을 좋아하는 상류계급의식이 무척 높은 여성이었는데, 그는 그런 아내와 17년간을 큰 문제없이 살아왔다. 아침에 증권거래소로 출근하여 하루 종일 일을 하고 저녁에 집에 와서는 부인이 주최하는 대단한 사람들과의 저녁식사나 사교모임에 참여하고, 가끔은 교양 있는 남자들과 클럽에서 카드놀이를 하고, 여름에는 해변으로 가족여행을 가고, 이렇게 평범한 중산층 가정의 삶을 살았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는 이렇게 사는 삶에 신물이 났다. 썩 즐겁지 않은 일을 20여 년 가까이 한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마음 속에 다른 열정을 품고 있을 때는.
이즈음, 어렸을 때 막연히 꿈꾸었던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욕망이 그의 마음속에서 되살아났고, 그는 집을 나가기 1년 전부터 아내 몰래 그림을 배우러 다니기 시작했다. 아내에게 알리고 아내의 지지를 받아서 그림을 배우러 다녀도 됐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만일 알렸더라면 아내와 주변 사람들의 간섭이 들어오기 시작했을 테고 그가 정말 원하는 일을 하는데 방해가 될 거라고 생각한 듯하다. 1년간 몰래 그림을 배우러 다니면서 그는 현재의 삶이 자신에게 아무 의미가 없음을 깨달았다.
'지금부터는 원하는 대로 살겠다. 더 이상은 주식 중개인으로, 교양 있는 남편 역할로 하루하루를 따분하게 보내지 않겠다'고 찰스는 작정했다. 아이들(남매)도 어느 정도 자랐으니 어머니의 돌봄으로 충분하리라고 생각했다. 그의 아내만 해도 그가 없어도 충분히 잘 해낼 정도로 강한 여성이었다. 애매하게 추진하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될 줄 알았기 때문에 결심을 굳힌 그는 단숨에 집을 나갔고 아내에게는 편지 한 장으로 자신의 입장을 전했다.
이건 정말 지나치게 매정한 방식이다. 하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최선의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조금만 틈을 보여도 그의 아내는 결코 자신을 놓아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의 아내는 남편이 죽을 때까지 절대 이혼을 해주지 않았고, 자신의 분노를 참아내면서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도와줄 용의가 있다고까지 말했다.
찰스는 집을 나와서 파리에 갔을 때 거의 무일푼이었다. 그의 나이는 마흔 살. 우리 시대에도 마흔에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건 큰 용기가 필요한데, 그 시절에 안정적인 가정과 직업을 버리고 그림을 그리겠다는 것은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정신적인 준비는 철저하게 했는데 물질적인 준비는 거의 안 했다. 그래서 그의 파리 생활은 그의 아내의 추측과는 달리(그의 아내는 그가 어느 여자와 바람이 나서 함께 도망을 간 거라고 믿고 싶어 했다) 빈민가의 몹시 허름한 여관에 머물면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빈궁한 생활을 했다. 몇 년간 계속 같은 옷을 입었고, 굶기를 밥 먹듯 했고, 그 때문에 정규 미술교육기관에서 수학을 못하고 혼자서 미술 기법들을 깨우치느라 애를 먹어야 했다. 찰스가 일거리를 찾는 이유는 그림 재료를 사기 위해서였다. 필요한 것들을 사면 돈이 떨어질 때까지는 일을 하지 않고 그림을 그리는 데만 몰두했다.
찰스는 체스 두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가끔은 카페에 가서 지인들과 체스를 두곤 했다. 그가 파리에서 알게 된 사람 중엔 더크 스트로브라는 조그마하고 땅딸막한 남자가 있었다. 찰스가 도저히 봐줄 수 없는 저질스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었지만, 심성은 착해서 예술가를 알아보고 인정해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찰스는 그 사람한테 돈을 꾸곤 했다. 그런데 찰스는 더크 스트로브만 보면 그가 착한 사람인 줄 알면서도 자꾸 못되게 굴어서 결국 둘 사이는 관계가 틀어지고 한동안 왕래를 하지 않게 되었다.
그해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때쯤 찰스는 심하게 열병이 걸려서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아마도 이때 더크 스트로브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그는 그대로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어느 평론가에 의해 죽은 지 4년이 지나 인정받은 위대한 화가는 탄생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더크 스트로브(남성적인 매력은 없지만 심성이 착하고 자존심이라고는 부릴 줄 모르는)는 죽어가는 그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살려냈다. 그의 성질을 다 참아내면서. 찰스에게는 엄청난 은인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찰스는 이 은혜를 배신으로 갚고 말았다. 이런 점에서는 찰스가 참 파렴치한 남자처럼 느껴진다.
더크 스트로브에게는 미인은 아니지만 몸매는 제법 뛰어난 아내가 있었는데, 그녀는 남편의 강요로 찰스를 자기 집에 들이고 돌봤다. 찰스를 돌보는데 남편 못지않게 정성을 다했다. 찰스가 살아나는 데는 더크 못지않게 그녀의 도움도 컸다.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하는 걸 다 해줬다. 그런데 더크의 집에서 지내는 동안 찰스는 더크의 아내와 정을 통하고 말았다. 그것이 애정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는데, 더크의 아내는 찰스를 증오하는 만큼 그를 간절히 원했고, 찰스는 그녀를 자신의 필요를 채워줄 사람으로서 원했던 것 같다. 더크가 없을 때 둘이서만 있는 시간들 속에서 둘의 감정은 깊어졌다.
더크가 찰스에게 이제 좋아졌으니 나가라고 했을 때 더크의 아내는 자신도 따라나서겠다고 해서 더크뿐만 아니라 찰스를 깜짝 놀라게 했다. 찰스는 그녀와 정을 통하기는 했지만 그녀가 자신을 따라나서기까지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 상황을 고통스러워하던 더크가 찰스에게 도와달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찰스는 자신이 참견할 바가 아니라고 해서 더크를 더 분노하게 만들었다.
바보 같은 더크가 아내를 허름한 찰스의 숙소에 머물게 하고 싶지 않다고 자신이 나가겠다고 했을 때는 떨떠름했지만, 그는 더크의 아내인 블란치와 둘이서 더크의 집에서 지냈다. 블란치는 찰스의 모델이 되어주었다. 찰스는 블란치의 누드화까지 그렸다. 둘이서 3개월가량을 같이 지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블란치의 간섭과 요구가 점점 커졌다. 블란치는 찰스를 소유하고 싶어 했고, 찰스는 블란치가 영국에 있는 자신의 아내처럼 자기를 통제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녀에 대한 열정이 식어버렸다. 그래서 그는 그녀 곁을 떠나버렸다. 자신이 떠나면 블란치가 더크와 다시 살거나 독립할 걸로 생각했다. 하지만 블란치는 심리적인 불안정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을 하고 만다. 찰스도 이 일로 물론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전적으로 자신의 잘못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블란치는 자신의 인생의 어려움들을 스스로 잘 극복하지 못해서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한 거라고 변명했다.
시간이 지나 더크를 만나게 되었을 때 찰스는 블란치의 누드화를 가지라고 그에게 말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에도 불구하고 찰스의 예술성을 아끼는 더크 스트로브는 찰스에게 네덜란드로 같이 가자고 권유하는데, 그는 다른 중요한 일이 있다고 거절한다. 이후 찰스는 파리의 생활을 정리하고 마르세이유로 떠난다.
찰스는 처음에는 자기 그림을 아무에게도 팔지 않았다. 자신이 원하는 어떤 열망을 그림 속에서 구현해보려고 애썼는데 썩 만족스럽지 않았던 것이다. 나중에는 생계를 위해 화상에 그림을 맡겨 팔기도 했는데 잘 팔리지 않았다. 그 당시 사람들이 그의 그림의 새로운 예술성과 가치를 알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마르세이유에서의 생활은 무척 비참했다. 거리의 부랑자들을 재워주는 곳(야간 숙박소)에서 잠을 잤고, 끼니도 거리의 빈민 급식소에서 해결했다. 야간 숙박소에서 더 이상 잠을 잘 수 없게 되자 터프 빌이라는 사람의 하숙집에서 지냈는데, 이 터프 빌이라는 사람과 관계가 악화되어 더 이상 마르세이유에 머물 수 없게 되었다. 이때 함께 생활하던 캡틴 니콜스의 도움으로 배를 타고 그곳을 떠나게 된다.
찰스가 타히티에 정착한 것은 운명인지도 몰랐다. 배를 타고 이곳저곳 다니다가 타히티에 가게 됐을 때 그는 이곳이 평생 자신이 원했던 바로 그곳이라는 확신을 얻었다. 물론 타히티에서도 그는 가난했고, 화구를 살 돈을 벌기 위해서만 일을 했다. 타히티에 있는 플뢰르 호텔의 여주인이 그에게 참 잘해주었는데, 그녀는 자신의 친척뻘 되는 원주민 소녀를 찰스에게 소개해주었다. 원주민 소녀 아타는 찰스와 함께 살기를 원했고 찰스는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아타의 고향집은 타히티의 아주 깊은 산속에 있었다. 둘은 그 깊은 산속에 들어가 꿈같은 3년의 시간을 보냈다. 찰스는 이곳에서 무척 행복했다. 원하는 그림을 마음껏 그렸다. 가끔 원주민들이 모델이 되어주었다. 아타와 아이도 낳았다. 아타는 영국에 있는 부인이나 블란치처럼 자신을 소유하려고도 통제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다 해주고 간섭하지 않았다. 그는 그게 무척 마음에 들었다. 고요한 산속의 원시림도 그의 예술적인 영감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마치 이 세상과는 다른 어떤 공간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 행복이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았다. 그는 나병에 걸리고 말았다. 찰스는 아타와 아이들, 모두를 보내고 혼자 지내고 싶었지만 아타는 끝까지 그의 곁에 있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아타의 보살핌 속에 찰스는 나병에 걸린 채로 그림을 그리는데 몰두했다. 병은 점점 더 깊어졌고 죽기 일 년쯤 전부터는 눈이 멀어버렸다. 그래도 찰스는 그림 그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찰스는 오두막 안쪽의 벽 전체를 그림으로 꽉 채웠는데 그의 모든 열정과 남은 힘을 다 바쳐서 그린 그림이었다. 눈으로는 그 그림을 볼 수 없었지만 마음의 눈으로는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볼 수 없었을 때 오히려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예술적 경지를 표현했다. 죽음이 임박했을 때 찰스는 아타에게 마지막 부탁을 했다. 자신과 함께 그림이 그려진 오두막을 불태워 달라고. 이때 찰스의 심정이 어떤 것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그는 그 최후의 완성품이 세상에 공개되기를 원치 않았던 것 같다. 어떤 신비는 감추어져 있는 편이 차라리 나을 때도 있으니까 말이다. 찰스는 그렇게 최후의 순간까지도 예술혼을 불태우다가 불꽃처럼 사라져 갔다.
그의 작품들은 세상에 많이 남아있었다. 자신을 도와준 사람들에게 고마워서 선물한 작품들도 있었다. 세상이 그의 천재성을 알아보기 전까지 그의 작품은 어느 집 다락 구석에 처박혀있거나, 아주 헐값에 팔리거나 했다.
그가 자신의 열정을 억누르면서 그냥 증권거래인의 삶으로 만족하고 살았으면 어땠을까? 그는 행복했을까? 찰스는 살아있을 때 자신의 작품을 인정받고 싶어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러나 마음에 품고 있던 예술의 완성을 위해 열정을 다 바쳤으니 설령 나병으로 고통스러운 종말을 맞이했어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 인생도 살면서 가끔 이렇게 현실과는 다른 열망에 휩싸일 때가 있다. 찰스 스트릭랜드처럼 그 열망을 쫓아 살아가는 경우는 드물지만.
무엇이 정답인지는 사실 판단하기 어렵다. 찰스가 위대한 예술가가 되었다고 해서 가족을 버리고 자신의 길을 갔던 그의 결단이 정당화되는 건 아니다. 그림을 그리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만큼 삶이 힘들었다면 존중해줘야 될 것 같은 생각은 들지만.
찰스 스트릭랜드의 인생은 나와 같이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이루지 못한 꿈을 갖고 있는 사람. 지금 당장이라도 이 지옥 같은 생활을 벗어나고 싶은 사람. 가족에게 얽매여 하고 싶은 일을 못하고 있는 사람. 모든 것을 훌훌 벗어던지고 어딘가로 떠나고 싶은 사람 등. 찰스 스트릭랜드의 삶이 자신의 삶에 투영되어 열망을 일으키는 사람도 많을 거라 생각된다.
찰스 스트릭랜드의 삶은 안락한 현실을 버리고 자신이 원하는 불꽃같은 삶을 산 것 때문에 판타지를 일으키는 매력을 준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 그의 삶은 결코 쉽지 않았다. 가난과 굶주림에 허덕여야 했고, 생의 마지막 3년은 행복했지만, 마지막 일 년은 가장 고통스럽게 보내야 했다. 마치 고통이 예술적 완성을 이루게 한 것처럼 보인다.
만일 원하는 예술적 성취를 이루는 대신 고독과 굶주림과 고통의 삶을 살아야 하고, 살아서는 영광을 얻지 못한다고 한다면 몇 명이나 이런 삶을 선택할까?
<참고서적> 달과 6펜스/서머싯 몸/송무 옮김/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